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야 부탁해!(My Traveling Camera)"는 경제적 정서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아시아의 빈곤층 아이들에게 디지털 카메라를 전달해 마음껏 사진을 찍게 하고, 그 사진들이 담긴 카메라를 대신 여행시켜 자존감을 선물하고 외국 친구들을 맺어주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글은 2011년 10월~12월 한국, 베트남, 미얀마, 몽골의 4개국에서 진행된 "카메라야 부탁해!" 프로젝트 제1기 아이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소개하고 있으며 계속 연재됩니다. <기자 말>예감1. 이 나라를 짝사랑할 것 같다.예감2. 이 아이들이 프로젝트를 구원해줄 것 같다.예감3. 결국 나는 이 나라를 오고 또 올 것 같다.2011년 11월 15일, 미얀마에 온 지 사흘째이자 <카메라야 부탁해!> 프로젝트에 참가할 미얀마 아이들을 처음 만났던 그날 내 일기장에는 이렇게 단 세 줄의 일기만 달랑 적혀있다. 너무 강렬하고 선명한 예감이어서 뭐라 덧붙일 말도, 필요도 없었다.
예감은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시작되었다. 우선 독특한 비주얼이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눈만 마주쳤다 하면 수줍게 "밍글라바(안녕하세요)~"하며 소곤거리고 호호거리는 소녀들로 가득하지, 그런데 이 소녀들의 태반은 파르라니 깎은 민머리에 핑크빛 가사를 입고 합장을 하는 비구니들이지.
역시 사진들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아니, 기대 이상이었다. 나는 단순히 특별한 비주얼만 보고 기대했던 것인데 막상 사진을 보니 9첩 반상처럼 가짓수가 풍성해서 즐거운 비명이 절로 나왔다. 비주얼이 되는 소녀 스님들이 365일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미얀마에서 내가 만난 아이들은 전체 학생 중 절반에 가까운 160여명이 소녀 스님들인 미얀마의 싼먀디따 사원 학교 아이들이다. 미얀마는 사원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경우가 흔한데 싼먀디따 사원처럼 학생 5명 가운데 2명이 핑크빛 가사 차림의 소녀 스님들이고 시골의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와 무료로 숙식과 교육을 제공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한다. 프로젝트 참가자 중 세 명이 사원에서 기거하는 소녀 스님들이다. 그러다 보니 소녀 스님들의 어지간한 일상은 카메라 세 대에 낱낱이 포착되어, 사진만 봤을 뿐인데 내가 그 곳에서 몇 달은 살아본 것 같다. 싼먀디따 사원의 구조와 하루 일상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해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새벽 4시. 지금쯤 다들 일어나 이불을 개고 있겠지? 오늘도 불심 깊은 깔레아니는 삼총사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아침 예불에 참여할 거야. 우물가에서는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조막만한 손으로 쌀을 씻으며 조잘조잘~ 우물가 뒤편에서 고독을 씹고 있는 저 아이는 누구지? 뒤태가 낯익다 했더니 동 트는 하늘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는 뚜날디였어.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류바땡기가 동생의 핑크빛 가사를 가져다 빨래를 하겠지.두 시간도 안 돼 바짝 마른 가사를 걷고 개면서 친구들과 재잘재잘~ 오후 수업까지 모두 마친 깔레아니는 삼총사와 함께 오늘도 밥그릇(발우) 하나씩 들고 몇 킬로미터를 걸어 시주를 부탁하겠지? 탁발 갔다 돌아오자마자 류바땡기와 뚜날디는 교과서와 노트를 챙겨 출입문도 창문도 없는 교실로 들어갈 거야.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고학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거든. 줄기차게 덤벼드는 모기와 싸우고 심심하면 한 번씩 울어주는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노천 야학에서 늦도록 공부하고 있겠지."
아무리 가짓수가 풍부해도 맛이 없는 9첩 반상이라면 받아도 기분이 좋을 수 없다. 하지만 미얀마에서는 즐거운 표정의 아이들 사진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이 아이들이 말 그대로 카메라를 갖고 놀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해보지 않았지만 이 사원 학교 아이들의 대다수는 카메라라는 것을 소유해본 적이 없다.
카메라라는 것을 보기는 했어도 직접 찍어보는 경험은 난생 처음인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카메라 세대가 떨어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별한 사건이다. 그러다 보니 매일 저녁 한쪽에서는 모델놀이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재연놀이를 하며 카메라 삼매경에 빠졌다.
