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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이인성 탄생 100주년기념'전 대형홍보물
덕수궁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이인성 탄생 100주년기념'전 대형홍보물 ⓒ 김형순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정형민)은 이인성(1912~1950) 탄생 100년을 맞아 '향(鄕) 이인성 탄생 100주년기념'전을 덕수궁미술관 1층에서 8월 26일까지 연다. 그는 수묵에서 양화의 전환하는 한국미술근대기에 큰 성과를 남겼다. 그는 '그림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다'며 향토색을 중시했다. 이번에 새로 발굴한 작품을 포함해 시대별, 장르별로 75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를 위해 미술관 측에서 많은 준비를 했다. 작가에 대한 전문가 평가회와 소주제 학술행사 등을 열었다. 이를 토대로 이인성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지난해 말부터 공고로 수집한 자료와 유족이 보관해 온 작가의 체취가 풍기는 서적, 엽서 등 200여 점도 공개된다. 서구 미술이 일본을 통해 우리에까지 어떻게 전해졌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향토적 서정미 정착시킨 '조선의 고갱'

 이인성 I '가을 어느 날(On an Autumn Day)' 캔버스에 유채 96×161.4cm 1934.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인성 I '가을 어느 날(On an Autumn Day)' 캔버스에 유채 96×161.4cm 1934.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이인성은 가난 때문에 보통학교(일제 초등학교)만 마치고 공부를 더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독학과 그의 선배인 서동진(徐東辰)의 지원에 힘입어 일제문화통치로 시작한 전람회를 통해서라도 인정받아야 했다. 1929년 17세로 수채화 '그늘'로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으로 입선하고, 19살에는 특선을 차지하며 이후 거의 모든 상을 휩쓴다.

그의 천부적 재능을 높이 산 대구 유지들 도움으로 일본으로 간 이인성은 도쿄의 한 크레용회사에 취직해 낮에는 돈을 벌면서 밤에는 태평양미술학교(야간부)에서 공부했다. 그 후에도 12년동안 <선전>에 출품해 최고상인 창덕궁상까지 수상했고, 일본의 <제전>(제국미술전람회)에서도 특선을 했다. 25살에 하늘에 별 따기라는 <선전> 추천 작가가 된다.

제13회 <선전> 특선 작이기도 한 그의 30년대 대표작 <가을 어느 날>은 원시적 생명력을 예찬하는 고갱 풍으로 푸른 하늘과 붉은 대지를 배경으로 향토적 서정주의가 강하게 풍긴다. 누렇게 익은 벼와 황금빛 해바라기의 풍경에 검붉게 그을린 얼굴을 한 채 바구니를 든 반라의 처녀를 엉뚱하게 등장시켰으니 당시에 큰 충격을 줬을 것이다

수채와 유채, 정물과 풍경 경계 넘어

 이인성 I '카이유(Kaiyu)' 종이에 수채 78×57.5cm 193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인성 I '카이유(Kaiyu)' 종이에 수채 78×57.5cm 193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이인성은 수채도 유채도 능수능란했고, 정물이나 풍경이나 인물 등 그 어떤 장르도 거침없이 소화했다. 위에서 보듯 수채화 <카이유>(1932)는 속도감 넘치는 붓질이 돋보인다. 또한, 구성도 깔끔하고 도시적 세련미가 물씬 풍긴다. 이 역시 <선전>에서 특선한 작품이다.

카미유가 우리말의 '쾌유'와 발음이 비슷해 사람들 아픔을 덜어주고 시대의 상처를 씻어준다는 뜻으로 읽혀진다. 창작에 있어 이런 일대 도약을 이루며 대전환기를 맞은 건 일본유학 때문인가. 그의 획기적 구성과 색감은 박상옥, 류경채 등에게도 영향을 준다.

