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부터 4·3역사문화아카데미를 수강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홀로코스트나 킬링필드와 같이 많은 양민이 죽어 갔던 비극이 있었다는 것, 그 현장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제주도민으로서 이러한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매주 토요일 나의 부모, 조부모 연배 되시는 분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기자 말> 6월 23일 서늘한 여름 50여 명의 사람이 제주시 화북1동 곤을마을 초입에 모였다. 제주 4·3평화재단에서 운영하는 4·3역사문화아카데미(이하 4·3아카데미)의 현장답사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2011년 시작한 이 아카데미는 올해 2기째를 맞이하고 있으며 이날은 4·3연출가 겸 가수인 최상돈씨가 강사로 나서 '노래와 함께하는 제주시 4·3유적지 답사'를 진행했다.
곤을마을 입구에 서서, 많은 이들을 이끄는 음악순례는 처음이라며 어색해하던 최씨는 "버스를 타고 유적지를 듬성듬성 점찍듯 눈으로만 훑어보며 지나가는 오래된 방식을 벗어나 현장을 직접 걸으며 그곳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하겠다"고 운을 띄웠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지만, 현재 있는 길을 따라서 최대한 과거로 접근했다가 공부하고 돌아와서 후손들에게 어떠한 이야기를 전해줄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날이 될 것"이라며 64년 전 당시 제주읍 화북리 사람들이 제주시 성안(城内)을 다니던 길을 따라서 세월을 건너보자고 제안했다
최씨는 이번 답사에서 4·3사건에 관련된 전문지식은 4·3아카데미 자료집과 인터넷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논외로 하고, 별도봉과 그 오름 기슭을 감싸 도는 화북천, 그 내천 끝에 자리 잡은 곤을동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노래들을 들려주기로 했다. 아래의 지도를 보며 동선을 그려보기 바란다.
마을 길을 들어서니 정면으로 건너편에 울담만 남은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이 쓸쓸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 마을은 약 70호로 이루어졌었지만 1949년 4월 1일 군인들에 의해 초토화되면서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이다(4·3아카데미 자료집). 1년 전 님이 떠난 내 마음이 이러하였을까? 감히 그 시간을 살았던 곤을동 마을 사람들의 아픔과 상실감을 가늠해보려 풀만 무성히 자라 있는 마을 터를 멍하니 바라보다 대오에서 뒤처져버렸다.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세월길을 가로질러 시간을 달리는 사람들 '배고픈 다리'라 불리는 원두교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씨는 수강생들을 이끌고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무선마이크를 통해 담담한 음성으로 그 다리에서 보이는 수십 년 전 화북천의 모습을 그려주었다. 2006년 화북천 확장공사를 계기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유해 3구가 발견되었고, 이것이 단초가 되어 화북 일대, 다랑쉬오름, 정뜨르 비행장 등 다른 지역의 4·3희생자 유해 발굴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60년 전에는 화북천을 따라 오현고등학교 뒤편으로 오갔던 길을 '세월길'이라 불렀다. 수강생들은 이 세월길을 가로질러 그 시대에 와 있었다. 군용도로였던 별도봉 장수산책로를 얼마간 올랐을까. 왼편으로 빨간 노끈이 묶여 있는 나무를 기점으로 나뭇가지들을 헤치며 가파른 기슭을 내려가니 일본군 진지동굴이 있었다. 4·3사건 당시 진지동굴은 주민 사형장으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동굴 앞에서 최씨는 수강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있지만 60년대의 사진들을 보면, 별도봉은 민둥산이었고 7개 정도의 진지동굴이 뻥뻥 뚫려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었습니다. 별도봉을 의인화하자면 자신 가슴속에 굴들이 뚫리는 역사도 있지만, '그 뚫린 역사 속에 제주도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별도봉 비가>라는 슬픈 노래를 짓게 됐습니다."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 장수산책로 가장자리에 둘러앉아서 첫 번째 음악 시간을 가졌다. <화북천의 기억>에 이어 <별도봉 비가>까지 꺼끌꺼끌하고 바랜듯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다들 가슴이 먹먹해지고 모가지가 무거워져 버렸는지 내내 고개를 발치에 떨군 채로 앉아 있었다.
