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고, 또는 뜻하지 않게 무엇이 된 뒤 그 안에서 더 큰 꿈을 꾸고 실현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다소 일찍 찾아 온 듯한 멜번의 추위 속에 찾아간 모디알록 비치 초등학교에서 만난 장인선 호주 교육부자문관은 어쩌면 후자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날씨도 차갑고, 바쁘실텐데... 좀 멀진 않으셨나요?" 교문 입구까지 마중을 나온 그녀의 따스한 인사가 먼저 추위를 녹여준다. 장인선 자문관은 학교 교장을 소개 시켜준 뒤 바로 2층에 있는 한국어 교실로 안내했다. 교실 입구 복도 벽에는 학생들과 학교 교사들이 함께 한국 문양 조각들을 이어 만든 커다란 작품이 장식돼 있다.
문 입구에는 실지로 움직여 그 기능을 알아볼 수 있는 물레방아와 초가집 모형 등이 아기자기 하게 전시돼 있다. 교실 안, 켜져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서는 한국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창 너머로 모디알록의 멋진 전경이 보이는 곳에 있는 한국어 교실에서 우리는 따스한 한국 전통차를 나눠마시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어떻게 호주 땅에 한국어를 심고 퍼뜨리는 일에 이토록 열정을 바치게 됐을까.
"한국어 교사가 되고 호주 정부 교육청에서또 한국어를 널리 퍼뜨리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요. 정말 돌이켜보면 내 의지가 아니라 어떤 정해진 필연이 나를 끌어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한국의 톨스토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친정 아버지는 의사다.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어머니는 당시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줄곧 평교사로 행복해 하는 타고난 '선생님'이셨다. 아직 외부에 대해 닫혀 있는 부분이 더 많았던 당시, 아버지는 어린 인선이에게 늘 세상은 정말 넓다면서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 더 큰 꿈을 키우는 것을 권하셨다.
그 영향 탓이었을까. 장인선 씨는 바깥으로 활동 범위를 높여가고 또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의 가장 커다란 우산으로 동반자가 돼 줄 영국인 남편과 결혼도 했다.
"결혼 당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제가 결혼을 하겠다는 상대가 영국인이라고 하니 부모님께서 그 피터(Peter Mcmahon) 라는 놈(!)이 도대체 어떤사람인지 알아보러 영국까지 날아오셨더랬어요. 그리고 피터의 가족을 다 만나보셨죠." 혼쾌히 승락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피터의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의사인데, 단순히 의사라는 것이 마음에 흡족했던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30여 년 동안 의료 활동을 펼치며 흑인인권 운동을 하다가 옥살이까지 마다 않았던 '삶의 흔적' 때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피터의 장인선씨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어 마음을 놓고 결혼을 승락하기에 이르렀던 것.
이렇게 결혼을 한 장인선씨는 피터와 함께 태국으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산림보호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봉사활동이다 보니 가진 돈도 거의 바닥이 나고 뭔가 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단다. 두 사람은 시부모님이 아직 의료 활동을 펴고 계시는 아프리카에서 도움이 되는 일을 해 보자는데 뜻을 모았고, 그 계획을 위해 기초의학 공부를 해 두면 좋겠다는 생각에 멜번으로 일단 기수를 돌렸다. 그때가 1990년.
기초의학 공부를 위한 과정을 밟던 중 우연히 호주의 유수 일간지 < The Age >에 실린 작은 광고 하나를 발견하게 됐다. 그 광가 오늘의 장인선씨를 있게 한 커다란 계기가 됐다고 한다.
"프라안 단과대학 (Prahran TAFE) 에서 한국어 강사를 모집한다는 광고였어요. 무심코 '한 번 해 볼까'라면서 신청해 놓고 남편에게 지금까지 나는 한국어를 가르쳐 본 적이 없으니 안 되겠다고 미리 염려를 했지요. 그랬더니 남편이 그쪽에서 당신을 쓰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미리 당겨서 걱정이냐며 달랬습니다. 일단 시도를 해보면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될 것 아니냐고 격려를 해 주더라고요."그래서 별 기대 없이 간 인터뷰에서 그녀가 듣게 된 극찬은 "교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으로 보여진다"는 말이었다.
"그 옛날에 여자로서 경성사범을 나왔다면 정말 최고의 학벌이었죠. 그 학벌을 가진 엄마는 항상 겸손하셨고, 평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자신의 일을 정말 사랑하고 행복해 하셨어요.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도 엄마처럼 학생들이 좋아하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지요. 물론 존경하는 아버지의 일도 멋있어 보이고, 또 아빠 병원에서 이것저것 가져다소꼽놀이 할 때 의사 역할은 혼자 다 알아서 하면서도 한 밤 중에 왕진을 가야 하는 아빠에게서 피곤한 모습을 많이 보며 막연히 힘들다는 생각을 했던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기초 의학 공부를 하려다가 '타고난 교사'라는 평을 듣고 보니 막연히 자리하고 있던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교사'라는 꿈이다시 살아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계획에 없던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많은 새로운 일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첫 번째는 한글의 우수성을 다시 깨달은 것이었다.
