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 밤입니다. 와인을 한잔하렵니다. 아내와 세 아들은 잠들었습니다. 일부러 일찍 재웠습니다. 오전에 여수엑스포 이탈리아 관에서 와인 한 병을 얻었거든요. 이제나 저제나 눈치만 살피다 밤중에 일어났습니다. 아내가 깨면 이 밤에 무슨 술이냐며 퉁을 놓을까봐 조심스럽네요.
볼록한 잔과 멋들어진 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킵니다. 잔에 투명한 액체를 따르고 한 모금 머금으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재빨리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지요. 잊은 게 있습니다. 이 와인은 일반 병따개로는 입구를 열지 못합니다. 전용 병따개가 필요하지요.
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으며 온 집을 뒤졌습니다. 싱크대 위와 아래 그리고 서랍까지 열어봤는데 병따개가 없습니다. 아이들 책상서랍도 기꺼이 훑었습니다. 그래도 병따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타는 목마름은 더해만 갑니다. 집을 먼지 털듯 조용히 뒤진 지 삼십분, 기어코 병따개를 찾았습니다.
찬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맥가이버 칼'이 눈에 띕니다. 아이들이 숲 유치원에서 가지고 놀던 칼입니다. 반갑더군요. 손을 틀어막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거룩한 의식을 행하듯 병따개를 와인 병 꼭대기에 꽂았습니다.
마개를 뚫어야 하는데 병따개가 휘어집니다
이제 힘주어 빙글빙글 돌리면 됩니다. 한 가지 걱정이 생깁니다. 새 와인을 열면 '뿅'하고 경쾌한 소리가 날 텐데 그 소리에 가족들이 깨면 어쩌죠? 고민도 잠시뿐 침을 삼키며 병따개를 돌립니다. 서서히 돌리며 힘을 줍니다. 예상대로라면 병따개는 코르크 마개를 뚫고 깊이깊이 박혀야 합니다.
그런데 웬걸요. 이상하게 병따개는 코르크 마개 겉만 핥고 있습니다. 조금 더 힘을 줬습니다. 이번엔 아래로 내려가는 대신 거꾸로 병따개가 휘어집니다. 어렵게 찾은 병따개를 만져보니 굵은 철사 같습니다. 손으로 힘을 주니 이리저리 휘어지는 게 와인 병 따기는 영 글렀습니다.
그날 밤, 와인 못 마셨습니다. 마른 침만 꼴딱꼴딱 삼키다 포기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아내에게 넌지시 물었죠.
"집에 와인 병따개 없어." 아내가 싱크대를 열더니 녹이 탱탱 슨 병따개를 슥 내밉니다. 어제 밤 그토록 찾아 헤맬 때는 야속하게도 보이지 않던 병따개입니다. 아내는 병따개를 손쉽게 찾습니다. 이래서 모든 일은 아내에게 물어야 하는가 봅니다. 원망스런(?) 병따개는 튼실해 보였습니다. 단번에 코르크 마개를 뚫겠더군요. 아내 손에서 귀한 물건을 재빨리 가로채 조용히 갈무리했습니다. 다음날 밤, 또 다시 온 가족이 잠든 틈을 타 조용히 일을 마무리 지었죠.
이탈리아 음식 공짜... 두 말 않고 약속했다
한 병을 통째 다 마셨습니다. 코르크 마개를 열긴 했는데, 다시 막으려니 이놈이 들어가질 않더군요. 덕분에 와인에 흠뻑 취했습니다. 그 와인 어디서 왔냐고요? 이탈리아 북부 도시 피에몬테 주에서 왔습니다. 여수세계박람회장 이탈리아 관에서 '피에몬테의 날'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한 병 얻었죠.
실은 며칠 전 이탈리아 관 담당자로부터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거든요.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일이 영 어색한지라 딱 잘라 거절하려는데, 맛있는 이탈리아 음식을 맛 볼 수 있다잖아요. 두 말 않고 가겠다고 약속했죠. 행사 마친 후, 이탈리아식 음식을 대접받았습니다.
음식은 썩 입에 맞지 않았지만, 열심히 먹었습니다. 새로운 맛에 대한 호기심과 예술작품 같은 음식이 폭풍 포크질을 멈추지 않게 하더군요. 특히, 와인을 실컷 얻어 마셨습니다. 잔 비우기가 바쁘게 재빨리 술을 부어주는 통에 취하지 않을 만큼 마셨습니다.
알고 보니 피에몬테 주는 유명한 와인이 많이 생산되는 마을이더군요. 동네에 유네스코 문화유산도 많답니다. 우리에겐 '토리노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피에몬테는 슬로푸드 운동이 시작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슬로푸드는 본래 1986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 브라 마을의 식생활 문화 잡지 편집자인 카를로 페트리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슬로푸드의 이념은 국제 슬로푸드 협회 설립 대회의 슬로푸드 선언을 거쳐 구체화되었고 국제 문화 운동으로 이어졌죠.
아름다운 그곳 눈으로 확인할 일만 남았다
이탈리아 남부가 정열의 도시라면 북부는 전통이 숨 쉬는 도시가 곳곳에 있습니다. 여수세계박람회장에서 비행기 타지 않고, 저 먼 이탈리아 피에몬테를 구경했습니다. 덕분에 문제의 와인도 한 병 얻었고요. 이제 남은 일은 그 땅에 발 딛고 서 보는 일입니다.
행사 때 말한 것처럼 아름다운 곳인지 제 눈으로 봐야지요. 그리고 그 밤에 느꼈던 상큼한 와인도 정식으로 맛 봐야지요. 아쉬운데로 시간 없으신 분은 여수세계박람회 이탈리아관으로 오세요. 예술작품같은 음식이 즐비하답니다. 단, 지나친 음주는 삼가하시고요. 좋은 구경 놓칠 수 있으니까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여수넷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