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실 마을의 선비 성운과 그의 제자 임제가 주고받은 마음
성족리에서 북실 마을로 가다 보면 고갯마루에서 대곡 성운(成運: 1497-1579)의 묘갈과 묘소를 만날 수 있다. 성운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북실 출신인 김벽(金碧)의 사위가 되었다. 35세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49세 되던 1545년(인종 1년) 을사사화로 중형인 성우(成遇)가 사사되자 벼슬의 뜻을 완전히 접고, 처가인 북실로 내려와 대곡서실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서경덕, 조식, 이지함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1568년에는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속리산을 찾은 임제(林悌: 1549-1587)를 제자로 맞아 수년간 가르쳤다. 임제가 수재라는 것을 알아본 성운은, 그에게 '취증임수재(醉贈林秀才)'라는 시를 내리기도 했다.
소년은 뉘 집의 자제인가? 少年誰氏子시가 마치 이장군 같네 그려. 詩似李將軍어느 날 다시 볼까 해서 何日重相見쓸데없이 북쪽 구름만 바라보네. 徒勞望北雲성운은 1579년 세상을 떠나 북실 고개에 묻혔다. 그 때 제자인 임제는 함경도 고산도찰방과 병마평사를 지내고 있었다. 나중에 스승의 부고를 전해 듣고는 대곡선생을 기리는 제문을 짓는다. 그런데 이 글이 정말 명문이다. 그는 선생을 성인과 군자에 비유하고, 백이, 유하혜, 허유, 소부와 비교했다. 그리고 꽃으로 말하면 매화고, 닭으로 말하면 학이라고 비유했다.
"아아! 슬프도다. 북쪽 구름에 취해 시로 반갑게 맞아주시던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밝은 달처럼 맑은 시는 영결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상 아래에서 다시 절 올릴 일도 없어졌고, 고갯마루에서 마음을 주고받는 일도 찾을 길 없게 되었습니다. 우주는 적막하고 밤은 침침하니, 차후로 이 세상에서 제 마음 알아줄 이 없을 것입니다. 흠향하소서! (嗚呼哀哉 北雲醉詠 難忘下榻之時 皓月淸篇 還成求訣之詞 床下之拜不再 半嶺之嘯難尋 宇宙寂寥 脩夜沈沈 此後人世 斷無知音 尙饗)"이러한 글은 성운의 문집인 <대곡집(大谷集)>과 임제의 문집인 <임백호집(林白湖集)>에 들어 있다. 대곡선생 문집은 그의 처조카인 김가기가 1596년 간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603년 김가기의 아들인 김덕민이 <대곡집(大谷集)>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했다. 그리고 백호 임제의 문집은 1617년 사촌동생인 임서(林㥠)가 간행했고, 1621년 이항복과 신흠의 서(序)가 추가되었다.
임제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풍운아로, 1583년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시조를 짓고 제문을 지어 제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조정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때 지은 시조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슳어하노라.성운과 임제, 이들 스승과 제자는 시조에서도 통하는 바가 있었다. 스승인 성운도 전원풍류에서는 제자에게 뒤지지 않았다. 성운은 북실 마을에서의 유유자적한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전원에 봄이 오니 이 몸이 일이 하다꽃 남근 뉘 옮기며 약밭은 언제 갈리아이야 대 베어 오너라 삿갓 먼저 결으리라.마지막 불꽃을 태운 북실 전투
1894년 11월 9일부터 4일간 벌인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남북접의 동학연합군은 정부군에 패하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군은 남쪽으로 철수 금구 원평 전투를 치른 뒤 태인으로 모였다. 이곳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12월 2일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은 임실 새목터까지 후퇴한 후 해월 최시형과 합류 소백산맥을 따라 충청도로 북상한다. 이들은 장수 무주 등지에서 십여 차례 전투를 벌였고, 12월 9일 영동에 이를 수 있었다. 이들은 용산을 거쳐 13일 청산에 도착한다. 이들은 청산에서 옷과 신발, 식량 등을 마련해 15일 보은을 향해 떠난다. 그들은 17일 저녁에 북실에 이르게 된다.