"우리들이 학교 다닐 때 한글을 배우고, 다른 공부를 한글을 통해서 했는데도 진정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한글의 우수성에 빠져들면서 지난 세월들이 '대학 입시를 위한 학생'으로 살았을 뿐'이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죠."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더 깊이 한글을,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그녀는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돼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이미 한국어의 우수성을 깨닫고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선구자들과 교류를 할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콜린 우드 여사(Mrs. ColleenWood)는 당시 맥키논 고등학교 (Mckinnon Secondary College)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실력을 더 향상시키기 위해 장인선씨가 첫 발을 내딘 프란 테이프에 한국어를 배우러 오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Box Hill 센터의 VSL(Victoria School of Languages)에 처음으로 한국어 교실을 만들었던 김영옥, 문영인(Jane Moon)씨를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어 보급을 위해 앞에서 뒤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된 것은 그녀가 참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자산이 됐다.
이렇게 한국어 교사로 처음 호주에 왔던 의도와 다른 길을 걷게 된 장인선씨는 시작한 일을 더 확실하게싸는 의지와,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결과를 낳아서는 안 되겠다는 의지로 활동폭을 넓혀 나갔다.
장인선씨는 1991년에서 1997년까지 VSL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1993년에는 라트로브 (LaTrobe) 대학 교문을 스스로 두드려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한 사례로는 처음으로 교육학과(Teaching Course Diploma in Education)을 수료하며 자신의 경력을 더 쌓았다.
또 1992년부터 1996년까지 CAE(Council of Adult Education)에서 한국어 코스를 담당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1994년 맥키논 고등학교에서 1996년 스윈본(Swinburn) 대학으로 직장을 옮길 대까지 계속됐다. 스윈본 대학에서는 학과장을 맡았는데, 당시 강의를 청강했던 한국 유학생들은 당시 한국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마광수 교수를 언급하며 강의가 재미있다는점에서 '호주의 마광수 교수'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렇게 쉬임 없이 지속된 그녀의 활동은 질롱 크리스찬 컬리지(Geelong의 Christian College), 멜번대학교, 세인트 이나시오(St. Ignatius) 가톨릭 초등학교, 세인트 브리기즈 (St. Brigids) 가톨릭 초등학교, 그리고 모디알록 비치(Mordialloc Beach) 초등학교까지 줄곧 이어졌다. 그는 바쁜 활동 중에도 스스로의 향상을 위해 멜번대학교에서 언어학을 더 공부하고 VCE시험(대입고사)의 한국어 시험관 의장 등을 역임하며 지난해부터는 호주 정부 교육청의 자문관으로 또 새로운 부분을 개척하고 있다.
"대학 코스든, 단기로 무엇인가를 배우든, 수업이 재미있어야 한다는 건 변함없는제 믿음입니다. 수업이 재미 있어야 그것을 계속 공부하고 싶어지고, 그리고 공부하다보면 아는 것이 많아지지요. 한국어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한국어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아는 것이 많아지다 보면 자연히 한국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 거죠. 저의 이민 역사와 함께 한 한국어 교육의 삶은 저를 한국인으로 거듭나게 했고, 아는 만큼 줄 수 있기에 더 열심히살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가장 훌륭한 조력자인 남편 피터 역시 언어·문화·인권·자연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어서 동반자로 가장 큰 힘이되며 늘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한다. 또한 그 사이에 태어난 딸 미나 역시 배우는 걸 좋아해 한글을 통달한데다 좋아하기까지 해 특히 요즘 어린 소년 소녀들에게까지 널리 퍼지기 시작하는 한류와 더불어 친구들에게 인기 만점이란다. 한국인의 피가 자신에게 흐르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아이라고 장인선씨는 '엄마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한국어를 알리는데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것을 엄청난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세종대왕님께, 선조님들께, 그리고 저의 가장 큰 스승이신 어머니, 훌륭한 후원자인 남편 피터를만들어주신 시부모님들에게까지 두루두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더불어 그녀는 더 어려웠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같은 뜻으로 같은 일을 해 주는 한국어 교사 동료들에게 늘감사와 존경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끝내고 취재 수첩을 접기 전 한 마디를 더 적어넣었다.
"멋진 날이다. 멋진 시간이었다. 그 무엇도 '핑계'대지 않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언제든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찾아 온 그 시간 처럼 다시 교문 까지 배웅을 해 주는 장인선씨와의 작별 인사는 짧게 끝낼 수밖에 없었다. 마침 아이들을 데리러 온 많은 학부형들이 "하이 인선..."이라며 뭔가 또 이야기를 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소 작은 체구의 그녀가 아주 커다랗게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아마 곧 다시 만나 '열심히 사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면서...
호주에서 한국어 교사 되기 |
호주에서한국어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이 필요할까. 다음은 장인선 자문관이 평소 자주 받는 문의와 그에대한 답변을 정리 한 것이다.
