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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만해묘소 인터넷문예뉴스 ‘문학in’(대표 이소리)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 사후 68주기를 기리는 ‘제1회 만해 한용운 문학제’를 망우리 묘소에서 연다
▲ 망우리 만해묘소 인터넷문예뉴스 ‘문학in’(대표 이소리)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 사후 68주기를 기리는 ‘제1회 만해 한용운 문학제’를 망우리 묘소에서 연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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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 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되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모두

시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바람도 없는 공중에 /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나룻배와 행인'(나는 나룻배 / 당신은 행인 /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등으로 널리 알려진 민족시인이자, 승려,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선생.

인터넷문예뉴스 '문학in'(대표 이소리)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 사후 68주기를 기리는 '제1회 만해 한용운 문학제'를 망우리 묘소에서 연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이 돌아왔습니다'라는 깃발을 내건 이번 문학제는 지금까지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수많은 행사가 있었고, 지금도 열리고 있지만 만해 묘소에서 기일에 맞춰 직접 연 문학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행사는 6월 30일(토) 낮 3시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 1번 출구에서 모여 사가정 공원 앞까지 문학in 소속 문인들과 (사)한국작가회의 소속 문인들이 손에 든 현수막 행진으로 시작된다. 주관은 서울문화투데이, 사람일보, 인터넷저널, 울산포커스, 자연in. 후원은 (사) 한국작가회의, 분단과 통일시, 우리시대 시인들.  

만해 한용운 문학제 현수막 만해 묘소에서 기일에 맞춰 직접 연 문학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 만해 한용운 문학제 현수막 만해 묘소에서 기일에 맞춰 직접 연 문학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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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낮 3시 30분에는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로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고 <향약집성방>을 우리말로 옮긴 서거정(1420~1488) 시비가 세워진 사가정 공원에서 문학in 대표 이소리 시인 '인사말', 고산돌 시인 '행사내용 발표'에 이어 용마산 시비 산행이 이어진다.

낮 4시 30분에는 만해묘소에 모여 '추모제'를 시작으로 박희호 시인 '인사말', 유시연 작가 '만해 한용운 약력소개', 정동용 시인 추모시 '님의 침묵' 낭독, 박광배 시인 신작 추모시, 이산하, 김이하, 조길성 시인 등이 함께 토론하는 '만해 한용운 삶과 문학 세미나'가 1시간 동안 펼쳐진다. 저녁 6시에는 시인 박인환, 방정환 등 묘소기행으로 이번 행사가 마무리된다.

'문학in' 유시연 편집총주간은 "추모제가 끝난 뒤 행사에 참여하신 분에게는 떡과 막걸리, 부채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며 "이날 행사가 끝난 뒤 하산해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사가정역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문학in 정기회의'도 함께 열린다"고 덧붙였다.

조선총독부 꼴보기 싫어 집조차 반대방향인 북향으로 지어 

만해 한용운 선생은 청주가 본관으로 3.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다. 선생은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집조차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받지 않았다. 그는 친일로 마음을 바꾼 최남선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내세우자 "'최남선'이라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이미 장례를 치러서 당신은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열네 살이 되던 해인 1892년에 전정숙과 결혼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에는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떠돌며 수년 동안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가 출가한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때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힘겨운 역사란 소용돌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어림짐작된다.

만해 비 ‘추모제’를 시작으로 박희호 시인 ‘인사말’, 유시연 작가 ‘만해 한용운 약력소개’, 정동용 시인 추모시 ‘님의 침묵’ 낭독, 박광배 시인 신작 추모시, 이산하, 김이하, 조길성 시인 등이 함께 토론하는 ‘만해 한용운 삶과 문학 세미나’가 1시간 동안 펼쳐진다
▲ 만해 비 ‘추모제’를 시작으로 박희호 시인 ‘인사말’, 유시연 작가 ‘만해 한용운 약력소개’, 정동용 시인 추모시 ‘님의 침묵’ 낭독, 박광배 시인 신작 추모시, 이산하, 김이하, 조길성 시인 등이 함께 토론하는 ‘만해 한용운 삶과 문학 세미나’가 1시간 동안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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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는 백담사에서 김연곡에게서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수년 동안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등을 읽으며 근대사상을 많이 받아들였다. 1908년에는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1911년에는 송광사에서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열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 친일 불교행위를 곱씹으며 온몸으로 막았다.

1913년에는 박한영 등과 불교종무원을 세웠고, 1917년 8월에는 조선불교회 회장을 맡았다.  그해 12월 어느 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가운데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우쳤다고 알려지고 있다. 1918년에는 불교잡지 <유심 惟心>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뿐만 아니라 계몽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다. 그 뒤 신체시를 벗어난 새로운 시 '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24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을 맡았고, 1927년에는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다. 1931년에는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을 맡았다. 같은 해 김법린, 최범술, 만공, 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에는 단재 신채호 시신이 비밀리에 입국한 것을 알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 100년 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40년에는 창씨 개명 반대운동을,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펼쳤다. 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만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했다. 선생은 극심한 일제 탄압 속에서도 고개 숙이지 않고 독립사상을 펼치다가, 성북동 집(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66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시집으로는 '님의 침묵' 등이 있다. 자녀로는 첫 번째 아내와 두 번째 아내에서 낳은 딸 한영숙, 아들 한보국이 있다. 한보국은 고향인 홍성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만해 한용운 문학제#문학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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