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석수동에 소재한 '삼막사'는 신라 때 처음으로 창건한 고찰이다. 삼막사라는 절 이름에는 통일신라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원효와 의상, 윤필 등 3명의 대사가 관악산에 들어와 장막을 치고 수도하다가, 그 뒤 그곳에 절을 지어 이름을 이와 같이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삼막사에는 삼층석탑과 명부전, 마애불과 남녀성기석, 사적비 등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삼구자 등의 비지정 문화재도 삼막사를 유명하게 만든 것들이다. 그 중 삼막사 선실 뒤편에 서 있는 3층 석탑은, 일반적인 절집의 석탑과는 그 조성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다. 이 탑은 고려 때에 조성이 됐다.
몽골 칩입 때, 적장을 죽인 기념으로 세운 탑
삼막사의 3층 석탑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이 돼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탑들에 비해 꾸밈새가 없으며, 그저 평범한 삼층석탑이다.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탑신의 몸돌에만 모서리에 기둥 모양인 우주를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다. 꼭대기에는 1979년에 보수한 머리 장식이 놓여있다.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지붕돌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탑은 전하는 고려 고종 19년인 1232년 몽고의 침입에 맞선 삼막사 승려 김윤후가, 싸움에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김윤후를 기억해 내다 요즘 드라마 무신으로 한창 이름을 자주 듣게 되는 살리타이(?~1232)는 몽골의 장군이다. 1231년에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 사람에게 피살됐다는 이유로, 고려에 쳐들어왔다가 귀주에서 박서에게 패했지만, 다시 개성 성의문 밖까지 쳐들어왔다. 고려 조정의 제의로 화해를 맺고 철수했다. 그러나 고려가 서울을 강화로 옮기고 싸울 뜻을 보이자, 이듬해 다시 쳐들어와 처인성(지금의 용인)을 공격하다가 승려인 김윤후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고려 때의 승장인 김윤후는 고종 19년인 1232년 몽고군이 처인성을 공격했을 때, 몽고의 장군인 살리타이를 활로 쏘아 죽였다. 이 공으로 상장군에 임명됐으나 사양했다. 뒤에 섭랑장이 됐다.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있을 때 몽고가 다시 침입해 성이 포위당한 지 70여 일이 지나 식량이 떨어져 위태롭게 됐다.
김윤후는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독려하는 한편, "만일 힘을 다하면 귀천 없이 모두 관직을 제수할 것"이라고 독려했다. 관아에서 보관하고 있던 관노의 명부를 불사른 김윤후는 노획한 소와 말을 이들에게 나눠줬다. 관노와 백성들은 그런 김윤후를 믿고 따랐으며,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워 적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감문위상장군이 되었고, 김윤후는 약속대로 공을 세운 관노와 백성들에게 관직을 줬다.
원혼을 위로하려 했을 듯전각의 뒤 바위 암벽에 올려놓은 삼층석탑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가는 모르겠다. 3층석탑은 바위위에 낮은 두단의 기단을 놓았다. 기단부는 장대석 4매로 하층기단의 하대를 만들고, 하층기단의 면석 역시 4매의 장대석으로 꾸몄다.
갑석은 2매의 돌로 조성을 했으며, 상층기단의 면석도 4매로 조성했다. 몸돌과 지붕돌인 옥개석은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을 했으며, 전체적으로 둔중한 것이 고려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높이 2.55m의 크지 않은 이 탑은 탑을 세운 내력이 다르다는 것이 눈여겨 보게 만든다.
아름답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적장을 죽인 기념으로 세운 삼막사 삼층석탑. 아마도 이런 탑을 세울 수 있기까지에는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 탑을 세운 목적도 알고 보면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것은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경기리포트와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