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사진에 담긴 것은 누구를 그리고 새긴 것이며, 어디에 쓰는 물건일까?
답은 '거지'이며, 고인을 묘지까지 모시고 가는 상여를 장식하는 데 사용했던 목인(木人)이다. 목인이란 사람이나 동물, 꽃, 새 등의 다양한 모습을 나무로 조각해서 만든 것을 뜻하는데, 특히 상여에 장식하는 목인들은 죽은 사람을 따르는 것이므로 순장(殉葬) 풍속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상여 장식 목인은 주로 인물, 용, 봉황, 새, 호랑이, 꽃, 도깨비 등인데, 이런 상여 장식물을 '꼭두 인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열장 안에 얌전히 놓인 위의 목인에는 '거지'라는 명패가 붙어 있을 뿐 별다른 설명은 없다. '씩~' 웃는 듯한 입매와 가슴 한복판 '어대매로 가자느냐'라는 글이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는 듯해 발걸음이 오래도록 머문다.
장례식장 로비에서 열리는 상여전시회. 한 사람을 영원히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슬픔과 안타까움과 고통, 그러나 더는 괴롭거나 아프지 않고 비로소 완전한 평화를 얻게 되었다는 안도가 작은 위안이 되는 곳에서 망자(亡者)들의 마지막 거처인 상여를 들여다 본다. 한 자리에서 전통적인 '목(木)상여'와 종이 꽃으로 장식한 '꽃상여'를 비교해 볼 수 있다. 물론 이제는 다 사라지고 누구나 장의 버스나 장의용 승용차를 타고 떠난다.
이 세상에서의 지난한 가난과 고생을 떠나는 길에서나마 잠시 면해 보라는 뜻이었을까. 목상여든 꽃상여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거기다가 홀로 가는 길 외롭지 말라는 것이었을까. 상여 장식물들이 인물 형상, 용과 봉황, 호랑이, 꽃, 도깨비 등 다종다양하다. 두 도깨비가 나란히 서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양손에 칼을 들었지만 웃고 있어 귀엽기까지 하다.
죽음을 통해 죽음을 생각하는 자리...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그리고 상여 앞뒤에 부착하는 반달 형태의 판은 '용수판'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용이나 도깨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양한 모습과 표정의 도깨비와 용이 새겨진 용수판이 전시되고 있는데 역시 이번에도 내 눈은 웃는 도깨비에 머문다. 이제 곧 땅에 영원히 묻힐 고인을 모시고 갈 상여를 꾸미면서도 웃음을 그려넣는 그 마음에 저절로 수굿해진다.
이제 상여를 사용하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을 돌아보는 까닭은 상여를 통해서 전통적인 장례 절차를 한 번 곰곰이 새겨보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단계가 지닌 의미, 우리가 취해야 할 마음가짐과 태도를 살펴보는 일은, '최대한 빨리, 최대한 먼 곳으로 보이지 않게 치워버려야 할 그 무엇'이 되어버린 죽음, 주검에 대한 우리들의 행태를 직면하게 만든다.
장의차가 지나가면 그가 누구인지 일면식도 없던 사이지만 가던 길 잠시 멈추고 속으로라도 예를 표하는 일,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는 때가 많다. 길었든 짧았든 이 땅에서의 수고를 위로하고 영원한 안식을 빌어주는 일, 잠깐이라도 같은 시공간에 머물렀던 인연이라면 그 쯤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장례식장 로비 한 가운데 걸린 전광판에 뜨는 고인의 사진과 성명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여기 살아 숨쉬면서 고인을 모시고 가던 상여와 상여 장식물을 구경하고 있지만 저들은 더 이상은 여기 아닌 저곳에 머물게 됐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그러니 장례식장에서 하는 상여전시회는 죽음을 통해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자리임이 분명하다.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을 전시 공간으로 만듦으로써 이색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바로 그 곳에서 삶과 죽음을 다시금 보게 한다는 것이 더 귀한 일인 것 같다.
미처 거기까지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또다른 의미의 산 교육이며 경험이며 깨달음에 이르게 만드는 소중한 일임이 분명하다.
거지 목인 가슴에 새겨진 글귀대로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를 묻고 또 묻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유일하며 가장 중요한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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