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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森浦)로 가는 길 대신 '삼포세대'만 남았다.

2012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취업준비생인 친구들은 대부분은 반(半)자발적 '싱글'이다. '아직 직장도 없는데...'란 생각이 연애를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한 선배는 결혼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고 했다. 당장은 주택 마련을 위해 대출을 받더라도, 여자친구가 직장이 없어 앞으로 혼자 빚을 갚아나갈 생각을 하면 앞이 캄캄하단다. 아이는 상상조차 어렵다. 주변을 한 바퀴만 돌아봐도 연애, 결혼, 출산 이 세가지를 포기한 '삼포'투성이다. 여기에 '세대(Generation)'라는 말이 붙는 게 자연스러워 보일 뿐이다.

삼포세대의 원조는 '88만 원 세대'였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인턴 채용이 급증하면서 청년들에게 '괜찮은 정규직 일자리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아져버렸다. 학자금 대출 빚에 시달리고 생활고에 허덕이며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88만 원 세대'였다. 그런데 이 표현의 진짜 원조는 안토니오 인코르바이아와 알레산드로 리마싸라는 이탈리아의 두 젊은이다.

대한민국 88만 원 세대와 유럽의 천유로 세대는 도플갱어?

 비정규직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유럽 청년들의 삶을 그린 이탈리아 소설 <천유로 세대>
비정규직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유럽 청년들의 삶을 그린 이탈리아 소설 <천유로 세대> ⓒ 예담출판사
안토니오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알레산드로는 경제학을 공부한 후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죽어라 일해봤자 두 사람의 월 수입은 많아야 1000유로(약 147만원)일 때가 많다. 2006년 둘이 함께 쓴 소설  <천유로 세대>가 그저 로셀라, 클라우디오, 알레시오, 마테오라는 허구의 인물들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다.

게다가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을 못해 '아르바이트 하이에나'가 된 로셀라, 능력 있는 '계약직'으로 늘 해고 불안에 시달리는 클라우디오, 기자를 꿈꿨지만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우체국 직원이 된 알레시오, 부모님이 준 풍족한 용돈으로 놀고 또 놀기만 하는 만년 대학생 마테오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의 20대와 겹친다.

특히 로셀라가 논문대필, 보모, 옷 가게 점원 등 갖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벌은 돈이 고작 700유로(약 100만원)라며 친구에게 대성통곡하는 내용에선, 순간 멍해졌다. 지난 여름 한 달 내내 밤낮 없이 일한 끝에 받은 인턴 월급이 40만 원임을 확인했던 때처럼 .

"클라, 하루 종일 생각해 봤는데... 이번 달에 내가 얼마나 벌었는지 계산해 보기 시작했어. 근데 봐. 딱 700유로 나오는 거 있지. 이게 뭐야...(책 153쪽)"

"솔직히 요즘은 애 보는 일이 부업이 아니라 내 주업이 되는 것 같아 겁이 나. 아직 스물 여섯 살인데, 컴퓨터공학 졸업장까지 가지고 직업으로 베이비시터를 하기엔 좀 이른 것 같잖아(책 155쪽)"

6년이 지난 지금 로셀라는 어떤 모습일까? 신문 국제면이 '유로존 위기'로 가득한 최근 상황을 미루어 짐작컨대, 그녀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대성통곡하고 있을 것만 같다. 며칠 전 읽은 기사에 한 그리스 청년은 "이제 월급 1000유로는 꿈 같은 돈"이라고 했다. 겨우겨우 벌 수는 있었던 1000유로마저 꿈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앞으로 어떤 이름을 붙여줘야 하는가. 아니, 그들의 진짜 이름을 빼앗아가는 이는 누구인가.

앞서 말했듯 유럽 청년들과 대한민국 청년들의 모습은 닮아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후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미국의 20대와도 비슷하다. '불안한 청춘', 아니 '불안사회'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자 국제사회는 정치권, 학계, 언론할 것 없이 모두 지금의 난상을 해석하고 설명하기 급급하다. 누구나 한 번쯤 '신자유주의'니 '자본주의' '금융위기' 등등을 들어봤을 법한 상황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어려운 말만 남고 희망은 없다

하지만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조차 최근 인터뷰에서 "이제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지겹다"고 밝혔다. 연일 매스컴을 보고 듣는 내 귓가에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금융위기'란 단어들이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다.

 지난해 9월 29일 반값등록금국민본부와 한국대학생연합이 '9.29 거리수업의 날'로 정한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반값등록금 국민대회'에 앞서 열린 '거리강좌'에서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우석훈 2.1 연구소 소장이 '88만원 세대의 저자가 반값촛불 대학생을 만나다'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지난해 9월 29일 반값등록금국민본부와 한국대학생연합이 '9.29 거리수업의 날'로 정한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반값등록금 국민대회'에 앞서 열린 '거리강좌'에서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우석훈 2.1 연구소 소장이 '88만원 세대의 저자가 반값촛불 대학생을 만나다'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 유성호

일자리가 없고, 돈 때문에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당장 빵이 없어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럽의 경제위기가 유로존 내부의 불균형에서 왔고,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가...'라는 이야기들은 그저 소음에 불과하다. OO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거나 OO이념이 곧 만병통치약이라는 수많은 약장수들의 외침 또한 마찬가지다. 너도나도 복지를 외치는 한국 정치인들의 모습 역시 다를 바 없다.

말과 말들 속에 책임은 미뤄지고, 희망은 멀어져 간다.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고, 연대보다 경쟁이 먼저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그저 제 힘에 의지해 발버둥칠 수밖에 없다. 월 700유로 수입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작 밤을 새워 이력서를 고치던 로셀라처럼. 그렇게 1000유로 세대는 500유로 세대로, 88만원 세대는 삼포세대로 추락하고 있다.

"한 달에 700유로라. 대중이나 선도하며 그 가식적인 슬로건으로 입이나 닦는 정치인들이 과연 이 삶을 어떻게 알까?. '젊은이들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 몇 마디 하고 한 달에 2만 유로는 벌면서, 로셀라 같은 애들은 주머니에 남은 동전 몇 개로 시들어가든 말든 나이 90이 되어도 국회 의석을 지키고 있는 뻔뻔한 인간들(책 162쪽 클라우디오의 말)."

덧붙이는 글 | <천유로 세대>(원제 Generazione 1000 Euro ) 안토니오 인코르바이아, 알레산드로 리마싸 씀, 김효진 옮김, 예담, 9800원



천 유로 세대

안토니오 인코르바이아.알레산드로 리마싸 지음, 김효진 옮김, 예담(2006)


#유럽위기#88만원#삼포#신자유주의#크루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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