자기들이 무슨 유비, 관우, 장비라고 도원결의를 연상케 하는 포즈로 세 소녀 스님이 손을 맞잡고 있질 않나, 빗자루를 기타 삼고 바가지를 모자 삼아 진지한 표정으로 밴드 흉내를 내고 있질 않나.
사실 좀 의외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사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라 차분하고 공손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어서 이 아이들을 보고 상상할 수 없었다. 이 스님들이 찧고 까불고 방정떨고 할 것 다 하는 영락없는 십대들이라고? 바른생활 교과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스님들이 바람에 굴러가는 가랑잎만 봐도 까르르 한다는 소녀들이라고?
그런데 사진이 이 전혀 매치될 것 같지 않던 둘을 하나로 매치시켰다. 카메라를 쥐고 있는 동안에는 아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스님 모드에서 소녀 모드로 전환되었다. 평범한 카메라가 마법을 부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님 이전에 한창 이성에 관심 많은 십대 소녀들이라는 사실! 열다섯 살의 뚜날디는 다소 우락부락하고 덩치가 좀 있는데다 머리까지 밀어놨으니 언뜻 보면 남자 같다. 그런데 외모와 달리 뚜날디는 예쁜 인형 따위를 좋아해 수집하고, 야학의 젊은 남자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진짜 소녀'다. 한 번은 아이들과 함께 공원의 노천 카페에 앉아 있는데 근처에 뚜날디 또래로 보이는 십대의 소년 스님들이 있었다. 그런데 무심한 척 굴지만 뚜날디가 은근히 그들을 의식하는 게 보였다.
뚜날디는 아닌 척 하며 소년 스님들을 슬금슬금 곁눈질하고, 나는 아닌 척 하며 그런 뚜날디를 슬금슬금 곁눈질하고. 그러더니 뚜날디가 살그머니 카메라를 들었다. 그냥 풍경을 찍으려고 했을 뿐이라는 듯 괜히 아무 데나 셔터를 눌러대더니 그 소년 스님들이 앵글에 들어오자 줌으로 당겨 찰칵!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순간 내 눈에는 뚜날디의 핑크빛 가사가 핑크빛 교복으로 보였고 그 소년 스님들은 자줏빛 교복을 입은 이웃 중학교 남학생들로 보였다. 몰래 웃지만 말고 즉석에서 미팅 자리를 만들어줄 걸 그랬나 보다.
나이는 어려도 스님은 스님이다. 그래서 미얀마 여자들이면 누구나 얼굴에 바르는 타나까도 소녀 스님들은 바르지 못한다. 한창 멋내기 좋아하는 나이인데 머리도 못 기르고 타나까도 바르지 못하니 좀 안 됐다.
그러나 아이들이 머리를 미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스스로의 선택이다. 실제로 싼먀디따 사원 학교에는 민간인 신분으로 사원에 머물며 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꽤 있다. 사원이 무료로 숙식과 교육을 제공해주니 그 대가로 머리를 밀어라,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스님이 되기로 결심한 아이들은 부모가 독실한 불교 신자이거나, 사원에 대한 감사와 보답의 차원이거나 대개 이 둘 중의 하나다. 어떻게 부모가 돼서 어린 딸을 스님 하라고 등 떠미는지 납득이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미얀마는 한국이 아니다. 국민의 대부분이 독실한 불교신자인 미얀마는 생전에 한 번쯤 출가해서 스님으로 사는 삶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대개 싼먀디따 사원에 도착해서가 아니라 고향에서 미리 머리를 밀고 스님이 되어 출발한다. 미얀마는 외국인은 물론이고 자국민조차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거나 자고 싶은 데서 아무 데서나 잘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주거와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어 자신의 거주지와 다른 자치주로 가려면 엄격한 통제와 숱한 검문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싼먀디따 사원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의 가난한 소수민족 출신들이어서 두 배로 애로가 많다.
