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의 역사는 내 만학(晩學)의 시기와 신비로울 만큼 겹친다. KTX 개통일인 2004년 4월 1일은 내가 마침 마흔이 넘은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해 부산에서 천안으로 거주지를 옮긴 날이다. 그러기에 KTX의 개통은 운명인양 각별하게 느껴졌다. 또한, 나는 휠체어장애인이 이용하기 편리한 KTX의 애용자가 됐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로부터 내가 나사렛대학교 재활복지대학원을 무사히 졸업하고 천안을 떠날 때까지 3년간 천안아산역은 내게 정든 역이 됐다. 재활복지 관련 학술대회 참석이나 고향의 가족을 만나러 경부선을 오르내릴 때 언제나 내 여행의 시작과 끝은 천안아산역이었다. 특히 국내 어느 역보다 친절했던 역무원들을 잊지 못한다. 휠체어를 타는 나를 위해 리프트 기계를 끌어다 올려주는 노고는 물론이요 역 안에서의 서비스 부문에서도 마치 한 가족처럼 느껴질 만큼 늘 친절했다.
천안아산역에서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모두 맛봤다. 아지랑이마냥 봄의 따스한 햇살이 스며드는 투명 유리 천정, 다른 역에선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승강장이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이국적인 서정을 느끼게 만들었던 한 겨울 나목(裸木)처럼 적막한 풍경, 황토색 뜨거운 햇볕이 이글거렸던 한여름 역 주변의 개발지역, 가을이 되면 늘 내 가슴을 휑하게 만들었던 쓸쓸한 여정의 그리운 은빛 시간들!
언젠가 한 겨울 역 건물 전체가 백설로 덮이고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 폭설로 인해 오랜 시간 연착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역무원이 역무실로 초대해 난로 옆엣 담화를 나누며 마신 커피 맛을 잊지 못한다. 물론 어디를 가나 내 단골 선물은 당연하게도 천안아산역 구내에 판매하는 천안 호두과자였다.
물론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다. 언젠가 오랜만에 모교를 찾아 간 날이 KTX 개통 5주년의 날이었는데, 바로 전날 천안아산역에서 역무원이 사고를 당한 사건을 듣게 됐다. 이미 정이 들었는지 내 가족이 사고를 당한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함께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천안에서의 학업을 끝내고 대구대학교로 내려와 있는 지금에 와서 내 여행의 시작과 끝은 동대구역이다. 동대구역 곳곳이 내겐 한없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아니 서울역·부산역·동대구역·천안아산역·광명역·대전역 등 내가 자주 다니는 모든 KTX역은 그냥 열차에 올라타기 위해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 아니라 여유로운 휴식의 소중한 공간이 된다. 열차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KTX역마다 어쩌면 열차여행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역 구내에서 머물게 되는 까닭도 그러하다.
지난 8년을 함께한 벗
그뿐인가. 서울역과 부산역 광장은 시국 관련 집회 장소로 내게 친근한 곳이기도 하다. 때로 업무로 서울역에 내려 그날 마침 서울역 광장에서 펼쳐지는 집회를 우연히 보게 돼 잠시나마 그 현장에 동참하게 됐을 때의 흥분과 전율 그 행복함을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부산역 광장은 한진중공업 85크레인 농성 '희망버스'에 함께 하려 몇 차례 내려오면서 그 전까지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됐다.
길어야 두세 시간, 짧으면 한 시간 남짓한 여행 시간이지만, 나는 언제나 열차가 떠날 때 역 구내를 창 밖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그럴 때마다 뒤로 물러나는 역 구내의 풍경들과 곳곳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늘 나로 하여금 애달픔을 느끼게 한다. 그 무슨 이별이 이런 애틋함을 줄 것인가.
뿐만 아니라 초창기에는 휠체어 특별석인 특실의 경우 승객이 많지 않아 늘 고독한 여행의 시간이었는데, 그것이 더욱 내겐 매력적인 시간이었다. 혼자서 창 밖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사념에 잠기거나 독서삼매경에 빠져들거나 때로는 승무원들과 정담을 나누거나 시간에 쫓겨 과제물에 몰두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언제였던가. 심야 열차 속에서 애틋한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를 길게 써내려가며 가슴으로 울었던 추억도 문뜩 뇌리를 스쳐간다.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께서 <첫마음>이란 작품에서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 때가 언제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고 표현했던가. 그렇게 내게 열차여행은 늘 새롭기만 하다. KTX역에 도착하고 차표를 끊고 열차에 올라타고 천천히 열차가 움직일 때마다 왠지 모르게 늘 가슴이 설레인다.
무엇이든 첫사랑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고 했던가. KTX야말로 내 인생에 있어 첫 열차 경험, 열차 사랑이었다. 타고 내리는 것이 힘들어 열차 여행은 엄두도 못 내고 먼 길은 늘 승용차나 비행기로만 오갔는데, KTX는 마음 편하게 열차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든 첫 열차였다.
내 활동 영역에 열차가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그러기에 KTX와의 갖가지 추억이 가슴에 오래 남고 각별하게 와 닿는지도 모른다. KTX가 개통된 후 이제 대도시를 오가는 내 여행의 대부분은 KTX에 의존한다. 열차 타는 것을 주저하던 내게 있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지난 8년간 KTX가 내게 그만큼 친근하게 느껴지게 됐다는 것이리라. 그동안 나는 만학도의 길을 무사히 마쳤고, 내 인생의 새로운 비전을 보다 확실히 바라보게 됐다. 지난 8년간 나는 KTX와 함께 얼마만큼의 여행을 한 것일까.
20세기 터키의 위대한 시인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는 그의 대표시 <진정한 여행>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희망을 노래한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그렇게 KTX에 몸을 실을 때마다 나는 단순히 열차를 타는 것만이 아니라 늘 새로운 여행을 꿈꾼다. 아직은 씌어지지 않는 나의 시를, 아직은 불려 지지 않은 나의 노래를, 아직은 살지 않았을 나의 날들을, 아직 항해하지 않은 나의 바다를, 아직 추어지지 않은 나의 춤을 기대한다. 거기 KTX는 내 여행의 소중한 길 벗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