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강의 여러 동생 지천 중 가장 호기심이 가는 곳은 단연 '왕숙천(王宿川)'으로, 그 이름만으로도 오래된 역사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한자 이름 그대로 왕이 묵었다는 곳으로 왕숙천의 상류인 진접읍 팔야리에서 태조 이성계가 여드레를 묵은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세조를 광릉에 장사 지낸 후 왕이 잠든 곳이라고 해서 왕숙천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왕숙천가에는 이렇게 광릉, 국립수목원, 봉선사, 사릉역, 동구릉 등 관광지와 역사적인 유적지가 많은데다 강도 아닌 하천에 밤섬 유원지까지 있는 큰 강 못지않은 곳이다. 요즘엔 이 하천가에 산책로 겸 자전거도로까지 생겨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기에 더 없이 좋은 하천이 되었다. 왕숙천 자전거 여행의 들머리로 선택한 곳은 2년 전 나를 사색에 푹 빠지게 했던 간이역 사릉역(思陵驛)이다.
정다웠던 간이역 경춘선 사릉역은 사라지고
사릉역은 15살에 왕비로 책봉되어 당시 14살의 남편인 단종과 일 년밖에 같이 지내지 못한 비운의 정순왕후 송씨(세종22년 1440년 ~ 중종16년 1521년)의 무덤 사릉(思陵)이 옆에 있어서 이름 지은 경춘선 전철역이다. 지금은 다른 현대식 전철역과 별 다를 게 없는 모습이지만 2년 전 자전거를 타고 찾아왔을 땐 주변에 옥수수가 쑥쑥 자라나던 풋풋한 간이역이었다.
이젠 그 모든 것이 옛일이 되고 말았다는 듯, 간이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역 앞에 살던 나무 한 그루만이 추억을 희미하게 되살려 준다. 그렇게 사라진 사릉역 간이역터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나온 허리 구부정한 동네 주민 할머니는 저 앞에 새 전철역이 생겼다며 동네가 좋아졌으니 자주 놀러오라고 하신다.
사릉역에서 왕숙천과 이어진 진건읍의 작은 개천가를 따라 본격적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달려간다. 며칠 전 비가 많이 내린 덕분에 개천가에 동네 아이들이 나와 물장구를 치며 노는 모습이 오리새끼들처럼 귀엽기만 하다. 이어서 출현하는 사람은 비 내린 개천가에 반드시 나타나는 낚시꾼 아저씨들. 바지, 챙 모자, 텐트까지 온통 개구리 무늬로 깔 맞춤을 했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스나이퍼 (sniper : 저격수) 같아 흥미롭게 쳐다보니 중장년의 아저씨들이 손에 든 건 낚시대가 아니라 둔중한 카메라다. 영어로 사진 찍는 걸 'shooting'이라고 표현 하던데 딱 그 모양새다. 카메라에 달린 커다란 망원 렌즈마저 개구리 무늬로 색칠을 했다. 취미로 사진을 찍는 분들이 웬만한 사진기자나 직업 사진가보다 더 한 게 30도가 넘은 이런 무더운 날씨에 땡볕 아래의 일인용 텐트 안으로 각자 들어간다.
텐트 속에서 은신을 한 채 하천가에 서있는 백로, 왜가리, 해오라기가 물고기를 잡아먹는 결정적 순간을 가까이에서 사진에 담기 위해서란다. 취미 이상의 대단한 열정이 느껴져 아저씨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취미든 직업이든 저런 열정과 몰입의 대상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이들이다.
섬과 아이들을 품은 하천, 왕숙천 하천변을 따라 난 산책로 겸 자전거 도로를 따라 국립 수목원, 광릉의 북쪽 방향을 향해 신나게 달려간다. 무더운 여름 날씨지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시원한 강바람이 더위와 열기를 식혀준다. '자전거 여행'책을 쓸 정도로 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김훈 작가는 자신의 애마에 '풍륜'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그도 자전거를 타면서 맞는 바람의 시원함과 상쾌함에 푹 빠졌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왕숙천은 길 위로 멀리 푸른 산들이 펼쳐져 있고, 강변엔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들이 많으며, 하얀 옷을 차려입은 백로들이 많이 보여 더욱 시원하게 느껴진다.
