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야, 씨×놈, 또라이, 개새끼, 바보야."알아들을 수 없는 인도네시아어로 인터뷰를 이어가던 수기토(29, Sugito)와 시숴로(37, Sisworo)의 입에서 '익숙한' 한국 말이 나왔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뉴질랜드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조업하는 한국 원양어선 '오양 75호'에 탑승한 한국인 선원들은 인도네시아 선원들에게 걸핏하면 욕을 했다고 한다. 두 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은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욕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양맛살', '사조참치' 등으로 유명한 '사조오양' 소속 원양어선에서 수기토가 일하게 된 것은 지난해 1월. 시숴로는 그보다 2개월 전인 2010년 11월부터 '오양 75호'를 탔다. 배에서는 인도네시아 선원 33명, 필리핀 선원 2명, 한국인 선원 10명이 함께 일하고 생활했다.
그런데 지난해 6월 20일 새벽. 수기토와 시숴로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선원 32명은 한국인 선원들이 술에 취한 틈을 타 '오양 75호'를 집단 탈출했다. 한국인 선원들의 폭력과 임금체불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였다. 이 사건은 뉴질랜드 언론에 대서 특필됐고, 뉴질랜드 정부 차원의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달 27일부터 지난 2일까지 뉴질랜드 현지에서 조사를 벌인 한국 정부 합동조사단은 한국인 선원 4명이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지속적으로 '가혹행위' 한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 13일,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에서 수기토와 시숴로를 만났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재단의 후원을 받은 국제민주연대의 초청으로 지난 8일 한국을 찾았다. 한국인 선원들의 폭력행위에 대한 처벌과 사조오양 측에 뉴질랜드 최저임금법에 따른 임금 지급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이번 방문에는 인도네시아 출신 인권활동가들도 함께했다. 이들은 지난 11일 사조오양 본사 앞 항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국가인권위, 정부 합동조사단 관계자 등과 면담을 가졌다(관련 기사 :
"한국인 갑판장은 우리를 짐승처럼 다뤘다").
인터뷰는 기자가 한국어로 질문하면, 한국인 인권활동가가 인도네시아 인권활동가에게 영어로 옮기고, 이를 다시 인도네시아어로 통역하는 과정으로 2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비교적 밝은 표정이던 두 사람은 배 위에서 있었던 폭력을 떠올릴 때면 머리를 쥐어 싸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다음은 수기토, 시숴로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6시간 동안 벌세우고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 '오양 75호'에서 일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 수기토 : "대만 원양어선을 탔다.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도 계속 어부 일을 했다."
시숴로 : "사조오양에서 일하기 전에는 태평양에 있는 또 다른 한국 원양어선을 탔다.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는 농사도 짓고, 일용직으로 건설 일도 했다."
-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나.수기토 : "아내 1명, 아들 1명이 있다(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일부다처제를 인정한다)."
시숴로 : "아내 1명, 아들 1명, 딸 1명이 있다."
- '오양 75호'는 어떻게 타게 됐나. 수기토, 시숴로 : "인력송출업체를 통해서."
- 구체적으로 어떠한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말해달라. 수기토 : "갑판장이 물고기로 머리를 때렸다. 헬멧을 쓰고 있었는데도 아플 정도였다.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전 갑판장은 내가 잘못했다면서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갑판 위에 계속 서 있게 했다. 학교 갔을 때 선생님이 아이들 벌세우는 것처럼. 한 번은 밧줄 잘못 묶었다고 머리를 때리고, 가만히 서 있게 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했다. 너무 추워서 동료들이 커피 마시는 곳에 가려고 했는데 저를 다시 질질 끌고 가서 다시 서 있게 했다. 그렇게 계속 서 있었다."
시숴로 : "이전 갑판장이 있을 때, 배 안에 있는 창고 안에서 금속 깎는 기계 같은 것을 찾아오라고 했는데 못 찾았다. 그랬더니 손으로 머리를 때렸다. 밧줄을 묶고 있는데 내가 잘못한다면서 갑자기 발로 차고 옷이 찢어질 때까지 잡아당긴 적도 있다. 또 다른 선원들을 밧줄로 때리는 것도 봤다."
- '이전 갑판장'이라고 한다면, 갑판장이 중간에 바뀌었나. 수기토 : "갑판장의 폭력이 계속되자 선원들과 의논했다. 어떻게 '보선(Bosun, 갑판장)'을 해고시킬지. 저와 한 친구가 선원 대표로 선장한테 갔다. '우리를 집에 보내든지, 보선을 해고시키든지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선장이 '집에 가고 싶으면 가라'고 하더라.
당시 배가 육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우리는 배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인 선원들과 에이전시(인력업체) 관계자가 이야기하더니, 우리에게 '너희들은 갈 필요가 없다'면서 '대신 보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하더라. 우리는 거부했다. 이후 부갑판장이 갑판장이 됐다. 부갑판장은 '더 이상의 폭력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더 나빴다."
"저녁 먹고 있는데 바지 내리고... 너무 역겨웠다"- 왜 더 나빴나. 수기토 : "이틀 동안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3일째 되던 날이었다. 새로운 보선은 우리를 성추행했다."
