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을 잃어버렸다. 5일 오전 11시경에 31개월이 된 딸을 안고 빨간버스(딸아이 말로는 어린이만화 <꼬마버스타요>에 등장하는 빨간꼬마버스 '가니')를 타고 버스카드를 찍으려는 순간, 알게 되었다.
'아, 카드를 어제 입은 청바지 속에 넣어뒀구나.'기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다음 정거장에서 황급히 내리는 순간, 5만 원권 3장이 든 지갑을 떨어뜨린 것도 모르고 집으로 바삐 들어왔다.
그 5만 원권 3장으로 하려던 일이 있었다. 바로 <새로운 100년>(오마이북)을 10권을 사서 대학 때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사서 나누고픈 맘이 들었다.
오. 랜. 만. 에. 그리고 과거가 떠올랐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때처럼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 책을 읽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철학에세이>와 <태백산맥>을 읽고 서로 토론하던 그때처럼. 잃어버린 5만 원권 3장이 20년의 세월을 불러왔다. 낮잠을 자지 않는 딸아이를 간신히 재우고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서, 밀린 일기를 이어 쓰듯이 자판을 두드렸다.
20년 그때처럼 가슴이 뛰고 있었다
<새로운 100년>을 단숨에 읽고 가방에 넣어 들고 다녔다. 마치 복음과도 같았다.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기까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늘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우위를 선점하라고만 배웠던, 인정하기 싫은 현실 속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늘 가슴 조이고 애쓰면서 젊은 날의 꿈은 저만치 밀어놓고 있었다.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서른이 넘어 시작한 배낭여행은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그즈음 필독한 책이 <성경>과 시오노 나나미의 16권짜리 <로마인 이야기>였다. <성경>을 읽고 중동의 성지를 순례하고,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유럽을 두 번이나 방문하고 나서 '우리는 뭐지? 우리 민족의 역사는 어찌 되는 것이지?'라는 결핍감을 느꼈다.
2008년 서울 광화문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가 연일 열리고 있었다. 그 집회에서 오랜만에 대학 때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법륜 스님이라는 분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때 법륜 스님은 대북식량지원을 위해 단식을 70일간 하고 계셨는데, 세상은 무심했다. 나도 무심했다.
그해 여름 결혼 전에 여행이라도 실컷 다녀볼 심산으로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고구려 발해 역사기행에 따라나섰다. 고등학교 때 배운 발해는 한 페이지의 반 정도밖에 기술이 되어 있지 않았지만 지도상으로는 신라보다도 더 컸다. 그때의 궁금증이 기행에 참가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고구려의 웅장함과 발해의 기상에 맘이 흐뭇하기보다, 두만강 너머 민둥산이 각인되었으며,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따라붙었던 중국공안들이 기행이 끝나는 날 공항까지 성가시게(?) 따라붙었던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
또한 알게 되었다. 1995년부터 지금껏 북한의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서 300만 이상이 굶어죽었으며, 지금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 좋아 300만 이상이지, 조금 심하게 말하면 내 고향 부산만한 도시 인구가 통째로 사라지는 일이다.
모르는 것도 죄라고 했다. 그동안 몰랐으니까, 몰랐으니까, 괜찮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찌 이렇게 모를 수가 있지?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임신하고 낳으면서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파주와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은 곳에서 아프리카보다 더한 기아가 계속되고 있었다. 기아로 인해 중학생 아이의 키가 남한의 저학년 초등생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장애가 속출하며,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이 죽고, 간단한 약이 없어서 죽은 일이, 바로 비행기를 20시간 이상 타고 가야 하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1시간 거리인 북한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탈북자가 2만 명을 넘어선 지금 아직도 '모른다'라고 하기에는 너무 맘이 아팠다.
어미가 되니 아이의 기침소리 하나에도 민감하고, 밥 한 숟갈 더 못 먹이려고 안달하고, 내 자식에게는 유기농만 고집하고, 최신 영어 CD를 들려주며, 빵빵한 보험 제대로 들어줘야지 하는 맘이 든다. 그런데 만약 내 새끼에게 먹일 것 없고, 아픈데 약이 없어 치료를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게 된다면, 그 상황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동족이라고 하는 북한에서 그러고 있다면, 뭔가 문제가 단단히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현실을 외면한다는 것은 정치사회 문제를 떠나서 내 양심에 걸리는 일이 되었다.
우리 자식 세대를 위한 선택을 하자<새로운 100년>은 그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보여주는 해법서 같았다. 가슴이 뛰었다. 통일이라는 단어에 걸려 있는 많은 복잡다단한 문제를 생각하면 머리부터 지끈거릴 수 있다. 그러나 법륜스님은 명쾌하게 <새로운 100년>에서 정리해주셨다.
남북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의식을 공유하고, 통일에 대한 통합적인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로만 통일을 부를 것이 아니라, 나의 비전, 특히 내 자식에게, 유기농 음식, 영어 유치원, 근사한 보험보다 통일된 한반도에 살게 하는 가장 큰 선물을 주고 싶다.
무릇 자식에게 큰 거름이 음덕을 쌓는 일이라 하는데,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라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에게 베푸는 것이 제일 큰 베풂이 아닐까. 우리 속담에서 보듯이 제일 미운 놈이라면 아주 큰 떡 하나 더 줄 수도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다짐했다. <새로운 100년> 책을 주변에 권하고, 친구들에게 선물하고, 우리 자식 세대를 위한 선택을 하자고 말할 것이다. 동네 아기 엄마를 만나도, 슈퍼 아줌마를 만나도 말이다.
인도적인 식량지원은 조건 없이 실행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배낭여행 중 만난 한 독일인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그랬듯이 너희에게도 통일은 소리 없이 새벽같이 올 것"이라고. '통일이 될까'라는 의심에 의문을 버리려고 한다. 이제 올바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통합과 남북한이 통일되었을 경우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그림 그리듯이 살아가련다.
딸아이는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를 타지 않고 외가가 있는 부산에서 출발하는 부산발 런던행 대륙횡단기차에 몸을 실어서 부산, 서울, 평양, 신의주, 베이징, 중앙아시아,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를 이은 기차를 타고, 아님 자전거를 타고 그 옛날 유라시아 대륙을 질주하던 우리 조상들에게 전수된 DNA를 길가에 핀 들꽃처럼 가볍게, 자유롭게 휘날리고 살 것이다. 이것이 딸에게 주는 내 유산이다.
덧붙이는 글 | '<새로운 100년> 독후감 공모' 응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