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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 위의 세계사>
<식탁 위의 세계사> ⓒ 창비
<식탁위의 세계사>(창작과 비평사)는 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먹을거리에 얽힌 소소한 상식과 그에 얽힌 복잡한 세계사를 쉽고 흥미롭게, 간결하고 명확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먹을거리들은 요즘 한창 맛있는 감자와 옥수수를 비롯하여 돼지고기와 닭고기, 바나나와 포도, 소금과 후추, 차와 빵이다. 이중 반찬으로는 물론 그냥 쪄먹는 것으로도 훌륭한 간식거리인 감자에는, 아일랜드 인들의 비극적인 사연이 스며있다.

감자가 지금은 유럽의 요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음식재료 중 하나지만, 처음부터 이처럼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적도 부근으로 16세기, 남아메리카를 탐험한 스페인 항해사들에 의해 유럽에 전해졌다. 그런데 꽤 오랫동안 유럽인들에게 감자는 '악마의 과일' 혹은 '돼지와 같은 가축들이나 먹는 것'에 불과했다.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는 소문까지 떠돌 정도로 감자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소문으로 그치지 않고 프랑스의 브장송 의회가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고 단정 짓고 감자 심는 것을 금지하는 결정까지 할 정도였다.(1630년)

이런 감자가 유럽인들에게 먹어도 되는 음식이 되고, 기근까지 해결해주는 고마운 구황작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프로이센의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감자 재배를 크게 확대했고, 프리드리히 2세가 군대까지 동원해 감자를 심고 먹는 것을 널리 보급한 덕분이다.

감자 심기를 워낙 꺼리자 프리드리히 2세는 1744년에 군대의 감시 아래 거의 강제로 감자를 심게 한다. 그리고 운반과 재배, 보급 등을 군대가 담당하는 등 감자 보급에 노력한다. 이런 노력으로 사람들에게 점차 가까워지는 감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7년 전쟁 때 프로이센 군인들의 전투식량이 되어 프로이센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책을 읽다가 '7년 전쟁'에 대해 검색하니 "오죽했으면 감자 전쟁이라고 불렀을까"라며 이 7년 전쟁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한 글도 보였다. 아마도 그 사람은 선뜻 선택할 수도 없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다루기 힘들거나 난감한 문제를 말할 때 쓰이는 '뜨거운 감자'와 같은 의미로 해석한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이는 7년 전쟁 당시의 감자와 오늘날 감자의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한 말 같다. 우리는 종종 이처럼 현재를 기준으로 역사와 다른 존재를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이와 같은 지난 역사나 동식물을 이야기 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런 태도는 사건이나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참고로, 저자에 의하면 일부에서 이 7년 전쟁을 '감자 전쟁', 프리드리히 2세를 '감자대왕'이라고 부른 것은 감자를 보급한 덕분에 승리했음을 기리는 애칭이란다. 프리드리히 2세가 살던 상수시(Sanssouci) 궁전에 그를 기리는 표석이 있는데, 오늘날에도 참배객들이 그 위에 감자를 올려놓아 감자를 보급하는데 앞장섰던 그의 공을 기리고 있을 정도란다.

프로이센을 승리로 이끈 감자는 흉년으로 기근이 심각한 프랑스(1770년) 사람들을 구하기도 한다. 기근의 어려움을 극복한 프랑스의 한 아카데미는, 이듬해인 1771년에 농학자 겸 화학자인 '파르망티에'에게 상을 수여하는데 그가 프랑스에 감자를 소개하고 감자재배를 장려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는 파르망티에라는 이름을 딴 요리까지 있을 정도로 감자와 함께 그의 이름은 유명하다. 그가 감자를 처음 먹게 된 것은 7년 전쟁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서란다. 당시 독일군은 돼지와 프랑스 포로에게만 감자를 먹였는데 이때 감자를 먹게 된 그가 전쟁 후 프랑스로 돌아와 감자를 소개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센과 프랑스에게 고마운 작물 감자는 아일랜드인들에게도 중요 식량으로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작물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론 100만이 넘는 인구가 굶어 죽은 회한의 작물이 되기도 한다.