재현보단 표현을 중시하는 근대회화 

 이인성 I '여름 실내에서(Room in summer)' 캔버스에 수채 71×89.5cm 1934. 개인소장
이인성 I '여름 실내에서(Room in summer)' 캔버스에 수채 71×89.5cm 1934. 개인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이번엔 이인성의 특징이 잘 드러난 <여름 실내에서>를 보자. 짜임새 있는 구도 속에 그만의 원시성과 서정성을 잘 융합했다. 프랑스의 인상주의나 독일의 표현주의 요소가 풍부하고 수채화임에도 유리창을 들어오는 햇빛의 강도가 진하다. 거기에 분홍 고무신 같은 토속적 오브제까지 끌어들여 이인성만의 독자성을 확보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적청록 등 강력한 원색으로 사물의 재현보단 표현을 중시한다. 그리고 실제를 그린 오른쪽 실내풍경과 상상으로 그린 왼쪽 창문 밖 풍경을 안팎이 대조시켜 관객에게 별세계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쿠션, 의자, 탁자 등은 1930년대에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세련된 가구를 많이 그려 당시 대구가 근대적 문물의 세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인성이 천재인 진짜 이유는 뭔가

 이인성 I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채 61×50.5cm 1940년대
이인성 I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채 61×50.5cm 1940년대 ⓒ 국립현대미술관

 이인성 I '실내(Interior)' 캔버스에 유채 91×117cm 1935. 개인소장
이인성 I '실내(Interior)' 캔버스에 유채 91×117cm 1935. 개인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1935년 작품인 <실내>는 장인병원의 한 작업실에서 그린 것으로 마티스 풍이고, 1940년대 작품인 '해바라기'는 고흐 풍이다. 식민지 시대가 주입한 미의 흔적도 없지 않으나 화사한 분위기 속에서 빠른 붓질과 강렬한 색채로 회화의 진수를 보이며 고리타분한 당대의 화풍을 쇄신한다.

이인성의 진짜 천재인 이유는 당시 <선전> <제전> 등에서 모든 상을 휩쓸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1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조선화단에 분할법, 대각선구성, 색채대비 등을 도입하고, 또한 뭉크, 고흐, 고갱, 세잔, 마티스 등 유럽 미술을 한데 녹여 우리 체질에 맞게 토착화시켰기 때문이다.

기자간담회 질의응답시간에, 우리보다 백년 앞선 1930년대 일제 고급문화를 이인성이 그렇게 빨리 소화해낸 비결이 뭔지 물어봤을 때 나온 답변 중 "전 어려서 집에 해부학, 건축학 관련된 그림책이 많아 아버지가 의사나 건축가인 줄 알았다"라는 이인성의 장남, 이채원(이인성기념사업회 회장)씨의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인성은 그렇게 노력하는 천재였다.

불운한 식민시대, 작가의 자화상

 이인성 I '자화상(Self-Portrait)' 나무에 유채 26.5×21.8cm 1950. 개인소장. 작품 설명에 여념이 없는 국립현대미술관 박수진 학예연구사
이인성 I '자화상(Self-Portrait)' 나무에 유채 26.5×21.8cm 1950. 개인소장. 작품 설명에 여념이 없는 국립현대미술관 박수진 학예연구사 ⓒ 김형순

천재 화가의 사생활은 평탄치는 않았다. 일본 유학에서 귀국했던 23세 당시 그는 유학시절 사귄 의사의 딸과 결혼했으나 아내가 4년 만에 죽고 만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주옥같은 작품을 계속 쏟아냈다. 해방이 된 뒤 그는 이화여고에 출강하며 아현동에 안정된 새 가정도 꾸렸으나, 1950년 11월 귀가 길에 사소한 시비에 의한 경찰의 총기 오발로 38세에 요절했다.

말년의 자화상을 보면 눈을 감고 있고 무표정하다. 그가 1930년대 잘 나갈 땐 부와 명성을 얻고 안락한 생활 속에서 부르주아적 취향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그 역시 한국작가로서 불운한 식민지시대 속에서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부활한 화가, '가슴'으로 다시 만나다

 이인성 I '다알리아' 캔버스에 유채 72×99cm 1940년대. 개인소장
이인성 I '다알리아' 캔버스에 유채 72×99cm 1940년대. 개인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박수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근대기에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한 예술가를 '가슴'으로 만나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알리아>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요즘은 흔히 볼 수 없지만 가끔 시골의 뒤뜰 우물과 장독대, 빨랫줄과 다알리아 등이 그립다. 또한 고흐를 닮은 꿈틀대는 붓질도 멋지다.

