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을 넘어 청원으로
원평리는 행정구역 상으로는 보은군 산외면에 속하지만 청원군 미원면과 맞닿아 있고, 괴산군 청천면과도 가깝다. 우리는 달천을 따라 가다 원평교를 건넌 다음 싸리재를 넘어 청원군 미원면 계원리로 갈 것이다. 날씨가 가물어 달천의 수량이 적은 편이다. 둑방에 보니 1960년대 농촌개발의 상징이었던 4-H기념비가 방치되어 있다. 원평교에서는 장례를 치르는 분들을 만났는데, 우리에게 수박 등 먹을 것을 건네준다.
원평교에서 싸리재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이 길로는 차들이 거의 다니질 않는다. 고개를 넘으니 밭에 대추나무 대신 사과나무가 많이 보인다. 보은에서는 대추 재배를 장려하고 있지만, 청원군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고개를 내려오니 미원면 계원리(桂院里) 두원(斗院) 마을이 나타난다. 두원은 계원리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서 상두원이라고도 부른다.
최치원이 이곳 계원리까지 왔대?
두원 마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가운데 계당 마을이 있고, 가장 아래 박대천 근방에 후운정 마을이 있다. 계원리라는 마을 이름도 1914년 계당(桂塘)과 두원에서 한 자씩 따 만들어졌다. 두원 마을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아그배나무가 있다. 수령이 140년쯤 되었다고 한다. 계당마을에는 쇠로 만든 특이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계당 마을에서 다시 박대천 쪽으로 내려가면 후운정(後雲亭) 마을이 나온다. 중간에 돌로 쌓은 제대로 된 성황당이 있다. 성황당 주위에는 굵은 아카시 나무가 있어 당목으로 사용된다. 나무에는 금줄이 처져 있고, 제단에는 누가 갔다 놨는지 막걸리가 있다. 매년 정월 열나흘 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이곳 성황당에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제를 올린다고 한다.
그런데 계원리 마을자랑비에 보니 신라 말기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마을 뒷산인 신선봉에 머물며 공부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이 <계원필경>에 적혀 있다고까지 말한다. 글쎄, 최치원이 이 산골까지 왔을까? 그게 정말 <계원필경>에 적혀 있을까? 우리 땅 천지에 절을 만든 이는 원효와 의상이고, 우리 땅 산천에 흔적과 전설을 남긴 이가 최치원이다. 그런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옥화구곡을 이루는 계원리와 어암리
그런데 계원리 후운정 마을 이름이 이곳에 있던 후운정이라는 정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 홍석기(洪錫箕: 1606-1680)가 고운 최치원의 뒤를 잇겠다는 뜻에서 후운정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 후운정(後雲亭)이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이 설정한 옥화구곡(玉華九曲)의 제2곡이다. 제1곡은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의 만경대(萬景臺)고, 제3곡은 청원군 미원면 어암리의 어암(漁巖)이다.
옥화구곡은 상류로 올라가면서 미원면 월룡리에 제4곡 호산(壺山)이, 미원면 옥화리에 제5곡 옥화대(玉華臺)가 있다. 그리고 옥화리에 제6곡 천경대(千景臺)와 제7곡 오담(鰲潭)이 있다. 제8곡인 인풍정(引風亭)은 미원면 운암리에 있고, 제9곡인 봉황대(鳳凰臺)는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에 있다. 이들 옥화구곡을 읊은 시 중에는 이필영(李苾榮: 1853-1930)의 서시(序詩)가 인상적이다.
하늘이 감춰두고 땅이 비밀로 했던 곳에 옥화구곡이 열렸고 天藏地秘玉華開선조들이 즐겨 머물며 이미 그 이름을 다 정했다네. 先世槃停已摠裁구곡의 여울물에 가을 달빛 비추니 九曲灘頭秋月暎고기 잡는 어부 뱃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네. 漁人不敢棹歌廻 그런데 이 옥화구곡이 1990년 5월 청원군 군정자문회의를 통해 바뀌게 된다. 박대천 상류 미원면 운암리의 청석굴(靑石窟)을 제1경으로 하고, 하류인 어암리로 내려오면서 모두 9경을 설정했다. 제2경 용소(龍沼, 운암리), 제3경 천경대(天鏡臺, 옥화리), 제4경 옥화대(玉華臺, 옥화리), 제5경 금봉(錦峰, 월룡리), 제6경 금관숲(금관리), 제7경 가마소뿔(어암리), 제8경 신선봉(神仙峰, 계원리), 제9경 박대소(博大沼, 어암리).
