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파업이 다섯 달째 접어들었고, KBS 파업도 90일이 다 되어간다. YTN과 <연합뉴스>도 여러 차례 파업을 해왔다. 사상 초유의 이런 동시다발 장기 파업사태를 보면서, 그리고 최근 <오마이뉴스>에 실린
<"사장님, 제발 나가세요"... 간 큰 신입사원들>(5월 20일)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파업 중인 KBS, MBC, <연합뉴스>의 '막내기자'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40년 전 내 모습이 떠오른다. 40년 전, 서슬 퍼런 유신독재 정권이 아예 언론자유를 근원적으로 말살해버린 그때, 편집국에는 수시로 정보기관 요원들이 드나들었고, 유신 독재정권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기사가 나가면 어김없이 정보부 등에 붙들려가 치도곤을 당했다.
결국 기자들은 '언론인 영혼의 죽음'인 자기검열을 하기에 이르면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더니, 끝내는 취재현장에서 '개와 기자는 접근 금지'라는 팻말과 마주하게 되었다. 언론의 핵심 기능인 사실보도와 권력에 대한 감시·비판·견제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는 언론을 시민들은 언론으로 보지 않았고, '개와 동일한 존재'로 보았다. 그 팻말 앞에서 나는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40년의 세월이 지나 파업에 참여 중인 막내기자들의 이야기와 모습에서 나는 40년 전의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막내기자들의 나이도 40년 전 나와 비슷하고, 기자로서 제 몫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비슷했다. 한 막내기자는 "저는 부끄럽지 않은 기자가 되고 싶다. 독자들과 취재원, 같이 일하는 동료, 그리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40년 전, 선배들은 부끄러워 했는데...40년 전과 다른 점도 있다. 그때는 언론자유를 압살한 군부 독재정권의 탄압에 굴종을 하면서도 다수의 선배들과 간부들은 함께 부끄러워했고, 그래서 언론자유 투쟁에 앞장서는 후배들 목을 치거나 정직·감봉·지방유배 등의 불이익을 주는 일에 적극 나서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정권이 심어놓은 사장뿐 아니라 그 주변의 친위세력들, 그들의 추종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나서 후배들을 핍박하고, 집권세력의 충직한 종노릇을 하고 있다. 기자생활을 하다 언론학 교수가 된 미국 인디애나 대학 허버트 알철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언론은 '권력의 요원'(Agents of Power)이 되고, 기자라는 이름을 가진 집단이 또한 '권력의 요원'이 되어버린 셈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버렸을까. 이런 무리들이 정권보다 더 직접적으로 후배들을 핍박하고, 그들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한다. 권력이 무한한 것처럼 그렇게 오만하고 방자했던 정권의 핵심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권력 무상'을 느끼지 못하는 몽매한 무리가 아닌가.
막내기자들의 '죽비' 소리
그래서 막내기자들이 자기 회사 사장에 대해 내린 평가를 들으면, 죽비로 내려치는 듯하다. 그러나 후배들의 이런 평가를 듣는 사장 또는 그 친위세력들은 여전히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을 터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애초 후배들을 그토록 핍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막내기자들이 자기 회사 사장에 대해 어떤 죽비를 내려치는지 한번 보자.
MBC 막내기자 : "김재철 사장은 '홍길동'이라고 하겠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니까. 김재철 사장 전공이 사학인데 누구보다 역사적 안목으로 보면 진실이 승리한다는 것을 잘 아실 거다. 전공적 관점을 잘 발휘해서 용단을 내렸으면 좋겠다." <연합뉴스> 막내기자 : "저는 지금도 박정찬 사장을 제 선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후배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수십 년간 몸담았던 <연합뉴스>를 위해서 바르고 빠른 결단을 내려줬으면 좋겠다."KBS 막내기자 : "김인규 KBS 사장은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다. 예전에 우리 김 사장이 '공영방송론'이라는 책을 냈다. 그 책에 온갖 공영방송의 좋은 이야기가 다 들어 있고, 평소에 자기는 한평생 공영방송에서 일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런 사람이 5공 때 노골적으로 정권을 찬양하는 리포트를 했고, 지금은 특보사장을 하고 공영방송을 망치고 있다. 이중적인 모습이다.사장 대 평직원이 아니라, 같은 저널리스트로서 김인규 사장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사장이 쓴 '공영방송론'을 스스로 다시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자신이 말한 공영방송의 이상이 낙하산 사장이 오는 것인가? 신입으로 빨리 돌아가 일하고 싶다."방송독립을 원하지 않는 무리들신문이야 원래가 수구보수 빛깔이 강하다. '조중동'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경제지, 대부분의 신문들은 강자와 자본의 논리를 펴왔다. 그래서 방송이 언론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우리나라 언론조건은 완전히 한 쪽으로 쏠리는 극도의 편중을 보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일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만들어졌다. 신문뿐 아니라 방송과 통신까지, 그러니까 제도언론의 90%가 정권친화적인 수구보수의 목소리를 내어왔다. 그러기에 방송이 언론 본연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저항하는 것을 이들 세력이 환영할 리 만무다.
그러니 수구보수 정당인 새누리당을 비롯하여 조중동, 경제지, 정권 친위대가 장악한 방송, 수구성향의 KBS 옛 노조 등은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방송사 파업사태에 안하무인의 무시작전을 펴고 있다.
김재철 MBC 사장을 둘러싼 온갖 의혹과 도덕성 시비, 실정법 위반 논란 등에 대해 "기업 사장의 도덕적 문제를 정치권에서 왜 개입해야 되나?", "개인적으로 김재철이 뭐를 했던 간에 그게 무슨 국민적 의혹을 가질 사안인가? 흥미는 있겠지만"이라고 말한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 발언은 그런 무시작전의 속내를 가장 잘 드러내었다.
4년 전, 나를 KBS에서 쫓아내기 위해 청와대, 검찰, 감사원, 국세청, 방송통신위원회, 교과부, KBS 이사회 등 권력기관들이 총동원되었고, 새누리당의 뿌리인 한나라당과 조중동, 그리고 수구 성향의 KBS 옛 노조가 강고하게 합동작전을 폈던 그 정치개입과, 김재철 사장 건에 대한 무시작전은 도무지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극도의 이중성이고, 모순이다.
국민을 바보로 알거나, 그렇게 무시해도 좋다는 오만한 발상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는 양 이야기할 수 있는지, 참으로 기이하기까지 하다.
방송 파업,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다파업에 참여한 후배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의 싸움은 이미 많은 것을 얻어냈다. 파업 과정에서 지금의 정권과 그 친위세력의 폭력성, 도덕성, 인간의 품성이 어떠한지 모두 드러나게 되었다. 모순된 구질서를 허물고 새 질서를 만들 때 청산 대상이 누군지가 너무도 분명해졌다. 그리고 새 질서의 중심은 바로 내일의 주인인 젊은 후배들이다.
이와 함께 파업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고, 그것은 앞으로 참 언론을 위해 매우 소중한 토양이 된다. 무엇보다 이런 퇴행의 시대,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역사의 축복이다. 박해를 받는 이들의 편에 동참함으로써 시대의 아픔, 역사의 아픔을 함께하게 되고, 이를 통해 참 인간, 참 지성인, 참 언론인으로 성숙해지고, 그것이 역사발전과 희망의 씨앗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