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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성 앞으로 흐르는 퉁구하 강물. 치희도 유리왕도 이 강을 건넜을 것이다. 그러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고, 유리왕만 혼자서 물을 건너 성 안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므로 <황조가>는 <공무도하가>와 다르다.
 환도성 앞으로 흐르는 퉁구하 강물. 치희도 유리왕도 이 강을 건넜을 것이다. 그러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고, 유리왕만 혼자서 물을 건너 성 안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므로 <황조가>는 <공무도하가>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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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은 왕비 송씨(松氏)가 죽은 후 화희(禾姬)와 치희(雉姬) 두 여인을 계실(繼室)로 맞았다. 두 여인은 늘 다투었다. 그러던 중인 어느날(기원전 17년), 유리왕이 사냥을 간 틈에 화희에게 모욕을 당한 치희가 친정으로 가 버렸다. 그녀의 친정은 한(漢)나라였다.

사냥에서 돌아온 왕은 즉시 말을 달려 치희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민 그녀는 함께 궁으로 가자는 왕의 제안을 거부했다. 홀로 처량하게 돌아오던 왕은 나무 아래에 잠깐 머물러 지친 마음과 몸을 달래었다. 그때 꾀꼬리 두 마리가 짝을 지어 왕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그 광경을 보고 왕이 넋두리를 하였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 翩翩黃鳥 (편편황조)
암수 서로 노니는데 - 雌雄相依 (자웅상의)
외로워라 이 내 몸은 - 念我之獨 (염아지독)
뉘와 함께 돌아갈꼬 - 誰其與歸 (수기여귀)

치희는 중국 여인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화희에게 당한 모욕은 개인적인 내용이 아니라 집단적, 종족적 차원이었을 듯하다. 토착 집단을 대표하는 화희쪽 세력이 외래 집단의 상징인 치희를 몰아낸 형국이었다는 말이다.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산성인 환도성 성지 중심부에서 바라본 통구하 방면. 환도성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형국이므로 성 밖으로 나가려면 이 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유리왕과 이별하기로 작정한 치희도 틀림없이 이 길을 거쳐 성 밖으로 내달렸을 것이고, 그녀를 찾으러 따라간 유리왕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산성인 환도성 성지 중심부에서 바라본 통구하 방면. 환도성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형국이므로 성 밖으로 나가려면 이 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유리왕과 이별하기로 작정한 치희도 틀림없이 이 길을 거쳐 성 밖으로 내달렸을 것이고, 그녀를 찾으러 따라간 유리왕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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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이 치희와 이별하는 장면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외래세력인 허황옥과 결혼하는 것에 견주면 정반대의 정치상황을 보여준다. 수로왕은 "신들의 집에 있는 딸들 중에서 가장 예쁜 처녀를 골라 대왕의 짝이 되도록 하겠습니다"하고 결혼을 권하는 신하들 - 즉 토착집단의 요구를 물리친다. 그는 단호하게 큰소리를 친다.

"내가 여기 온 것은 하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다."

그 후 허황옥이 오자 그는 또 "나는 출생할 때부터 신성하였기 때문에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수로왕에 견줄 때, 유리왕에게는 치희를 다시 데려 올 힘이 없었다. 그는 일국의 왕이었지만 치희의 불만을 해소해 줄 능력이 없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사랑도 상대의 바람을 이루어줄 수 있을 때 가능한 법이거늘, 유리왕은 그것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수로부인과 절벽의 꽃을 바라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는 견우노인 사이의 교감을 다룬 <헌화가>를 보면 안다. 그 노래가 긴 세월 동안 잊히지 않고 줄기차게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의 그러한 심리를 절묘하게 노래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 현실에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도 많다.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셀 수 없이 많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을 읊조린 가장 오래된 노래 <황조가>가 반만년 역사를 두고 민족의 사랑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안내원에 따르면 유리왕의 무덤이 복원될 자리라는 곳에 공사를 앞두고 터가 닦여 있다. 그러나 2009년 8월에 본 광경이므로 지금은 공사가 더 진척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안내원에 따르면 유리왕의 무덤이 복원될 자리라는 곳에 공사를 앞두고 터가 닦여 있다. 그러나 2009년 8월에 본 광경이므로 지금은 공사가 더 진척되었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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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이 살았던 환도성은 강물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고, 평지에서 강을 넘으면 돌로 쌓은 성곽이 앞을 막아 주는데다, 나머지 삼면은 웅장한 산세가 천연의 포곡(包谷)산성을 제공해주는 천혜의 요새였다. 그러나 통구하(通溝河)를 넘어 들어간 환도성에서 나는 유적을 둘러보는 일보다, 대학원에 재학 중이라는 조선족 안내원의 "저기가 유리왕의 무덤을 복원하는 자리입니다"라는 말에 온통 귀가 쏠렸다.