영국은 오래전부터 시시때때로, 걸핏하면 이웃 국가인 아일랜드를 간섭하거나 침공해 오다가 결국 지배한다. 그리하여 과거 일본이 말도 안 되는 갖은 이유와 여러 정책들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땅을 빼앗아 일본인들에게 분배하고 식량을 비롯한 여러 작물과 물자들을 수탈했던 것처럼 영국도 아일랜드를 수탈한다.

아일랜드 카톨릭 신자들의 땅을 몰수해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나눠주고, 점차 갖가지 이유와 정책들로 아일랜드인들의 땅을 몰수해 영국인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인 지주들의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과정에 감자는 아일랜드의 주식이 된다. 영국이 아일랜드의 농작물들을 수탈해 가면서 상품성이 떨어지는 감자는 캐지 않고 남겨두었고, 덕분에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라도 먹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감자는 아일랜드에서 잘 자라 주었다. 게다가 수확하기도, 요리하기도 편했다. 때문에 쉽게 아일랜드인들의 주식이 된 것이다.

그러나 1845년에 큰 일이 났어. 밭에 심은 감자가 온통 썩어버린 거야. 감자마름병이라는 병충해에 걸렸던 것인데, 이 병은 전염성이 강해서 아일랜드 전역의 감자밭을 뒤덮어 버렸어. 감자 농사를 전부 망쳤지. 아일랜드 농토에는 대체로 감자만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입게 됐어.…….썩어가는 감자를 보고 아일랜드 사람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모두들 낙담했고, 충격에 빠졌지. 대체할 작물 없이 오직 감자에만 의존해 오전 터라, 감자 흉작은 곧 아일랜드 사들에게 치명적인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어.

감자 대기근이 끝난 1851년의 기록에 따르면 이 일로 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백만 명은 기아를 피해 미국 등 다른 나라로 갔다고 해.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선조도 이때 이민을 간 아일랜드 사람이었어. 신문을 보니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외가 쪽도 아일랜드계라고 하더구나. 지금이야 이렇게 성공한 후선들도 나오곤 하지만, 당시에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아일랜드 사람들의 심정은 정말이지 참담 그 자체였을 거야.
-<식탁 의의 세계사>에서

이 감자 대기근은 아일랜드 전체를 뒤흔든 사건으로 현재 아일랜드 교과서에 그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고 한다. 수도 더블린에는 하나같이 비쩍 마른 몰골로 누더기 옷을 걸치고 굶어죽은 아이를 안은 채 망연자실한 모습의 대기근을 기념하는 조각상들이 서 있고.

우리가 오늘날 흔하게 먹는 감자는 이런 사연들을 품고 우리에게 친근하고 값싼 먹을거리가 된 것이다. 감자에 얽힌 이야기가 어디 이뿐이랴. 제2회 창비청소년도서상 수상작품으로, 아이들과 식탁에 둘러 앉아 우리 주변의 친근한 먹을거리에 얽힌 세계사를 조근 조근 들려주는 형태인 <식탁 위의 세계사>는 감자에 대한 더 많은 것들을 들려준다.

감자튀김 이름에 얽힌 사연이랄지, 포테이칩이 생겨난 유래와 감자 대기근을 겪은 이후 아아일랜드와 영국과의 감정싸움과 아일랜드 독립, 프랑스의 감자 보급에 애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일화 등을.

 중국 윈난 고원지대인 루구후(해발2800m~3000m)의 감자꽃. 감자꽃과 옥수수와 해바라기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감자가 무척 맛있었다. (2011.7)
중국 윈난 고원지대인 루구후(해발2800m~3000m)의 감자꽃. 감자꽃과 옥수수와 해바라기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감자가 무척 맛있었다. (2011.7) ⓒ 김현자

그런데 영국인 지주들은 그 와중(기자 주:감자 대기근은 6년여 동안 지속됐다)에도 원조는커녕 아일랜드에서 계속 곡물을 공출해갔어.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의아하지 않니? 영국인 지주들에게 아일랜드는 단지 이윤을 추구할 기지일 뿐이었던 거야. 아일랜드 사람들의 생활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어.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국이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이면서도 바로 옆의 자기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이것은 인종 학살 정책과 다를 바 없다고 분개했단다. 뒤늦게 빅토리아 여왕을 비롯해서 영국 사람들이 원조를 보내왔고, 신대륙으로 이민 간 아일랜드 사람들의 지원 덕에 아메리카에서도 원조가 전해졌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데다 그 양도 피해에 비해 보잘 것 없었단다.  