"고갱은 알아도 이인성을 모른다"는 말처럼 그는 사실 오랫동안 잊힌 작가였다. 그의 전시가 늦어진 이유를 한 기자가 묻자, 미술관 측은 개인이 작품을 많이 소장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반면 보전에는 문제가 별로 없었단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작가의 인간적 면모와 작품세계 전반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여성의 애틋한 아름다움 구현

 이인성 I '해당화' 캔버스에 유채 228.5×146cm 1944. 리움 삼성미술관 소장
이인성 I '해당화' 캔버스에 유채 228.5×146cm 1944. 리움 삼성미술관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세월은 많이 흘렀음에도 오지 않은 그리운 이를 애잔하게 기다리는 내용이 담긴 소설 한 권을 쓰고 싶도록 유혹하는 이인성의 40년대 대표작 <해당화>.

이 그림 속에서 동생을 동반한 것 같은 한 여성은 우산을 접고 뭔가를 멀리 응시한다. 그녀의 표정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갈망과 희구가 깔려 있다. 멀리 검푸른 바다의 먹구름은 1944년이라는 일제말기의 시대적 징조인가. 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함인지는 모르지만 오래 참는 여유로움으로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이 참 아름답다. 이 작품은 1930년대 이인성의 강렬하고 화려한 화풍과는 다른 작가의 정체성이 제대로 묻어 있는 걸작이다.

 1930년대 일본 유학할 때 작가 아틀리에에서 찍은 사진
1930년대 일본 유학할 때 작가 아틀리에에서 찍은 사진 ⓒ 국립현대미술관

1912년 8월 28일 대구에서 이해영과 이금옥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
1928년(16세) 수창보통학교 졸업, '촌락의 풍경'으로 세계아동미술전람회 특선
1929년(17세) 수채화 '그늘' 제8회 선전 입선
1930년(18세) '향토회' 참가(1934년까지) 제9회 선전 '겨울 어느 날' 입선
1931년(19세) 제10회 선전 '세모가경' 특선, 일본 퀸 크레용회사 입사
1932년(20세) 태평양미술학교입학, 제11회 선전 '카이유' 특선, 13회 제전 '여름 어느 날' 입선
1933년(21세) 제12회 선전 '초하의 빛' 특선, 제14회 일본제전 '초하의 뜰' 입선
1934년(22세) 제13회 선전 '가을 어느 날' 특선, 제15회 제전 '여름실내에서' 입선
1935년(23세) 제14회 선전 '경주산곡에서' 창덕궁상(최고상) 수상
1936년(24세) 제17회 일본제전 '한정' 입선. 대구에 '이인성양화연구소' 개소
1937년(25세) 제16회 선전부터 추천작가 선임. 예술카페 '아르스(ARS)' 개업
1945년(33세) 이화여자중등학교(현 이화여고) 미술교사
1947년(35세)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부 출강
1949년(37세)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
1950년(38세) <신경향>에 수필 및 삽화 게재. 11월 4일 불의의 사고로 작고

덧붙이는 글 | - 이인성 화백 누리집(http://www.leeinsung.com)
- 덕수궁미술관은 시설복원공사를 마치고 이번 전시를 무료 개방하고 있습니다. 1층에서는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2층에서는 '한국근대미술: 꿈과 시'전(50여 명, 90여 점)이 열리고 있습니다.

- 관련 프로그램_전시연계 감상교육 일시 : 6/23, 6/30, 7/7, 7/14, 7/21 오전 10시 20분~12시 20분 / 장소 : 덕수궁미술관(전시실, 시청각실, 미술관 외부) 대상 : 초등학생, 중학생 각 1회 30명씩 / 내용 : 감상 및 실기로 구성(120분) 전화 02)2188-6231 /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www.moca.go.kr)



#이인성#향토적 서정주의#근대한국미술#30-40년대 한국미술#조선미술전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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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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