-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나. 수기토 : "물고기 다듬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저를 껴안고 그의 성기를 내 엉덩이에 대고 문질렀다. 그때 나는 칼을 쓰고 있어서 위험한 상황이었다. 거부했는데도 계속했다. 그래서 몸을 휙 돌리면서 '지금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보선이 '새끼야' 하면서 저를 치고는 가버렸다. 거의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성추행을 당했다."
시숴로 : "오후 7시에 동료들과 밥을 먹고 있는데 보선이 내 쪽으로 와서 바지를 내리고 자신의 성기를 내 손으로 만지게 했다. 다른 선원들이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는데...너무 역겨웠다. 한 번은 샤워를 하고 있는데 보선이 샤워실로 왔다. 나는 옷을 벗은 채로 옷을 챙겨서 방으로 도망갔다. 보선이 따라왔다. 계속 방문을 열려고 했다. 나는 문을 못 열게 막았다. 이런 일들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선원들에게도 일어났다."
- 그때 심경이 어땠나. 시숴로 : "역겨웠다. 그 당시에는 궁금했다. 어떻게 한국 사람들, 특히 보선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난 그냥 돈 벌러 왔을 뿐인데."
수기토 : "보선이 아프거나, 미쳤거나, 아니면 여자를 하도 못 만나서 저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한테나 성적인 욕망을 분출하니까."
(기자주 : 사조오양 측은 "현재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한국 선원의 선상 폭력, 성희롱 등은 아직까지 어떠한 것도 사실로 밝혀진 바 없으며 계속 조사 중에 있다"면서 "현재 거론되고 있는 한국 선원은 1~2명이 전부인데 이것이 마치 한국 선원 전체가 성희롱 및 폭력을 하고 있다고 확대 해석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 배를 타고 있을 때 임금이 안 들어왔나. 수기토 : "인도네시아에서 뉴질랜드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한 시간 전에 인력업체에서 계약서에 사인하라고 했다. 계약에 따르면, 미화로 한 달에 250불을 받는데 이 중 200불은 가족들에게 송금하고, 50불은 업체가 가져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왔더니 뉴질랜드에 있는 한국 인력업체가 한국어와 영어로 된 계약서에 사인하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그냥 사인했다
그런데 배가 한 달에 한 번 육지에 들어올 때 집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했더니 '통장에 돈이 안 들어왔다'는 거다. 두 달 동안 임금이 안 들어왔다. 그래서 인력업체에 전화했더니 내가 수수료를 내지 않아서 돈을 다 가져갔다고 하더라. 그러고 나서 4월에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고, 5~6월 월급은 배에서 탈출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받았다. 업체에 문의했더니 '사조오양에서 돈을 지급하지 않아서 월급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기자주 : 나현필 국제민주연대 사무차장은 "인도네시아 인력송출업체가 선원들과 개별적으로 작성한 계약서, 사조오양 측이 뉴질랜드 정부에 제출한 계약서, 사조오양 측이 한국 정부에 낸 계약서 모두 내용이 다르다"면서 "사조오양은 인력송출업체에 뉴질랜드 최저임금이 아닌, 인도네시아에서 작성된 계약서대로 임금을 줬다"고 말했다. 이에 사조오양 측은 "뉴질랜드 최저임금법에 따라 임금을 모두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조업을 하고 있는 외국인 선원들에게도 뉴질랜드 최저임금을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1년간 실업자로 지내...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탈출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수기토 : "6월 18일, 배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날 밤 동료가 한국인 엔지니어에게 맞았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다음 날 아침, 경찰이 조사를 왔다. 그날 밤, 한국인 직원들이 소주 파티를 했다. 우리는 의논했다. 성추행과 물리적·언어적 폭력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 선원 33명 가운데 1명만 남고 모두 떠나기로 했다. 도망가는 게 아니라 우리를 도와줄 사람을 찾으려고 했다. 누워서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6월 20일 아침, 배에서 나왔다. 한 직원이 따라 나왔다. 우리는 교회로 도망쳤다. 한 목회자가 우리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이후 이민국과 경찰에서 우리를 찾아왔다."
- 탈출 이후, 지난 1년간 어떻게 지냈나.수기토 : "나와 가족 모두 매우 힘들었다. 직업 없이 집에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일을 찾고 싶어도, 이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숴로 : "일용직을 하면서 살았다."
- 당시 선박에서의 기억으로 인한 후유증은 없었나.수기토 : "있었다. 배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려고 할 때 슬프다. 매우 힘들다."
시숴로 : "다시는 한국 어선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
- 한국에 오니 어떤가. 수기토 : "배에서의 경험과 비교한다면, '모든 한국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구나'. NGO에서 온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언론에도 고맙다."
- 한국인 갑판장과 선원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뭐라고 말하고 싶나.수기토 : "좋은 사람들이 되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고, 우리도 심장을 갖고 있다. 누군가 당신을 존중하기를 바란다면 당신도 존중해라."
시숴로 : "우리 모두 똑같이 돈 벌러 왔던 것 아닌가. 다른 선원들을 존중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