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금), 희망버스 이후 모처럼 부산에 갔습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맞서 85호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고공 농성을 벌였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을 지키겠다며 85호 크레인 중간에서 137일을 함께 싸웠던 한진중공업 박성호 조합원을 비롯한 '85호 크레인의 전사들'이 부산지방법원 354호 법정에서 그의 재판을 지켜보았습니다.
제가 받은 증인소환장에는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집단·흉기등주거침입) 등'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35m 크레인에 올라 살려달라고 절규한 가녀린 여성 노동자의 호소를 저들은 '집단·흉기 등 주거침입을 통한 폭력행위'라고 규정했고, 그는 지난 2월 16일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현대자동차가 김진숙 지도위원을 고소한 사건제가 이 재판에 증인으로 간 사연은 조금 복잡합니다. 검찰은 85호 크레인 고공 농성이 '주거침입'으로 인한 폭력이라며 김진숙 지도위원을 고소했고, 현대자동차는 2010년 비정규직 파업 당시 공장에 들어와 교육했다는 이유로 그를 '주거침입'으로 고소했습니다. 이 두 사건이 병합되었습니다.
2010년 11월 15일, 대법원 판결에 따라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울산 1공장 점거파업을 벌였습니다. 그때 금속노조 단체교섭국장이었던 저는 이 파업과 교섭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이 교육은 농성 프로그램으로 노동조합 경험이 없는 조합원에게 투쟁의 경험을 나누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895일 만에 정규직화를 쟁취한 기륭전자 김소연 분회장, 기아차 비정규직 투쟁을 이끌었던 김영성 전 지회장, 지금은 영화 <부러진 화살>로 유명해진 박훈 변호사, 쌍용차 77일 파업을 이끌었던 조합원들이 농성장을 찾아 소중한 경험을 함께 나눴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에게도 교육을 부탁했습니다. 마침 11월 27일 민주노총의 전국노동자대회가 울산에서 열렸습니다. 정규직 노조간부인 한 대의원에게 부탁하여 김진숙 위원이 농성장으로 들어왔고, 조합원에게 열정적인 교육을 했습니다.
정규직 노조에 의해 쫓겨난 김진숙교육하고 있는 시간에 당시 이경훈 현대차 정규직 노조 지부장과 간부들이 김밥을 전달하러 농성장에 올라왔다가 이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지부장은 이상수 비정규직 노조 지회장과 저를 불러서 "왜 사전 허락 없이 외부 사람을 공장에 들였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교육이 끝난 후 이경훈 지부장은 "외부인이 어떻게 들어왔느냐? 왜 허락도 없이 들어왔느냐?"고 소리를 질렀고, 김진숙 지도위원은 가방도 챙기지 못한 채 공장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녀는 얼마 전에도 울산공장에 와서 정규직 대의원을 교육했는데, 비정규직 농성장에서 교육했다는 이유로 수모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공장 밖으로 나가면서 문자를 보냈습니다.
"박점규 동지가 얼마나 힘드실지 조각이나마 겪었네요.^^;; 그래도 흔들리지 마시고 꿋꿋이 견디시길." 비정규직 노동자의 점거파업에 대한 연대를 외면하고, 농성 중단을 협박했던 당시 현대차지부는 노조 신문과 대의원대회 선전물을 통해 "외부세력이 공장에 들어와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글을 내보냈습니다.
11월 30일 현대자동차 회사도 "농성장 안에 외부세력이 개입, 교육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며 "외부세력의 무책임한 선동과 개입은 사태를 더욱 장기화시킬 뿐입니다"고 회사 신문을 발행했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주거침입'으로 고소했습니다.
부산지방법원 354호 법정 안. 변호사는 당시의 상황을 몇 가지 물어본 후 제가 쓴 책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울산공장 점거 투쟁 기록' <25일>과 현대자동차 노사가 맺은 단체협약을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단체협약 10조에는 "회사는 조합이 요구하는 자의 출입을 보장하되, 조합 사무실에 한한다. 단, 조합간부 동행 시 현장출입 가능"이라고 되어있고, 조합간부는 단체협약 16조 '간부에 대한 예우' 2항에 '조합간부인 임원, 지역 및 부문 위원회 임원과 산하 지회 임원, 대의원, 상무집행위원'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김진숙 지도위원은 단체협약에 따라 조합간부인 대의원과 동행해 합법적으로 현장출입을 한 것입니다. 지금도 김진숙 지도위원은 현대차 정규직 노조의 요청으로 정규직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현대차 노조가 비정규직 노조를 인정했느냐?", "현대차노조가 비정규직 파업에 반대하지 않았느냐?"며 어처구니없는 질문만 던지더니, 김진숙 위원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습니다.