감자 대기근을 겪고 난 후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고 거세게 들고일어났어. 감자 마름병이 돌고 흉년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다 하더라도 대기근으로 번진 것은 철저히 영국 탓이라고 믿었거든. 그러면서도 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영국의 편에 서서 참전해야 했어. 식민지 조선의 남자들이 일본군으로 뽑혀갔던 것처럼 말이야. 참전했던 군인들 중 전사자가 5만 명 가까이 발생했지.  -<식탁 위의 세계사>에서

이 책의 내용적인 장점은 역사의 주류가 아닌 소외된 자들의 입장을 우선해 들려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감자 대기근을 통해 영국인들의 오만한 제국주의와 비인도적인 처사를 들려준다. 세계사로만 그치지 않고 우리의 역사와 연결 지어 보도록 이끌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 감자 이야기 틈틈 영국과 아일랜드 관계와 흡사한 우리의 일제강점기 현실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들려주고 있어서 우리 역사로의 관심과 접근에도 좋은 것 같다. 

외에도 돼지고기로는 중국의 대장정에서 문화 대혁명까지, 빵으로는 마리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들을, 닭고기로는 프랑스의 선량한 왕 앙리 4세와 때를 잘못 만난 미국의 후버 대통령의 사연들을, 바나나로는 유나이티드 프르트사와 바나나 공화국의 수난, 한경오염과 플랜테이션 농업의 폐해, 포도로는 우리나라 최초 자유무역협정(FTA)국가인 칠레산 포도가 우리에게 오기까지를 통해 FTA의 그늘 등을 들려준다.

 '100만 가량이 굶어 죽고 100만 가량이 이주했다'가 맞을까. '200만 가량이 굶어죽고 200만 가량이 이주했다'가 맞을까.
'100만 가량이 굶어 죽고 100만 가량이 이주했다'가 맞을까. '200만 가량이 굶어죽고 200만 가량이 이주했다'가 맞을까. ⓒ 인터넷 캡쳐

몇년 전에 아일랜드 기근(감자 대기근)에 대한 간단한 글을 읽은 적이 있고, 궁금한 마음에 검색을 한 적이 있다. 결과 감자 대기근으로 200만 여명이 굶어죽고 200여만명이 해외로 이주해 당시 800만이던 아일랜드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 정도로 알고 있었다. (위 6월 28일자 화면 캡쳐 참고) 참고)그런데 <식탁 위의 세계사>에선 아래 인용처럼 100만 가량이 죽고 100만 가량이 해외로 이주했다고 쓰고 있다. 책이 참고하고 있는 자료는 지바현 역사 교육자 협의회 세계사부가 엮은 <물건의 세계사> 29쪽. 아울러 여타의 자료에선 감자 대기근 발생 년도를 1847년으로 하고 있는 반면 이 책은 1945년이다.

어떤 기록이 맞을까. 출판사에 의하면 근거하고 있는 책은 물론 뉴스 등 공식적인 글 대부분 100만이라 밝히고 있어 가장 보수적인 입장인 100만을 따른 것이며, 1845년에 감자 대기근이 시작되어 인명피해 등이 심각해진 시기가 1847년이라는 것.

출판사와 전화를 끊고 '감자 대기근/100만' 검색 결과 관련 뉴스들이 보이는 한편, 백과사전의 이런 입장 때문인지 200만/200만이라 적고 있는 글들도 아주 많이 보인다. 위 인터넷 캡쳐 아래처럼 인터넷 주소가 org인 글에도. 오류는 또 다른 오류를, 하나의 오류는 경우에 따라 수많은 오류를 만들어 낸다. 어떤 지식이든 검증이 필요한 시대다. -김현자

덧붙이는 글 | <식탁 위의 세계사>ㅣ저자:이영숙ㅣ출판사:창작과 비평ㅣ출간일:2012-5-29 ㅣ값:11000원



식탁 위의 세계사

이영숙 지음, 창비(2012)


#감자#감자 대기근#아일랜드 대기근#세계사#감자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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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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