중간 중간 하천 위를 지나는 다리 밑에는 반가운 모래톱이 보이고, 동네 주민들이 나와 그물질을 하는가 하면 아이들은 물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웃통을 벗은 할아버지들이 모래톱 위에서 장기를 두면서 피서를 하고 있다. 상류 쪽으로 올라갈수록 푸근한 강변의 풍경이 반겨주어 자전거 여행자도 물가에 들어가 손발을 담궈 가며 쉬어가기 좋다.
얼마 후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나타나는데 그건 바로 '밤섬'. 한강의 동생 밤섬은 들어 보았지만 왕숙천에도 하중도 (河中島) 밤섬이 있었다니. 다른 점이 있다면 한강의 밤섬은 무인도지만 왕숙천의 밤섬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작은 섬으로 안에 웨딩홀도 있는 오래된 유원지다. 하천에 있는 섬을 보니 참 이채롭고 섬을 품은 왕숙천이 다시 보인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재잘거림이 들려와 고개를 돌렸더니 글쎄 동네 개구쟁이들이 팬티만 입고 한 곳으로 몰려가고 있다. 그곳은 비가 내린 후 생긴 왕숙천의 물웅덩이로 다이빙도 할 수 있는 천혜의 아이들용 풀장이다. 수영복도 없이 바로 옷을 벗고 뛰어드는 녀석들을 보니 웃음이 나고 내 어릴 적 그때로 순간 이동한 것 같다.
자기들 다이빙 하는 사진을 찍으라며 차례로 돌 위로 올라서더니 나름대로 개발한 포즈로 물속에 뛰어 내린다. 그 와중에 안경을 물속에 잃어버린 놈, 신발 한 짝이 없어졌다며 잠수하는 놈...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엄마의 눈을 부라리게 만드는 것도 어쩜 그리 국민학교 시절 친구들과 똑같은지 신기할 정도다.
자전거 여행자에게 힘을 불어준 옥수수
왕숙천 상류에 있는 진접읍 동네에 들어서자 하천은 계속 이어지나 자전거 도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동네 청년들에게 국립 수목원, 광릉 방향 길을 물어보니 차도를 따라 한참 가야 한다며 이런 날씨엔 자전거 타고 가기 힘들거라고 말린다. 오늘은 여기까지 온 걸로 만족해야 하나, 아님 끝까지 가볼까 고민하다가 길가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삶은 옥수수를 파는 부부와 마주쳤다.
있다가 간식삼아 먹으려고 세 개에 삼천 원 하는 옥수수를 한 봉지 사니 자투리라며 오돌토돌 까만 옥수수 하나를 그냥 먹으라고 주신다. 길가의 가로수 그늘 밑에서 뜨끈한 옥수수를 먹는데 옥수수 알에 단물이 그리 많은지 처음 알았다. '옥수수가 이렇게 달수가' 놀라며 먹는 내 표정에 옥수수 장수 아주머니가 미소를 짓는다. 뜨듯하고 달착지근한 옥수수는 금방 헐벗은 몸이 되었고, 더위로 인해 수그러들었던 심신에 다시 활기가 불끈 솟는다.
차도를 십여 분 달리자 갑자기 길이 갓길도 없는 2차선으로 좁아지면서 양편엔 크고 푸르른 나무들이 둘러선 전혀 다른 풍경이 자전거 여행자를 맞이한다. 무성하고 키 큰 나무들 덕분에 도로에 그늘이 가득하여 시원하고 상쾌하다. 보기 드문 원시림을 간직하고 있는 국립 수목원 가는 멋진 길이다.
애마 자전거도 기분이 좋은지 '촤르르 촤르륵' 체인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온다. '참고 오길 잘했구나' 새삼 힘을 불어 넣어준 옥수수와 옥수수 장수 부부의 훈훈한 인심이 고맙다. 7월 말부터 열리는 연꽃 축제로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봉선사를 지나 조선시대 임금 세조가 잠든 광릉이 나타나면 곧이어 국립 수목원이다.
입장료 천 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국립 수목원은 인터넷 누리집을 통해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나처럼 자전거를 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지 입구에 자전거 거치대가 마련돼 있다. 다종다양한 나무들과 새들이 살고 있는 오솔길, 산책길, 호숫길, 개울가를 여유로이 걷다가 마주친 작은 옹달샘. 물은 아주 조금씩 나오지만 정신이 번쩍 나게 시원한 샘물을 마시니 더운 여름 날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며 주는 상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