"노동자가 물의를 안 일으키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회"김진숙 지도위원이 항소심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그녀는 차분하면서도 당당한 목소리로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이야기했습니다. 한진중공업의 선박 수주 물량을 필리핀으로 보내고, 최근에는 공장의 자재까지 필리핀 공장으로 빼돌리고 있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필리핀 공장 때문에 한국공장에 수주가 없다는 이유는, 또 다시 근로기준법의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되어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고, 결국 쌍용자동차 22명의 죽음과 같은 비극과 악몽이 반복되는데 이들을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점을 절절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는 1년에 수백 개의 회사에 들어가 노동자에게 교육하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현대자동차에서 자신을 고소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대법원의 판결조차 지키지 않는 국내 최대의 재벌과 무기력한 법을 꼬집었습니다.
"1심 재판부가 크레인 농성과 희망버스가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했는데, 대한민국은 노동자가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면 3년, 5년을 싸우고 수십 명이 죽어나가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습니다."그의 절절하고 살아있는 최후 진술은 오래도록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온 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녀는 살아서 내려왔지만, 공장은 살아 숨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85호 크레인을 고물 처분하듯 팔아치웠고, 공장 담벼락은 두 배로 쳐올렸습니다.
임원이 대거 현판식에 참여할 정도로 회사와 가까운 복수노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조합원의 과반수를 복수노조에서 빼 갔습니다. 85호 크레인을 지키던 민주노조는 교섭조차 중단되었고, 오는 7월이면 교섭권조차 빼앗기며 158억이라는 손해배상 소송이 민주노조의 목줄을 죄고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는 함정 등 특수선을 제외하고는 일반 상선의 수주가 없다는 이유로 일부 휴업에 들어간 상태지만, 필리핀 수빅조선소는 비어있는 도크가 없어 배를 수주 받지못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한진중공업이 정리해고자를 복직시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수주를 받지 않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려옵니다. 교섭권이 회사와 가까운 노조로 넘어간 후에 수주를 받는다는 소문이 현장을 떠돌고 있습니다. 목숨을 건 투쟁으로 정리해고를 철회시켰지만, 일말의 양심조차 없는 탐욕의 자본은 한진중공업 영도공장에 정리해고라는 죽음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희망버스 시즌2를 위하여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과 현대자동차에서 '집단·흉기 등 주거침입을 통한 폭력행위'를 저질렀는지를 결정하는 항소심 선고공판이 6월 29일 열립니다. 부당한 정리해고를 막아내고 김진숙을 살리겠다며 희망버스를 탄 승객 130여 명이 벌금 폭탄에 맞서 당당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는 6월 11일은 전국에서 달려온 희망버스가 절망의 담벼락을 넘어 기적을 만들어낸 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 한진중공업으로 향하던 희망버스는 자본의 탐욕에 맞서 노동자와 서민의 삶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2012년의 85호 크레인은 23번째 죽음을 막기 위해 온몸으로 싸워 만들어놓은 대한문 분향소입니다. 지난 5월 24일 분향소 영정사진이 경찰의 군홧발에 부서지고 쓰레기차에 실려 갔지만, 연대의 힘은 더 단단한 분향소를 세워냈습니다.
희망버스 1주년을 맞아 16일 오후 1시부터 언론노조 파업의 현장인 여의도에서 대한문까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복직과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행진'이 열립니다. 이어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집회할 권리, 연대할 권리'라는 이름으로 1박 2일 문화난장이 펼쳐집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회에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으로 쓰러져가는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은 바로 연대라는 두 글자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 자본의 탐욕이 연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박점규 기자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 / 금속노조 전 비정규국장 입니다. 이 글은 <레디앙>, <프레시안>, <참세상>에도 송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