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미국 작가 조 살(Joe Soll)이 쓴 <입양치유 : 회복을 위한 길(Adoption Healing : A Path to Recovery)>라는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다. 그 책의 이런 내용이 지금도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입양으로 아이를 잃은 경험은 아이를 죽음으로 잃은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 죽음 또한 똑같이 끔찍하지만 죽음은 끝이 있고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를 입양으로 떠나보낸 엄마는 위로받지 못하며, 아기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야 하며, 자기 아이가 살아 있거나 행복하거나 건강한지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입양 보낸 아이는 전쟁에 나가서 생사불명이 된 사람과 같이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아이가 입양을 통하여 없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 또한 입양으로 자기 친엄마를 상실하여 죽음보다 더 아픈 경험을 겪게 된다. 아이가 죽지도 않았는데, 아이를 없는 존재로 취급해야 하는 것은 아이가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 미혼모인 엄마는 자기 아이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행복한지, 슬픈지 혹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전쟁 중에 실종된 것처럼, 엄마에게 자기 아이는 실종, 즉 입양으로 인해 실종된 것이다. 이것은 엄마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결코 지울 수 없는 뼈아픈 기억이다. 입양으로 인한 아이의 실종,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이의 상실은 그래서 엄마를 미치게 만든다. 주변에서는 엄마에게 아이를 잃어버린 것 때문에 통곡하라고 내버려 두지 않고, 그 사실을 부인하라고만 한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엄마품에서 강제로 분리되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를 주위에서는 기대한다. 엄마나 아이가 이러한 근원적 이별과 상실의 아픔에 대해서 치유받기 전까지, 그들은 영원히 통곡상태에 멈춰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 이후 17만 명 이상의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면서 엄마와 아이가 지금도 지울 수 없는 상실감으로 고통받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 속도는 세계 최고 국가 중 하나라고 자랑하지만 출산율은 최저국가 중 하나다. 또 엄마와 아이를 강제로 이별시키는 해외입양송출국으로 위치는 세계 4위다.
아이의 상실은 엄마를 미치게 만들지만 또 엄마와의 강제이별은 아이도 미치게 만든다. 스웨덴 입양인의 자살률이 일반 스웨덴인보다 3.7배, 우울증 2.7배, 약물중독 3.2배 높은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생후 1주일 만에 노르웨이로 입양... 30년 만에 무작정 한국으로
노르웨이 입양인인 오영실씨는 1982년 1월 13일 새벽 2시 22분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생후 1주일 만에 미혼모인 그녀 친모는 영실씨를 고아원에 보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그녀 친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21세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친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22세였으나 영실씨를 양육할 형편이 안 되었다.
그래서 생후 1주일 만에 친모에 의해서 고아원에 보내진 영실씨는 곧 노르웨이로 해외입양 보내졌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2012년 6월, 영실씨는 자기가 태어난 곳, 애증이 섞인 모국을 무작정 방문했다.
지난 28일 '뿌리의집'에서 만난 영실씨는 키가 훤칠하게 컸다(173cm). 기록에 따르면 그녀 친부도 상당히 키가 컸다고 한다. 그러나 영실씨가 친부모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친부모의 고향이 어디인지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등에 대하여 영실씨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
백인부모에게 입양된 다른 해외입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영실씨는 동네에서 유일한 유색인종 아이로서 자라면서 학교 급우들로부터 다른 피부색과 외모 때문에 많은 놀림을 받았다. 영실씨에 대한 급우들의 왕따는 십대 때가 최악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번민과 고통의 10대 시절에 대한 추억이 좋지 않다.
영실씨 양부모는 지금은 은퇴했지만 두 분 다 그녀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교사였다. 양부모에게는 친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영실씨보다 나이가 몇 살 많은 남자아이도 입양해서 영실씨는 입양인 오빠와 함께 자랐다. 그러나 영실씨와 입양 오빠와의 사이는 그저 그렇다. 1년에 한 번 정도만 크리스마스에 그녀는 입양오빠를 양부모 집에서 만난다.
영실씨는 노르웨이 한 대학교에서 재정경제학을 공부했고 지난 2005년 졸업했다. 그리고 졸업하자마자 노르웨이 한 극장에서 연극표를 파는 판매원으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그녀는 연극관람을 좋아해서 무료로 연극을 볼 수 있는 연극표 판매원 직장이 너무 맘에 든다. 아마 은퇴할 때까지 이 일을 할 것이다.
"이제는 한 여성으로 성장한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어려서부터 양부모로부터 자신이 "한국으로부터 해외입양"되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자란 영실씨는 어려서부터 항상 언젠가는 꼭 자기가 태어난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에 막상 오기 전 까지는 친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여간 지난주에 영실씨는 휴가를 내서 그토록 그리던 한국을 무작정 방문했다. 그러나 한국에 도착한 영실씨는 '30년 전 나를 이 땅에서 낳아 주신 친부모님들은 과연 어떤 분들일까' 하는 호기심이 갑자기 발동했다.
이제 30세가 된 영실씨는 "친부모님을 미워하지 않아요. 친부모님이 당시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요. 그러니 친부모님은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셔도 되요"라고 기자에게 잔잔히 전했다.
영실씨가 친부모를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저는 단지 지난 30년간 상상 속에서만 늘 그리던 친부모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을 뿐이에요. 또 친부모님에게 이제는 한 여성으로 성장한 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영실씨와 인터뷰 중 그녀가 어떤 분노를 꾹 참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면서 <입양치유>의 작가 조 살의 글이 떠올랐다.
아기가 수유 중인 엄마의 젖이나 우유병으로부터 분리되면, 조그마한 주먹을 꽉 쥐며, 얼굴이 붉게 변하고, 격렬한 분노가 담긴 울음으로 울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반응이다.우유병으로부터 분리되어도 아기가 격렬한 분노를 느끼는데, 하물며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품에서 강제로 분리 됐으니, 영실씨가 분노를 느낀다면 그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실씨는 오는 7월 10일 자기가 태어난 나라인 한국에서의 첫 휴가를 마치고 노르웨이로 돌아간다. 그녀는 돌아갈 때까지 그저 자기가 태어난 땅의 공기와 분위기를 마음껏 마시고 싶다고 한다. 아무쪼록 그녀가 30년간 항상 그리워하던, 이름도 성도 모르는, 친부모를 만나면 좋겠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깊이 지닌 그 상실과 이별의 아픔이 꼭 치유되었으면 좋겠다. 영실씨를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3210-2451)으로 연락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