미얀마는 70%가 버마족이고 나머지가 130여 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다. 아무래도 주류인 버마족과 소수민족들 간에 충돌이 잦고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반군과 정부군간의 전투로 총소리에 잠을 설치는 게 일상이다. 그런데 소수민족 출신이어도 스님만 되면 엄격한 통제와 숱한 검문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다. 미얀마에서 스님은 만원버스를 타도 자리를 양보 받아 앉아서 갈 수 있고 교통비나 입장료도 대폭 할인 받거나 무료다. 독실한 불교 신자들이 대부분인 나라여서 각종 제도와 관습이 스님을 예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뚜날디는 친족(族)이라고 하는 미얀마 소수민족 출신이고 양곤에서 1박2일이 걸릴 만큼 멀리 떨어진 야카인 지역이 고향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먹고살기 어려워지자 엄마는 주지스님을 따라가라고 하며 동생들과 함께 뚜날디의 머리를 밀어 보냈다. 그러나 뚜날디의 사원 생활 첫해에는 베개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때까지 자기네 언어인 친족 언어만 쓸 줄 알았지 국어인 미얀마어는 까막눈인지라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사원의 낯선 규율과 공동체 생활은 힘들기만 했다. 맏딸이지만 자신도 고작 열두 살의 어린 아이였던 뚜날디는 어린 동생들이 엄마 보고 싶다고 울 때면 자기도 함께 울었다. 지금은 친구도 생기고 사원 생활에도 적응되어 즐겁게 잘 지내고 있지만 첫 1년 동안에는 매일밤 엄마와 고향 생각으로 울다 잠들었다고 한다.
"가끔 예고 없이 엄마한테 전화가 올 때가 있어요. 그런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어떤 날은 엄마가 안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도 해요. 그런 날은 며칠 동안 마음이 아파요." (뚜날디)"엄마요? 보고 싶지만... 같이 살 수 없는 처지라... 다음 생에는 꼭 가족이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류바땡기) 류바땡기는 뚜날디와 열다섯살 동갑내기로 민족과 고향이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들과 함께 이 곳에 온 경위도 같다. 류바땡기는 싼먀디따 사원의 최고참으로 열살 때 이 곳에서 왔다.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향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엄마가 몇 년 전 양곤으로 찾아와서 만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무래도 출가한 스님 신분이고 남매가 모두 사원에 있으니 엄마가 직접 찾아와서 만나는 식이다. 하지만 1000km 떨어져 1박2일이나 걸리는 먼 지역이다보니 차비가 많이 든다. 정말 다른 문제가 아니라 차비가 비싸서 만나러 오지 못한다. 비행기를 타는 것도 아닌데 그깟 차비가 얼마나 든다고 그러나 싶겠지만 사정이 그렇지가 않다.
공식적으로는 미얀마도 무상 교육이다. 하지만 교복이다 입학금이다 육성회비다 해서 학비 외에 들어가는 돈이 있다. 몇만 원 정도에 불과하고 미얀마 사람한테도 그리 큰 액수는 아니다. 그런데도 자녀가 많거나 가장이 없는 등의 사연으로 그 돈이 부담스러워 자식을 공립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부모가 있다. 그런 부모들을 위해 사원에서 학교들을 운영한다. 사원학교는 학용품까지 일체 무료다.
그래서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데가 사원학교다. 그렇다면 집과 가까운 사원학교도 얼마든지 있는데 왜 굳이 머나먼 싼먀디따 사원에 자식들을 보냈을까? 바로 싼먀디따 사원이 무료로 숙식까지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즉 싼먀디따 아이들은 대부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라는 얘기다. 자식 보낼 때 버스비가 없어 빚내 마련한 부모들도 있다. 야카인 지방에서 한 번 다녀가는 왕복 차비만 해도 공무원 한 달 월급에 육박한다. 그러니 자식들이 보고 싶어도 차비 때문에 못간다는 엄마들의 사연은 변명이 아니다.
자기가 가진 가장 비싼 것과 싼 것을 사진 찍고 그 이유에 대해 쓰라고 했더니 이렇게들 찍고 썼다. 아이들이 소유한 것이라고는 자기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정도의 공간과 고향을 떠나올 때 입은 옷과 이불, 그리고 탁발로 받아온 쌀을 팔아 구입한 학용품 정도다. 아이들의 사치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자꾸 빠져 한 쪽 눈알이 테이프로 고정된 낡은 곰인형과, 조잡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중국산 애나멜 필통이 전부.
그런데도 이 소녀 스님들은 부모와 생이별 하게 만든 타고난 가난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래도 사원에 있어 먹고살 걱정 안 해도 되고 교육도 받고 있으니 자신은 행운아라며 부처님 가운데 나무토막 같은 소리를 한다. 물론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에 비하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이렇게 먹고 사는 아이들은 행운아인가 아닌가?