다 흘려보냈다 저 바다로꿈속 기억마저 흘려보냈다.누구를 탓하랴 세월을 탓하랴 옛 이야기 궁금해도 생각이 나야 말이지그래 너희라도 그 이야기 내게 들려주렴물로 뱅배애애앵 돌아진 섬에 눈밭에 꿩사냥 가던 얘기세월을 지나서 놀러갔었지세월 저편 어딘가에 사름이 죽어 있었지이젠 너희들이 그 이야기 잘 좀 전해주렴물로 뱅배애애앵 돌아진 섬에 눈밭에 꿩사냥 가던 얘기호-- 호-- 호- 호-- 하며 눈밭에 한라산 살던 얘기- 최상돈, <화북천의 기억 (세월을 건너다)>끝이 없는 연휴를 보내고 있는,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영혼침묵의 세월을 강요당해 살다가 물어봐도 물어봐도 모른다 모른다 하던 4·3 당시를 살아남은 분들이 이제는 앞다투어 내가 증언할 수 있다고 하지만, 침묵하던 그때만 해도 "그래 너네가 알고 있으면 나한테 고라 봐라(나에게 말해 봐라)" 그리고 "그래 알고 있구나, 그러면 내가 더 말해줄게, 이제는 너네가 잘 전해라, 내가 말해줄 테니…"라 했었다.
노래 <화북천의 기억>은 '4·3을 알리려 했던 분들과 4·3에서 실제 살아남은 분들의 이러한 만남, 그리고 당시 오갔던 증언들이 2006년 화북천 인근에서 유해로 발견된 그분들의 말씀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4·3아카데미 수강생들은 노래가 끝나자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털어내고, 다시 별도봉 정상으로 또박또박 걸어 올라갔다. 앞으로 가까워져 오다 사라지는 사람들을 교차하여 40년대 말의 정점에 가까워졌다.
뒤에는 한라산, 앞에는 제주바다가 자리하고 있는 그곳에서 두 번째 음악 시간이 시작되었다. 최씨는 "제주 4·3연구소 소장으로 있었던 고창훈 교수가 쓴 책 내용 중에 노랫말이 쓰여 있었는데, 너무 좋아서 1992년도에 <한라산이여> 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만들었다"며 통기타를 가슴께에 그러안고 기타 줄을 힘차게 밀어냈다. 마치 그 음성처럼 마음마저도 까끌까끌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염려됐는지 그의 마음을 보듬어 주려는 듯, 수강생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연신 박수를 쳐주셨다.
"통일운동의 역사라는 그런 표현보다도 당연히 우리는 하나의 나라, 하나의 민족이 갈라지려 하고 서구 열강들의 권력에 대항하려 했던 몸부림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제주도의 4·3은 3·1운동 이상의 의로운 역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저 슬프기만 한 역사는 아니지 않겠느냐"며 최씨는 강단진 목소리로 박수에 회답하였다.
4·3 당시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영혼은 오늘까지도 끝이 없는 연휴를 보내고 있다. 최씨는 그 영혼들의 마음을 보듬으며 <이어도 연휴>를 열창했다. 이어달리기 하듯 따스한 기운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또 시간의 흐름을 넘나들었고, 음악 시간은 클라이맥스에 치달았다.
수강생 이아무개씨는 "가사가 너무 좋았어요, 특히 마지막 노래가 심금을 울렸어요"라며 감상을 내놓았고, 또 다른 수강생 김씨는 "진짜 너무 좋아서 더 따라 불렀으면 좋겠네, 이 노래를 내 이모에게 선물하고 싶어요"라는 소박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마지막 세 번째 음악 시간은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이루어졌다. 최씨는 대학생 때 처음 제주 4·3사건을 접하고 공부하며 20년을 지나오고 있는데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무서운 것이고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더라, 하지만 너무 피해의식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며 "맨날 울고, 우는 것이 지겹기도 하고…. 슬픔은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슬픔을 딛고 현재 사는 우리도 당당하고 떳떳하자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된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는 "제주도민들도 태극기가 만들어지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는 배경에 희생되었다는 데에 자긍심을 갖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당히 살겠네!>라는 노래를 만들었고, 이 노래를 삼춘들에게 드리고 싶기도 하고 저 스스로도 그런 다짐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4·3유적지 답사를 함께한 수강생 삼춘들과 '당당히 살겠네'를 합창했다.
서러운 세월 이겨내면서수려한 영산 한라산 처럼묵묵히 살아온 우리네 인생끈질긴 생명력 기쁨이로세당당히 살겠네~ 당당히 살겠네~역사에 길이길이 당당한 우리"- 최상돈, <당당히 살겠네>부러 구슬픈 가락을 쓰지 않고 옛 학교의 교가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만들었다던 이 노래를 마치며 하루를 오롯이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해보았던 4·3아카데미 수강생들의 마음이 힘 있고 가지런해짐을 느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마음 또한 결코 무겁지만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삼춘'이라는 말은 제주도에서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두루 쓰이는 호칭으로 얼핏 호칭만 가지고는 친척쯤 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혈연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이웃집 사람도 ‘삼춘’이라 부른다." - 전연술 < 제주도에 감수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