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신자유주의, 국가와 시장,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란 다소 어려운 용어에 숨겨진 논쟁의 대척점은 한국 사회의 최대권력의 하나로 떠오른 재벌과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서 결정적으로 갈린다. 장하준 교수 등은 "경영권은 보장해 줄 테니, 세금을 왕창 내서 복지국가 만드는 걸 도와달라"고 말할 만큼 재벌의 경영권 보장과 복지 재원의 확보가 '타협' 가능하다고 본다."(5월 30일 치 <한겨레> 기사 중에서)재벌의 아이콘인 이건희와 개발독재의 화신인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건희와 박정희에 대한 평가에서 진보개혁 진영의 경제학자들은 양쪽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해밀턴·리스트주의자인 장하준 교수는 재벌과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반면, 진보개혁 진영의 많은 경제학자들은 재벌은 개혁(혹은 해체)해야 하고, 개발독재의 잔재는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벌의) 경영권은 보장해 줄 테니, 세금을 왕창 내서 복지국가 만드는 걸 도와달라'는 논지를 펴는 장하준 교수는 너무 순진하거나 우리나라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장하준 교수는 유럽에서 살고 있어서 우리나라가 유럽처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인다.
재벌의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공산주의'를 운운하는 이건희가 과연 복지국가를 위해 세금을 왕창 낼 수 있을까. 초과이익공유제는 커녕 지공주의(地公主義) 국가를 위해 지대를 세금으로 낼 수 있을까. 이건희는 커녕 우리나라 국민들조차도 정작 복지국가에 필요한 세금을 자신이 내게 되면 복지국가에 부정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일전에 복지국가에 관해 의미있는 설문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 중에서는 복지국가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정작 자신이 복지국가에 필요한 세금을 더 내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유럽은 기업들 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수준이 높고, 서로를 신뢰하며, 서로 책임지려는 공동체성이 존재하는 기반 위에서 복지국가를 이뤄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재벌들과 국민들은 어떤가. 골목 상권의 빵집, 순대집, 떡볶이집까지도 잡아먹으려고 안달인 재벌들에게 초과이익공유제나 토지가치공유제가 씨알이나 먹힐까. 또 우리 국민들은 복지국가를 위해 자신이 세금을 더 낼 마음이 있을까.
복지국가를 하려면 재벌과 고소득층뿐만 아니라 결국 중산층과 자영업자, 소비자도 건드려야 한다. 지금 논의되는 복지국가의 재원은 최우선적으로 걷어야 하는 토지의 지대가 아닌 소득세를 누진적으로 때리고 부가세를 더 높이자는 것이다(법인세는 세계적 추세이니 논의에서 제외하자).
사실상 전 국민을 대상으로 돈을 걷어야 하는 이런 식의 복지국가를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 과연 할 수 있을까. 박근혜든 야당이든 복지국가를 내걸고 대권을 차지한 다음, 복지국가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현상유지(Status quo) 혹은 어정쩡하고 기형적인 한국형 복지국가 정도로 자리잡을 확률이 높다.
장하준 교수는 '경영권은 보장해 줄 테니, 세금을 왕창 내서 복지국가 만드는 걸 도와달라'고 이건희를 설득할 자신이 있는가? 그리고 국민들에게 '복지국가에 필요하니 소득세, 부가세 더 내라'고 설득할 자신이 있는가? 만약 설득이 가능하면 복지국가도 가능하다. 그러나 설득이 안 되면 복지국가는 물 건너간다.
덧붙이는 글 | 고영근 기자는 희년함께(www.landliberty.org)에서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고,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운영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