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의 경우 제일 중요한 것은 공정한 보도다. 방송사는 정치적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치권이 끼어들면 편파방송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방송파업은 정치파업, 불법파업 성격이 강하다. 다른 기업의 파업도 노사 자율로 해결하는 게 원칙이듯 방송사도 마찬가지다."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방송파업에 대해 취해온 입장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정치권 불개입' '자율 해결'을 주장해 왔고, 방송파업이 '정치·불법 파업'이라고 규정해왔다. 최근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통합당은 선거 때 편파방송을 할 세력을 규합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비판하면서 아예 방송 파업을 하는 이들을 '편파방송 세력'으로 규정했다.
그의 눈에는 김재철 사장 체제에서 모두 8명이 해직당하고, 정직 등 중징계를 당한 직원 숫자만 100명이 넘는다는 이 참담한 현실이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더욱이 그러한 사태의 출발이 '특보 출신 사장' 또는 정권 친위세력이 경영진으로 등장하면서 권력을 감시·비판하는 프로그램들이 사라지고 자율성이 무너지는 등 방송의 독립과 공정성이 심대하게 훼손된 것이었는데, 이런 본질에 대해 그는 무지하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듯하다.
그랬기에 그가 방송파업 참가자들을 이렇게 '편파 정치세력'이라고 부르자 MBC 아나운서 국장을 지낸 성경환 교통방송(tbs) 본부장이 22일 그의 트위터에서 야유했다.
성경환 본부장은 "이한구 의원의 공영방송 MBC에 대한 인식의 천박함이란...ㅉㅉㅉ"이라고 힐난한 뒤 "아직도 '기업의 노사문제'라네... 그럼 왜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법'을 국회에서 입법하고, 방문진이사 구성을 방통위에서 하고, 방통위 구성을 정치권에서 하나? 보좌관들이 좀 가르쳐 주삼!"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국회는 방통위와 방문진을 낳고, 방통위는 방문진 이사들을 낳고, 방문진 이사들은 MBC 김재철 사장을 낳고, 김 사장은 정치적 불공정보도를 낳고, 정치적 불공정보도는 국민의 왜곡된 판단을 낳고, 이것이 곧 파업을 낳았으니 이 책임은 정치가 짐이 마땅하도다"라고 했다.
사회·정치적으로 민감한 정치들에 대해 거의 항상 침묵하다가 가끔 외마디처럼 한마디씩 던지는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이 이번에도 방송파업 사태가 한창 고비를 넘은 뒤에야 한마디 던졌다. 그가 한 마디 던진 때는 여러 달 동안 들끓었던 파업연대 속에서 KBS와 국민일보, 연합뉴스의 파업이 매듭지어진 뒤 나왔다. 그리고 MBC 방송이 홀로 145일째 파업 중인 가운데 게다가 김재철 사장이 (신경민 민주통합당 의원의 표현을 빌리면) 잇따라 해직·정직 등의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4년 전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그 내용은 이한구 원내대표의 그동안 발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파업이 징계 사태까지 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는 언급은 그냥 정치적 립서비스이었을 뿐, 그의 말이 던지는 메시지는 "노·사간 빨리 타협하고 대화해서 정상화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정치적으로 개입할 문제가 아니니, 자율적으로 알아서 처리하라는 그런 이야기다. 이한구 원내대표의 그동안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방송파업의 근원이 '특보 출신 사장' 또는 정권 친위세력에 의해 무너진 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이고, 그래서 이 파업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고 구조인데, 이런 요인과 측면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걸 '기업 내부의 문제'로 국한시키면서 '정치적 불개입'과 '자율 해결'을 주장하는 셈이다.
더군다나 새누리당의 뿌리인 한나라당과 그 정권 그리고 그들과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조·중·동으로부터 아주 적극적이고 지독한 '정치적 개입'과 '타율에 의한 해결'을 직접 경험한 나로서는 '정치권 불개입'이니, '자율 해결'이니 하는 주장들이 매우 공허하게 들리며, 심지어 지독한 이중성과 위선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도무지 그런 주장을 할 자격도 없는 무리들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번 보자. 새누리당의 뿌리인 한나라당과 그 정권 그리고 조·중·동 등 수구보수 세력이 4년 전 얼마나 적극적으로 방송에 개입했으며 타율을 강제했는지.
