"옷 사 주세요."중학교 2학년 딸, 옷 타령이 심심찮다. 아빠인 내가 듣기에도 과하다 싶다. 그러니 아내는 어쩌겠는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힌 아내가 기어이 쓴 소리를 내뱉는다.
"넌 허구한 날 옷 타령이냐? 책 사주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 그러면 소원이 없겠다."딸의 반응도 만만찮다. 나 같으면 엄마에게 저자세로 아양을 떨어서라도 목적을 달성할 것 같다. 그런데 딸은 아주 당당하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그 의미를 알 듯하다.
"옷이 필요하니까 사 달래지. 필요 없으면 뭣하러 옷을 사 달랄까.""너 말 잘했다. 옷이 필요하면 아르바이트 해서 사. 엄마 맘에 안 드는 옷만 사고... 하나같이 품질도 별로야. 싼 게 비지떡이라고 인터넷 쇼핑만 기웃거릴 생각말고 매장에 가자니까."아내가 제시한 아르바이트 가격에 웃음이 피식 나온다. 속 터지는 와중에도 일해서 스스로 벌어 옷 사라는, 일한 만큼 대가를 주겠다는 아내의 현명한 대처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화분 물주기 1000원설거지 1000원청소기 돌리기 3000원걸레질 5000원쓰레기 분리수거 3000원엄마랑 하루 종일 놀아주기 1만 원엄마랑 반나절 놀아주기 5000원.딸의 아르바이트가 끝나자 두 모녀가 컴퓨터 앞에 앉아 옷을 고르느라 야단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던 팽팽한 대립 속의 두 여인, 잠시 휴전이다. 휴전 중에도 티격태격 말씨름은 여전하다.
"야, 너무 짧지 않아? 색깔도 그렇고. 깔끔한 티셔츠만 걸쳐도 예쁠 나이인데... 중학생답게 좀 수수하게 입어. 줄무늬 스타킹은 완전 아니다. 네 다리 수박 만들래?""엄마, 요즘 이 정도는 입어줘야 유행에 뒤쳐지지 않아."아빠 입장에선 모녀 간 대화가 신통방통하다. 이렇게 구입한 옷을 입은 딸은 무척 세련돼 보인다. 톡톡 튀는 취향이 다른 아이들과 확연히 구분될 정도다. 그래서인지 딸 친구들까지 딸의 아이템을 쫓아 덩달아 사는 일까지 비일비재하다.
우리 딸, 엄마 마음도 이해해주렴
모녀 간 티격태격은 맞지 않은 옷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인터넷서 구입한 옷 사이즈가 커 덩치 큰 친구에게 선물한 일도 있었다.
"옷은 매장서 직접 입어봐야 맞지. 인터넷서 사면 저번처럼 버리는 수가 있어." "그냥 집에서 인터넷으로 편하게 사면되지. 뭣하러 시간 들여 매장에 가.""인터넷 쇼핑 시간은 안 아깝니? 매장에서 고르면 엄마가 팍팍 쏠게.""거긴 내가 원하는 스타일 옷이 없다니깐."둘 다 이해된다. 그렇지만 옷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렇게 입고 다니는 아빠 입장에선 이해 안 되는 부분도 많다. 자칫 이런 속마음을 꺼냈다간 두 모녀에게 꼼짝없이 당할 테니 이럴 땐 입 닫고 있어야 한다.
하나 우스운 게 있다. 아내는 딸이 입는 옷을 보면 못마땅해 하면서도 속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딸. 엄마 옷 사러 갈 건데 같이 가자.""엄마, 혼자 가. 나 바빠.""네가 옆에서 어떤 게 어울리는지 봐줘야 엄마가 예쁜 옷을 사지."예쁜 옷 입고 싶은 마음은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인 듯.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해야겠다.
아내는 명절 때 부모님이 사 주시는 옷을 입고 자란 수동적인 세대다. 스스로 옷을 고르고 사는 건 어른이 된 뒤부터다.
딸은 인터넷을 통해 스스로 옷을 골라 구입하는 능동적인 세대다. 그래 아내는 사고 싶은 옷을 마음껏 사는 딸이 부러우면서도 부담스러운 게다. 이런 엄마 마음 알아주면 어디 덧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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