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2일 목요일. 날씨 흐리다가 비 오다가 개임. 7월 9일엔 하나원 하루 종일 자원봉사, 7월 10일엔 숨은벽 백운대 산행, 7월 11일엔 강화도 보건소 개구쟁이 튼튼이 교실 강의와 진행보조... 연일 장거리를 다니다보니, 힘에 겨웠지만, 그래도 산이 보고 싶어 식구들 모두 출근하고 학교 간 후에 산에 갔다.
요즘 어머니는 70대 후반의 삶을 사시느라 마음이 복잡하시다. 고래로 드문 나이인 고희(70세)를 지나시고, 희수(77세)가 가까이 오니, 몸은 더 쇠약해지시고, 마음도 더 쇠약해지셨다. 어머니와 함께 산에 가면 좋다, 좋다 하셨는데, 지금은 족두리봉 코스조차 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자식들이 옆에 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어머니를 따르는 애완 고양이도 두 마리나 그 사랑을 다 하고 있는데도, 어머니 마음은 공허해 보인다.
어머니는 집에 계시고, 나는 언니와 가벼운 산책 겸 북한산으로 간다. 지독한 가뭄에 이미 말라버린 나무들은 비가 온 후에도 그 생명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 보이고, 그 와중에도 새로운 새싹이 싹을 틔우고 힘차게 어영차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저 작고 가녀린 새싹도 살아나는데, 커다란 몸짓의 나무가 죽은 것을 보면, 사람의 인생이나 자연의 인생이나 다름이 없어 보인다.
사람이 아무리 아름답고 어여뻐도, 산 속에서는 다람쥐나 새보다 아름답지 않다. 아는 길이라 나는 듯이 정해진 탐방 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우리 앞 바위에 아주 작은 새가 앉아 무엇이가를 쪼아 먹고 있다. 일 미터도 안 되는 그 거리에서 우린 새가 날아갈까 봐 그대로 얼음이었다. 카메라를 꺼내지도 못하고 그 새의 움직임을 보느라 가만있는데, 뒤에서 다른 산행객이 나타나자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그 귀여운 몸짓. 직접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새의 재롱을 이야기 하며 개울가로 가니, 이번 비에 낙엽이 쓸려 내려가, 물이 거울처럼 맑았다. 두 발을 담그고, 땀을 식힌 후 다시 길을 가는데, 저 멀리 바위 위에 다람쥐 한 마리가 왔다 갔다 하며 아주 부지런히 움직이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다. 뒤로 쏙 숨어버리더니 다시 나와 의젓하게 서서 앞발에 무엇인가를 들고 맛있게 먹는다. 가던 길 멈추고 언니랑 나는 다람쥐를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보거나 말거나 제 할 일 다 하더니 나무 위로 쏘옥 올라가 버렸다. 그래 북한산은 너희들이 주인이야.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렴.
두 시간 반의 산행. 산을 벗어나 주택가로 들어서니 능소화가 활짝 피었다. 계절은 이렇게 변함없이 꽃이 필 때 즈음에 꽃을 피우면서 가고 있는데, 우리 인생의 계절은 어른과 아이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그날 나와 함께 한 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터키문명전 <이스탄불의 황제들>에 갔더니 그의 두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명상에 잠긴 모습. 1980년 1월 15일 초판 발행인 이 책은 맞춤법이 바뀌기 전의 문고판 책이지만,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각자에게 맡겨진 시간은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얼마나 짧은 일부분인가? 그것은 순식간에 영원 속에 삼켜져 버리는 것이다. 또한 각자는 물질 전체의 얼마나 작은 일부분인가?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우주의 영혼은 얼마나 작은 일부분인가? 또한 지구 전체에 비하면 당신이 기어 다니는 땅은 얼마나 작은가? 이러한 모든 것은 별로 위대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오직 당신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고 보편적 본성이 가져오는 것을 참고 견디도록 하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15권 32장
내 본성과 보편적 본성의 차이점을 알아야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소나무 씨앗의 싹틔움과 말라버린 나무의 모습과 어머니의 공허함. 두 명의 자식을 키우고 있는 40대의 부모는 이미 자식을 다 키워 버린 70대의 부모 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렵다. 상처 난 소나무 밑둥에 초록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이끼를 보았다. 이 이끼는 소나무에게 해로운 존재일까? 이로운 존재일까? 꼭 나이 든 부모가 자식을 품에 안고 자신의 껍데기까지 다 주려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아직도 멀었나보다. 보이는 소나무는 그저 소나일 뿐인데 나는 자꾸 투사를 한다. 이것이 혹 보편적 본성인 것인가? 참 여러가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북한산에서 본 다람쥐처럼, 새처럼, 흐름에 몸을 맡기며 세파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위험한 길을 피하고, 위험 속에서도 안전한 길을 찾아 하산 장소로 잘 찾아가야지. 어머니도 마음 속 어려운 길에서 좀 더 쉬운 길로 걸어나오시길 기대하면서...
그래도 이 순간까지는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토닥인다. 때론 아주 엉뚱한 결과로 나를 기함하게 하는 인생길이지만, 내 본성이 이끄는 대로 오다보니, 위험한 절벽에서도 길을 잘 찾아 헤매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잘 가고 있다. 이런 복잡한 생각도 점점 단순해지고 있는 요즘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