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 마을 입구에는 수령 400년을 넘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떡하니 버티고 섰다. 마을을 안고 도는 길 양옆으로 심긴 체리 가로수 300그루에는 여인의 입술을 닮은 체리가 송골송골 매달려 익어가고 있다.
이곳이 체리를 주제로 선정된 국내 유일의 농촌전통마을이다. 공장 하나 없는 청정지역이며,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될 정도로 평화로운 마을. 이 마을 40가구 중 60%가 넘는 25 농가 50여 명이 체리 농사를 하고 있다.
이 마을에 체리 나무가 처음 심긴 것은 1992년이다. 이 나무를 심은 주인공은 마을 주민도 농민도 아닌 서울토박이로 30년 동안 서비스 레저사업에 종사하던 이보섭(72) 체리동산 대표다.
인간의 욕심이 나무를 고생시켰어
나지막한 산 8200㎡에 자리 잡은 체리동산은 풀한 포기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정리가 돼 있다. 체리를 노리는 새를 쫓기 5분마다 울리는 조류퇴치기는 사람까지 놀라게 했다.
과수원에는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안승준 박사 일행이 이곳에서 채집한 곤충을 살펴보고 있다. 이 자료로 체리에 접근하는 병해충을 연구하고 방제에 활용하게 된다.
이보섭 대표는 농장을 어찌 관리할까 싶은 정도로 왜소한 체구에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 선한 인상이다. 꾸밈없는 시원한 말투와 작은 눈매에선 열정이 묻어난다. 간혹 육두문자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은퇴 후에 뭘 할까 고민하다 과일농사를 선택했다. 사과, 배, 복숭아, 포도 등 과일이 많았지만 자유무역, 농약문제 등을 고려해 체리를 선택했다. 특히 체리 수확기가 모내기를 끝낸 5월 말에서 6월이어서 일손 구하기도 수월했고, 농촌 일자리 창출에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했다.
서울에서 체리 묘목 130주를 구입해 심고 첫 수확을 한 1999년까지 7년 동안 평일에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시골에서 체리나무 키우는데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체리 농사는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다.
"체리나무를 심고 많은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 배웠는데 가르치는 게 다 다르더라고,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 해서 시도하다가 농사를 말아 먹었어요. 나도 고생 했지만 나무가 너무 고생을 했어요."이 대표는 농사도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좀 더 쉽고 편하게 농사지으려는 욕심, 많은 수확을 보려는 욕심 때문에 나무가 몸살을 앓고 병치레도 많이 했단다.
"농사지으면서 어려웠던 게 욕심을 버리는 거였어요. 나무를 낮게 키워서 쉽게 따볼까 싶어 전정을 하면서 나무를 혹사시켰어요. 그런데 느티나무를 보고 배웠지. 전정도 안하고 손도 안대도 잘 크잖아요. 그래서 결론은 '그냥 내버려 두자'였어요. 그저 먹을 것(비료) 주고 배수 잘해주고 그렇게 욕심 버리고 자연스럽게 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줬더니 잘 자라더라고. 인간의 욕심이 나무를 고생시켰어요."판로 막히자 찾아간 백화점우여곡절 끝에 체리를 수확 했지만 이번엔 판로가 문제였다. 체리를 들고 농산물 유통시장에 갔더니 인건비조차 건지지 못하게 낮은 가격을 불렀다. 백화점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물량 확보가 문제였다.
"첫 수확을 했는데 어찌나 기쁘던지 이제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식 같은 놈들을 들고 서울 가락동농수산물시장에 들고 갔는데 그곳 상인들이 가격을 후려치는 거야, 1kg에 1만5000원을 생각하고 갔는데 1만 원도 안 준다는 거야.(격앙) 그래서 서울의 한 백화점으로 들어가서 식품팀장을 찾았어요. 날 소개하고 체리 구매를 요청했더니 과일 코너 직원들을 모아놓고 수입 체리와 시식회를 하더라고.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 체리가 맛있다고 하니까 식품팀장이 하루에 200kg씩 납품하라는 거야. 백화점에서 우리 농장 견학까지 했어요."하지만 걸음마 단계였던 체리동산 하나로는 물량을 댈 수가 없었다. 체리작목반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마을주민들 설득에 나섰지만 누구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체리라는 과일 자체가 생소했을 뿐더러 7~8년 키워야 수확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저었다. 음성지역 영농지도자들을 모아놓고 사업설명회를 했지만 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을 청년들을 설득한 끝에 지난 2000년에 '갑산체리작목반'을 만들었다.