- 한국어를 가르치는 데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나? "그렇다. 초·중·고등학교의 한국어 수업에 한국어를 많이 사용할 것을 권장하지만 교사가 영어를 잘 할 줄 하는 상태에서 권장되는 것이다. 또한 교실 수업 외에 교직원들, 학부형들과의 대화 및 모든 학교 내외 업무는 영어로 이뤄지기 때문에 유창한 영어 실력은 필수다."
- 교사과정을 하려면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 필요한가? "대학원에서 언어교사 과정의 신청조건에 IELTS 말하기·듣기·읽기 쓰기 각 부분 모두에 7점 이상을 요구한다."
- 한국어 교사 자격증은 어떻게 취득할 수 있나? "대학의 교육과정/대학원 교사 과정 이수 후VIT(Victorian Institute of Teaching)에 등록을 신청하면 심사과정을 거쳐 정교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 한국에서 교대나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했는데 호주에서 한국어 교사로 일할 수 있는지? "현재까지는 한국의 교사 자격증이 있는 경우에도 언어교육과정 전체를 이수해야 하는 것이 빅토리아주에서 한국어 교사로 일할 수 있는 일반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주의 새 정책, 언어교사 양성계획에서는 앞으로 자국에서 교자 자격증을 획득한 사람은 빅토리아주 내 대학원의 언어교육과정에 등록해 '한국어교육 실습' 즉 교생 과정을 밟아 통과되면 정식 교사로 등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한다.
이 계획안은 이제 막 실행 단계에 들어갔다. 정부에서 6억 달러 지원을 확정했는데, 1차 지원은 2012년 6~7월, 2차 지원은 2013년 4~5월, 그리고 3차 지원은 2013년 9~10월에 이뤄진다. 이 장학 지원금은 학부 학생으로 언어를 전공하며, 언어교사로 일할 사람, 현재 학교에서 다른 과목을 가르치지만 앞으로 언어를 공부하여 언어 교사로 일하고 싶은 사람, 모국의 교사 자격이 있으나 빅토리아 주의 교사 자격증이 없고 그래서 교사 과정을 이수해 언어교사로 일하고 싶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특히 이 계획안이 실행되면서 한국어 교사로 일하고 싶은 많은 한인들이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 한국어 교사 과정은 어느 대학에서 할 수 있나? "올해에는 멜번의 RMIT와 ACU(AustralianCatholic University)에서 2명의 한국인이 코스를 밟고 있다. '한국어 교육 코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교육' 과정을 밟는 가운데 한국어 교사를 희망하는 학생은 한국어 교육을 하고 있는 학교에서 실습을 거쳐 정식 한국어 교사의 지도와 심사 및 대학 교수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 빅토리아 주의 초중고등학교에서 한국어 교사가 될 수 있는 여러가지 길을 설명하자면? "첫째, 정식교사(학부, 대학원의 언어교육과정을 마친 후 교사 등록이 되어 취직이 되는 경우)와둘째 교육대학이나 대학원을 이수했으나 언어교육 과정을 밟지 않고 준교사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경우가 있다. 준교사의 경우에는 특별 허락을 준 학교에서만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으며 학교에서는 보통 1년의 계약 기간 또는조건부 기간을 별도로 책정 해 교사의 자질과 실력 평가 후 근무지속 여부를 결정한다. 또 통과돼 학교에 취직되면 3년 안에 언어교육 과정을 이수해 정식 교사로 등록을 마쳐야 한다. 그외 학교에 따라 교사 보조를 채용해 보조 인건비를 지급 받으며 교사의 보조로 돕는 길도 있고, 본인이 각 학교에 연락해 무보수로 자원 봉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 교사 자격을 받으면 학교에 바로 취직이 되는지? "정교사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학교를 배정 받는 것이 아니라, 교사 본인이 광고를 보고 서류를 넣어 서류심사 및 인터뷰를 거쳐 선발되거나 개인적으로 학교를 방문해 한국어 프로그램 개설을 설득할 수도 있다."
이밖에 자세한 사항은 장인선 교육부 자문관의 이메일(chang.in.s@edumail.vic.gov.au)을 통해 할 수 있다.
특히 현재한국정부(한국교육원)에서 한국어를 교수 과목으로 채택하는 학교에 첫 해에는 주 2일 분의 교사 인건비 전액을, 그 다음 해에는 주 하루 인건비 전액을 지원하며 빅토리아 주 정부에서 역시 제2외국어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하는 학교에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우수한문화와 유산들을 호주에 알리고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아직 태산처럼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의 학교 및 문화기관, 단체들과의 교류가 시급한 시점이다. 이런 일에 동참하고 아이디어와 재능을 나눌 한국의 학교나 개인들 역시 장인선 자문관에게 자세한 문의를 해주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Hello." 이런 인사말도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만 언젠가 우리와 모습이 다른 호주인들이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한국어로 인사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될 날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그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한글은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인정한 가장 과학적인 글자이고, 거기에 더불어 '남의 나라'에서 한국어 교육보급을 위해 뛰는 사람들이 이렇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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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조금 수정 된 상태로 멜번저널에 중복 게재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