밥: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날림과 최저의 품질을 자랑하는 쌀밥. 식단: <아침> 밥, 된장, 야채 볶음. <점심> 밥, 야채국, 멸치조림. <다음날 아침> 야채무침, 밥, 간장.. 저녁: <오늘 저녁> 생략, <어제저녁> 생략, <그제 저녁> 생략
이것이 자칭 행운아라고 하는 아이들의 식단이다. 미얀마 현지 사람도 아이들이 먹는 밥을 먹어보면 더 이상 도저히 못먹겠다며 숟가락을 놓는다고 한다. 이런 밥을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물었다는 사람도 있다. 정말 심하게 형편없기 때문이다. 하긴 하루 두 끼씩 200여명이 식사할 양을 대려면 좋은 쌀 보다 많이 살 수 있는 싼 쌀을 사게 될 것이다. 순전히 미얀마 국내 후원자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사원에서 곳간에 쌀이 떨어지지만 않아도 감사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거의 매끼니 반찬 하나, 그것도 푸성귀 반찬 하나로 때우는 식단은 너무 했다. 일주일 내내 나물과 미얀마식 젓갈만 먹기도 한다.
고기 반찬은 특별 후원자가 생기면 한 달에 한두 번 나온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저녁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얀마 불교는 스님들이 정오 이후에 곡물 섭취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심도 낮 12시 이전에 마쳐야 하고 정오 이후에는 두유나 물 정도 외에는 먹을 수 없다. 아무리 스님이라지만 한창 성장기 아이들이다. 숟가락 놓고 돌아서기 무섭게 배고프다고 하는 게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다. 그런데 금식기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일년 내내 저녁을 굶는다는 게 말이 돼?
그러니 어른 2명, 아이 5명이 먹는데 빈 밥그릇이 무려 14개! 소풍을 가서 아이들에게 밥을 사줬는데 아이 5명이 밥만 12인분을 해치운 것이다. 베트남에서도 몽골에서도 아이들에게 밥을 사줬지만 이 기록은 전무후무하다. 그나마 사춘기 소녀들이라 남의 이목에 신경 써서 두 그릇만 비웠지 만약 내가 없었더라면 각각 네 그릇씩 해치웠을지 모른다.
물론 동남아 사람들이 반찬은 조금 먹고 밥은 아주 많이 먹는 경향이 있지만 이 아이들은 사원의 형편없는 품질의 밥만 먹다 이런 외식을 거의 처음으로 해보고 맨밥만 먹어도 맛있으니 그냥 무서울 정도로 폭풍 흡입인 것이다. 고기 반찬을 추가로 시켰더니 그때까지 식탐을 자제하며 밥값이 너무 많이 나올까 봐 나름 배려하던 류바땡기가 체면 불고하고 밥을 시켰다. 살면서 아이들 밥 먹는 것을 보고 충격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아이들이 저녁은 굶고 밥은 후지고 반찬은 푸성귀 반찬 하나로 먹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죽하면 미얀마 아이들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가장 좋았던 것을 사진을 찍고 놀았던 것보다 그날의 소풍으로 꼽는다. 다른 나라 아이들과 달리 미얀마 아이들은 놀이기구 하나 더 타보는 것보다 맛있는 거 먹고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 했다. 류바땡기는 일기장에 그날의 소풍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쓰고 장래희망으로 나같은 사람이 되어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것이라고 썼다. 일인당 만 원도 안 되는 밥 한끼 사주고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다니.. "롤모델 되기 참 쉽죠~잉"
그래서 미얀마를 떠나기 전에 사원 내 모든 아이들에게 고기 반찬을 쐈다. 150달러면 닭고기를 사서 최소한 한 끼 이상 고기반찬을 모두 먹을 수 있다고 해 그 비용을 후원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 돈으로 컴퓨터를 기증한다든지 뭔가 실체가 남는 것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맛있게 먹고 행복해 하며 먹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줘야지 내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주지 말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함께 소풍에 데려가지 못한, 사원 내 다른 아이들에게 빚진 내 심정 때문이었다.
미얀마의 경우처럼 한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 프로젝트를 하면 프로젝트의 의의와 효과가 더 높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선택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는 상처받을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다섯 명씩인데 미얀마에서는 여섯 명이다. 제6의 멤버가 있는 것이다.
유난히 맑고 새까만 눈동자가 예쁜,
그 예쁜 눈이 나 때문에 빨갛게 됐던,
그래서 내게 마음의 빚으로 남은,
눈물의 깔레아니!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11년 10월~12월 한국, 베트남, 미얀마, 몽골의 4개국에서 진행된 "카메라야 부탁해!" 프로젝트 제1기 아이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소개하고 있으며 계속 연재됩니다. 여기 올린 사진들은 아이들이 직접 찍은 것으로 저작권은 해당 아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