"체리는 고부가가치 웰빙 과일이에요. 나무를 잘 키우고 관리 잘하면 50년 정도 생산이 가능하고, 1그루당 30~40kg 정도를 딸 수 있어요. 1kg당 2만 원 정도 시세를 유지하는데 체리에 항산화 물질인 안토시아닌이 함유돼 암과 심장병 예방에 도움을 주고 관절염과 통풍 증상완화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어요."아직 성공하지도 않았는데... 방송국은 왜?
현재 이곳에서 생산되는 체리는 전량 직거래로 판매된다. 과수원을 방문한 소비자가 맛을 보고 현장에서 구입하기도 하고 한번 먹어본 사람은 그 맛에 반해 단골로 이어지고 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리다 보니 소비자들의 항의를 받기 일쑤다. 입소문을 듣고 각 방송사에서 취재 요청이 쇄도했지만 이 대표는 거절했다.
"방송국에서 취재 오겠다는 전화가 많이 왔는데 모두 거절했어요. 왜냐하면 전 국민을 향해서 사기를 치기 때문이에요. 방송국에서 한다는 일이 수확하는 모습 보여주면서 돈 많이 벌었다고 홍보하지 깨졌다는 소리 하지 않잖아요. 그럼 그걸 시청하는 농사꾼은 나도 체리농사 해야 되겠다고 생각할거 아닙니까? 나는 아직도 성공했다고 생각지 않아요.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하지. 지금도 피보고 있어요.(웃음)"이 대표는 마을 전체를 관광농원으로 만드는 것이 꿈이다. 체리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나는 청정 농산물을 직거래해서 소비자는 싼값에 질 좋은 농산물을 사먹고 농민은 정성들여 키워 제값 받고 팔게 하고 싶단다.
"어느 날 갑자기 텔레비전에 갑산리가 나오는 거야. 마을 주민들이 보겠지. 많은 차들이 올 거고 체리만 사가지고 가면 주민들은 먼지만 먹게 되는데... 이러면 안 돼요. 체리 농민은 체리 팔고 주민은 자신이 생산한 고추, 된장, 고추장 같은 거 팔고 이러면 동네가 사는 것 아닙니까? 나 하나만 잘 되는 게 아니라 함께 잘돼야 해요."이 대표에게 앞으로 희망에 대해 묻자 "후배들이 잘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이제 나는 없다. 내 존재는 생각을 말아야 한다. 시기를 정해 모든 짐을 내려놓고 월악산으로 들어가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후배들이 잘하고 있고 앞으로 잘 되길 바라는 게 내 꿈이에요. 나중에 체리 밭에서는 그럴 거 아냐, '이보섭이 미친놈이 미친 짓 하다가긴 했는데 재미있다' 그거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 이상 즐거운 게 어디 있어요.(큰 웃음)"인터뷰를 마친 이 대표는 과수원을 돌며 자신의 손때가 묻은 돌 하나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소개했다. 주변에는 두릅, 모과, 복숭아, 자두, 포도, 머루, 밤나무를 비롯해 120년 된 다래나무가 심겼다. 체리를 제외한 모든 수확물은 농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다래나무를 설명하던 이 대표가 "옮겨 심고 제발 살아 달라고 3년간 무릎 꿇고 빌었다"고 말해 주변을 웃겼다.
"자신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합니다"
과수원과 주변이 벌초를 하고난 다음 산소처럼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가족단위 관광객이 벌레며 뱀 때문에 산책을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정리했다고 전했다. 과수원과 산 경계 작은 돌 위에 장갑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어 물었더니 멧돼지며 고라니가 사람냄새에 도망가라고 올무나 덫을 놓지 않고 장갑을 놓아 뒀단다.
이 대표는 지난 20년 동안 야산을 체리과수원으로 일궜지만 자신의 소임을 다했기에 어제든 미련 없이 떠날 거란다. 또 자신과 체리 농사를 함께한 후배들이 잘되는 것이 희망이라고 밝혔다. 후배들을 위해 이 대표는 이런 조언을 남겼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농업은 자신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이보섭표 체리, 이보섭표 한우, 이보섭표 고추 이런 경쟁력 없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