일본군과 민보군은 구인리 삼거리에서 저녁을 먹고 오후 10시 30분 북실을 향해 출발한다. 12시쯤 누청리 입구에 도착한 이들은 파수를 보던 동학군을 잡아 최시형 등 동학군 지도부가 김소촌(金素村)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일본군은 부대를 둘로 나눠 주력군은 강신리로 해서 북실 마을로, 지원군은 성족리로 해서 북실로 들어간다.
고개를 넘어 북실의 남쪽 고지에 이른 주력군은 동쪽의 고개를 넘어 진군하는 지원군과 함께 북실의 동학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전투는 밤새도록 이어졌고, 새벽 4시에야 총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7시가 되어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고, 10시쯤 동학군이 패배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일본군은 도망치는 동학군을 따라가면서 사격을 가했고, 전투는 오후 3시가 되어 완전히 끝났다.
전투가 끝난 뒤 북실의 모습을 일본군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시체는 눈 덮인 북실 곳곳에 서로 베개를 삼 듯 겹쳐져서 골짜기를 가득 메워 몇 백 명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상주 소모사 정의묵(鄭宜黙)은 <소모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전투 중에 전후 도합 395명이 총에 맞아 죽고 골짜기와 숲속에 널려있는 시체가 몇 백 명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영남 선무사 이중하도 12월 28일 동학군 진압상황을 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칼에 베이거나 포살된 수가 395명이고 그 밖에 계곡의 구덩이와 숲 속에 죽어 넘어진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동학군은 북실에 모여 재기하려고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총과 칼로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장비의 열세, 훈련 부족, 전략의 부재 등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동학군은 이곳 북실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지만 안타깝게도 그 불은 더 이상 커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장렬한 전사는 역사 속에 남아 우리의 뇌리를 감돌고 있다.
농촌 체험마을로 거듭 나는 북실
종곡리 북실은 사방이 산에 둘러싸였고, 남쪽으로만 길이 틔어 종곡천이 흘러나간다. 북실 마을은 경주김씨의 600년 세거지지이다. 고려 말 판도판서를 지낸 김장유(金將有)공이 입향한 후 씨족마을을 이뤘다. 조선 전기 과거급제자를 꾸준히 배출하면서 보은지역의 세도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또 사대부가의 덕목인 충효열을 보여주는 인물도 다수 배출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대단한 전통을 가진 종곡리 북실은 현재 농촌 체험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유기농벼를 재배해 친환경 쌀을 생산하고, 콩, 고추, 인삼 등을 재배하고, 복숭아, 블루베리 등 과일을 생산한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농촌체험, 공예체험, 예절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산나물과 버섯 같은 임산물 채취, 과일 열매 솎아주기, 과일 수확 같은 과수 재배 체험, 야생화를 이용한 액세서리 제작, 하천 생태체험, 장 담그기 등이다.
이들은 북실 마을공동체인 '온고지신 북실권역'을 운영하며 농촌 체험마을의 새 장을 열려고 노력하고 있다. 블루베리와 전통메주 등을 직거래하고, 가족형 숙박시설을 마련해 체류형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아직은 체험마을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가지는 않고 있다. 그것은 체험마을을 운영하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프트웨어란 하드웨어를 운영하는 인적 자원과 그 시스템을 말한다. 자신의 농사일에도 바쁜 사람들이 체험마을을 운영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북실진달래 농원을 운영하는 김준식 농군, 온고지신 북실권역의 살림꾼 전난향 사무장 등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나? 하룻밤 북실 마을에 묵은 나도 고민이 된다.
덧붙이는 글 | '온고지신 북실권역'의 누리집은 http://www.buksilvill.co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