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직후인 2008년 3월 13일. 지금 새누리당 최고위원인 심재철 당시 한나라당 원내 수석부대표는 이날 오전에 열린 주요당직자 회의에서 "정연주 사장이 사퇴 0순위... 정연주 사장으로 인해서 KBS가 국민의 방송이 아니라 정권의 방송으로 전락... 국민의 자산인 전파를 좌파이념의 선전도구로 전락시켰던 사퇴 0순위의 정연주씨는 임기제를 구실로 방송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고 마땅히 자신의 거취를 정리해야 옳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보다 이틀 전인 3월 11일,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주요 당직자 회의에서 "지난 10년간 국정을 파탄시킨 세력들이 야당과 정부 조직, 권력기관, 방송사, 문화계, 학계, 시민단체 등 각계의 요직에 남아 새 정부의 출범의 발목을 잡고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 하루 빨리 사퇴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 배인준 논설주간은 '노무현 식객들의 농성'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정연주)는 언필칭 '국민의 방송'이라는 KBS를 좌파권력의 나팔수로 전락시켰다… '정연주식 버티기'가 국민 사이에 통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나라당과 <동아일보>의 이런 주장이 나간 다음날, KBS의 수구적 옛 노조는 '정연주가 죽어야 KBS가 산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나의 퇴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KBS 옛 노조는 이번 방송 파업 사태 때, 거의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수구적 노조행태에 분노하여 새로 독립한 KBS 새노조가 이번 파업을 주도했다).
불과 2주일 동안 벌어진 엄청난 '정치적 개입들'KBS 옛 노조의 성명이 나온 그날,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산하기관장들 중 분명한 철학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성향이 다른 새 정권에서도 계속 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것이다. 참여정부에서 임명된 기관장들은 이제 그만 물러나라"고 했다. 다음날인 3월 13일 <조선일보>는 '밥자리에 매달리는 좌파 문화 기관장들의 얼굴'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선선히 자리에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얼마 뒤인 3월 21일, 강아무개 부산 동의대 총장은 KBS 이사인 신태섭 교수를 총장실에 불러 "신 교수가 KBS 이사를 계속하면 학교가 어렵다"며 "언론, (KBS) 노조, 정치권, 교육부에서 신 교수를 징계하라는 압박이 심하다. 학교에 불이익이 오지 않도록, 그리고 신 교수에게 불행한 사태가 오지 않도록 하려면 당신이 KBS 이사를 사퇴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KBS 이사 사퇴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흘 뒤인 3월 25일 최시중씨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고, 그는 취임하자 바로 김금수 KBS 이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이틀 뒤 함께한 점심식사 자리에서 그는 '정연주 사장 퇴진에 KBS 이사회가 역할을 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불과 2주일 동안 벌어진 일이다. 그 뒤 베이징올림픽이 막을 올린 그해 8월 11일까지 정권 차원에서 청와대, 검찰, 감사원, 국세청, 교육부, 방통위, KBS 이사회 모든 권력기관들을 총동원하였을 뿐 아니라 조·중·동과 뉴라이트 등 수구보수단체, KBS의 수구적 옛 노조 등 우리사회 수구보수 세력이 일제히 총궐기하여 공영방송 KBS를 점령하기 위해 어떤 '정치적 개입'과 '타율'을 작동시켰는지는 이제 널리 알려진 일이다.
4년 전에는 그렇게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타율적인 퇴진을 주장했던 세력들이 지금은 '정치 불개입' '자율 해결' 또는 무시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조·중·동은 철저하게 무시로 일관하고 있으며(주요 사건을 보도하지 않는 이런 행태는 또다른 언론왜곡이다), 한나라당-새누리당 세력은 이한구 원내대표와 박근혜 의원의 발언에서 보는 것처럼 4년 전의 잣대로 보면 매우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다.
그런 주장을 할 자격도 없는 이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타산에 따라 '정치적 독립성'이니 '자율 해결'이니 하면서 신성한 언어를 농단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더 힘을 얻은 때문일까, 25일로 파업 148일째를 맞는 MBC에는 '연쇄살인'의 살벌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MBC 사태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전 국민적 쟁점으로 폭파하는 임계점으로 다가서고 있다. 새누리당과 김재철 체제가 기름을 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