안내원이 가리키는 자리는 국내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속에 자리 잡은 환도성 유적 중에서도 가장 한복판 일대였다. 나는 마치 유리왕이 거기 우뚝 선 채 멀리서 찾아온 우리를 뜨겁게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 주몽이 남겨준 부러진 칼을 들고 통구하 주변을 헤매었을 어린 유리, 나이가 들어서는 떠나버린 치희를 찾아 다시 이곳을 말 달렸을 유리왕, 지금은 영토를 모두 잃고 남의 나라 땅에 쓸쓸히 묻혀지내는 그가 눈에 밟히듯 아련히 떠올랐다. 그는 지금도 <황조가>를 읊조리는 처지에 놓여 있구나.

무너진 지 오래,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환도성 성곽
 무너진 지 오래,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환도성 성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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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가. 나는 그날 그곳에서 문득 유리왕을 위한 덕담이 하고 싶었다. <황조가>에 따라다니는 '한역되어 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라는 영예는 일부분 잘못이라고 말이다. 유리왕 당신의 실연은 비록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당신의 삶은 21세기의 현대인들에 비해 훨씬 인간다운 풍모를 지녔다고, 그렇게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유리왕은 결코 시를 짓지 않았다. 우리나라 농민들이 논밭 일을 하면서 흥얼흥얼 노동요를 불러왔듯이, 유리왕 역시 잃어버린 사랑을 노랫가락으로 토로했을 뿐이다. 얼마나 멋진가. <빈 집>의 시인 기형도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썼지만, 유리왕은 사랑을 잃고 노래를 불렀다.

일상의 희로애락을 자작 즉흥 노래 대신 문자로 기록하면서 사람들은 메말라갔고, 이제는 점점 시로 쓰는 일조차도 사라져가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랑을 잃고 노래를 부르는 유리왕의 삶이 어찌 부럽지 아니한가.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

<황조가>보다 630년가량 뒤의 작품인 <여수장우중문시>는 노래가 아니다. <황조가>는 유리왕이 부른 '노래'를 뒷날 누군가가 한문으로 번역하여 역사에 남겼지만, 을지문덕은 처음부터 한시를 창작했다. 그러므로 을지문덕이 남긴 이 시는 현재 우리나라에 전하는 가장 오래된 '창작 한시' 작품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황조가>는 현재 우리나라에 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역 서정시'이다.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깨우쳤네
싸움에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이르노라

을지문덕의 시는 유리왕의 노래에 비해 훨씬 감동이 못하다. 물론 내용 탓이기도 한 결과이지만, 나는 그보다도 본질적으로 두 작품의 성격이 다른 데에 그 근본적 까닭이 있다고 믿는다. 유리왕의 <황조가>는 '즉흥 자작 노래'로 본인의 감성을 100% 가감없이 표현한 것이지만,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는 쓰고 고치고 다듬어 완성해낸 인위적 '시'다.
나는 을지문덕'식'보다 유리왕'식'이 훨씬 인간적이라고 믿는다.

덧붙이는 글 | TNT뉴스에 7월중 송고할 예정입니다.



태그:#황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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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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