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거부'의사를 철회하며 포괄수가제 조건부 수용을 선언한 대한의사협회가 지난 3일 일간지 광고를 통해 대국민 사과문을 개재했다. 내용인즉슨, '의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붕어빵 진료가 시작됐다. 치료의 질이 떨어지므로 환자 건강권이 침해받을 위기에 놓였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일방적인 항변이 주를 이뤘다.
여기에 여론조사 결과에 떠밀리다시피 물러섰음에도 불구하고, "포괄수가제 조건부 수용은 전략이었다. 진짜 거부 투쟁은 이제부터"라며 '몽니'부리기에 여념이 없는 협회 수뇌부의 자세를 보면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정책시비여부를 떠나, 분풀이하듯 '억울함'을 늘어놓는 것이 의료계 스스로에게 과연 도움이 될까.
사실 본 사안의 결과는 이미 시작(건정심 탈퇴시점)부터 예견됐었다. 7개 질병에 국한된 포괄수가제를 반대하는 명분이 처음부터 워낙 약했던 데다가, 의약분업 때와 마찬가지로 '의료공공성'이나 '양심'에 대한 죄의식이 의료인들 속에 도사리고 있어서, 문제의 핵심인 의료서비스 성격 논란에서 우위를 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 뿐 아니라 보건의료 시민단체들 또한 수년간 강하게 요구했던 내용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즉 과잉진료, 의사고시 부정 등 의료인 윤리문제가 부각되는 현 상황에서, 의료행위가 공공서비스냐 사유물이냐의 논쟁이 결코 의료계에 유리한 쪽으로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이를 대하는 의료계의 정치적 태도였다. '문자테러'나 극렬한 상호비방은 이익집단 투쟁의 결과라 치부해도, 아집에 사로잡힌 전문가집단 특유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명분상 불리한 사안이 많더라도, 면밀히 상대 입장을 살펴봤더라면 의료 질 저하나 사후관리시스템 미비와 같은 발전적인 논쟁거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의협은 오히려 (제한적)시술거부나 위원회 탈퇴, 여기에 협회장의 실언 등 불필요한 '악수'를 두며 언론과 여론의 묻매를 맞았다. 대표적인 예로 과잉진료에 대한 노환규 회장의 문답을 잠시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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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목 <손석희 시선집중> 인터뷰 중
- 진행 : 아마도 정부 입장에서는 전체 질환이 아니라 가장 많이 행해지는 7개 질환 가운데 7개의 질환을 정해서 쭉 봤더니 예를 들면 OECD 기준으로 볼 때 간단한 수준의 시술도 입원날짜가 다른 평균에 비해서 두 배 가까이 많으니까 이건 좀 과잉이 아니냐, 과잉진료가 일부 있었다 라는 것은 혹시 인정내지 인식을 하시는지요?
▲ 노환규 : 물론입니다. 과잉진료는 그동안 있어왔고 꽤 많았죠.
- 진행 : 그래서 그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포괄수가제를 도입하는 것 같은데요. 그 7개 질환이 어떤 기준에서 의사들과 합의하에 정해졌는지 안 정해졌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는데 일반적으로 이러한 그 객관적으로 봐서 어느 정도의 진료수준이면 치료가 가능한 질환, 그걸 이 7가지로 정한 모양입니다. 그죠?
그래서 그걸 포괄수가제로 한다는 건데 그렇다면 과잉진료를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요?
▲ 노환규 : 두 가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과잉진료가 생기는 원인자체가 아시다시피 진료수가는 의사, 이 공급자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정하는 거죠. 그런데 이 정부가 정해놓은 진료수가가 원가보다 아래이기 때문에 이 병원들이 병의원들이 그 원가를 보전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검사나 다른 이제 그 과잉진료들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진행자 : 기본적으로 진료수가가 워낙 낮다 보니까
▲ 노환규 : 네, 그렇습니다.
-진행자 : 어찌 보면 손해 혹은 이익이 지나치게 적게 남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과잉진료가 있었다.
▲ 노환규 : 그렇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OECD 다른 국가에 비해서 의료비를 훨씬 덜 쓰는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중략)
- 진행자 : 그런데 그 말씀은 저희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요. 다만 진료수가가 지나치게 낮기 때문에 과잉진료가 있었다는 것을 양해해달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 노환규 : 아니죠. 이것이 하나의 현상인 거죠…(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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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업자간 술자리에서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전국 병의원 중 90%가 시쳇말로 제 돈으로 병원 문 여는 민간업자이다 보니, 때에 따라서는 높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편법에 대한 유혹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을 상대로 한 발언이라면 상황은 다르다. 노환규씨의 발언을 요약해보면, '과잉진료로 인한 부당이득 취득은 현행법상 의료보수가 너무 낮게 측정돼 있어서 생긴 불가피한 현상이다.'라는 것인데, 과연 이것이 시민 법 감정에 비추어 용납될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솔직히 이야기하면 공감대가 형성되겠지.'라는 느슨한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데, 이렇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명색이 의사라는 자가 나와서 내놓은 반론이란 게 고작 '벌이'가 어려워서라니. 혹자의 지적처럼, 택시 운수업자들이 생계유지를 앞세워 '승차거부'를 합리화 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를 편 셈인데, 이 정도 수준의 발언이 단체장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행전면 반대'에서 '제한적 수용'입장으로 말을 바꾼 것 역시 의협의 지도력 부재를 여실히 드러낸다. 건정심 구성 비율 조정을 수용조건으로 내건 것은, 수가제만을 가지고는 상대하기 버거우니 수가계약의 불균형성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자는 것인데, 이는 이미 물을 엎질러 놓고 뒤늦게 수습하겠다는 '아마추어리즘'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18가지 진료 질 평가기준의 미비문제나 서비스 수용자와 수가 지급자의 불일치 등 '이야기할 만한' 사안은 밀어둔 채, 막가파식 논리와 독선으로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의협. 과거 의약분업 때의 약점이 16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것을 보면, 제 3의 분쟁 사태가 발생한다하더라도 의료계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변화를 꿈꾼다면? 무엇보다 '자정(自淨)'이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이것은 슈바이처나 허준처럼 막연한 의성을 요구해서가 아니다. 국민을 볼모삼거나 기사마다 면허를 앞세워 우려를 증폭시키는 댓글을 다는 '좁은' 방법보단, 의료 폐쇄성을 극복할 수 있는 내부 소통 공간을 확보하고 공적 가치를 보다 강조하는 교육제도를 확립하는 길이, 시민의학으로 거듭날 수 있는 참된 방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