사물놀이패의 야외수업
우리는 이제 박대천에 놓인 계원교를 건너 어암리(漁巖里) 인봉(印峰) 마을로 간다. 어암리는 원래 어미, 지왕, 쇠바우, 인봉, 방마루와 같은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 마을이 1914년 하나의 행정리로 통폐합되면서 어미의 어와 쇠바우의 암자를 따서 어암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인봉은 바로 물가 동네라 그런지 음식점과 휴게소들이 여럿 영업을 하고 있다. 우리는 박대천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한 10분쯤 내려갔을까? 개울가 마을에 탑신당이 있다. 자연석을 원탑 모양으로 만들어 2층을 쌓고 그 위에 비석을 세웠다. 원탑 둘레로는 금줄을 둘러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고 있다. 매년 정월 열나흘 날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동제가 열린다. 그리고 어암리의 지형이 배 모양이어서 돛대의 위치에 해당하는 곳에 돌탑을 쌓아 균형을 맞추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런데 이곳 식당에서 요란한 악기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가 보니 사물놀이패다. 한 이십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꽹과리, 장구, 북, 징을 두드린다. 한참을 듣다가 잠시 쉬는 틈을 타 어떤 단체인지 물어본다. 그러자 그 중 한 사람이 청주시 사직2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풍물교실 야외수업이라고 말해 준다.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에 수업을 하는데 더위를 피해 이곳 어암리로 나왔다는 것이다.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은 두레국악원장 정환철씨다. 그는 충북 무형문화재 제1호인 청주농악의 전수조교다. 그가 꽹과리를 들고 사물놀이패를 지휘하자, 배우는 사람들이 장구, 북, 징으로 화답한다. 꽹과리, 북, 징은 남자가 치고 장구는 여자가 친다. 전체 인원 중 2/3가 여성이어서 장구의 수가 훨씬 더 많다. 그렇지만 상쇠인 정환철씨의 꽹과리가 전체 소리를 주도한다.
함께 한 우리 대원 중 사물놀이를 공부한 박정자씨가 있어, 사물놀이패의 수준을 물어본다. 자기가 보기에는 공부하는 수준이지, 어디에 내놓을 만한 수준은 못된다고 말한다. 그래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음악인지라 기분전환이 된다. 그들은 또 쉬는 시간에 우리에게 수박과 먹을 것을 권한다. 사진을 찍고 비디오를 촬영하는 나에게는 CNN기자냐고 농담까지 한다. 우리는 잠깐이나마 그들과 어울리며 하루 종일 걸어온 피로를 푼다.
서예가 이희영의 변신을 보다.
이들과 헤어진 우리는 이제 어암1리에 있는 마을회관으로 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늘 하루를 묵어가기로 되어 있다. 다른 날에 비해 짧은 거리(17.1㎞)를 걸은 우리는 사진도 정리하고 기록도 남기고 빨래도 하면서 오후를 보내기로 한다. 나는 그동안 하지 못한 양말과 겉옷 빨래를 좀 한다. 그리고 좀 쉬는데, 이곳 어암리에서 연을 키우고 한지를 만드는 이희영씨가 온다.
그는 우리에게 연잎차를 대접하겠단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실로 몰려든다. 그는 녹차를 은근하게 우려낸 다기에 백련을 집어넣고 지긋이 누른다. 그곳에서 우러난 향과 맛이 녹차와 어울린다. 그런데 맛을 보니 녹차향이 좀 진한 듯하다. 그래서 약간 떫은 맛이 느껴진다. 아직 차를 우려내는 기술이 부족하지만 먹을 만하다. 또 하루 종일 걸어서 갈증이 심한데, 물보다는 차가 몸에 훨씬 낫기 때문에 나는 여러 잔 마신다.
차를 마시고 나자 이희영씨가 우리를 연지(蓮池)로 안내하겠단다. 연지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는 오랜만에 차를 이용한다. 박대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니 하천옆 논에 연지가 만들어져 있다. 한 1000평쯤 되어 보인다. 연지에는 백련과 홍련이 피어 있다. 이희영씨의 말에 의하면 차를 만드는 데는 백련만 사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연지에 핀 꽃은 거의 백련이다.
우리는 둑을 따라 연지를 한 바퀴 돈다. 둑 너머 밭에는 고추와 옥수수가 잘 자라고 있다. 올해는 가문 대신 탄저병이 없어 밭작물의 소출은 괜찮을 것 같다. 연지 옆 박대천에는 여름날 오후를 맞아 백로가 한가로이 먹이를 찾고 있다. 그리고 물 속에서 올갱이를 채취하는 부부의 모습도 보인다. 날씨가 가물어 물위로는 기포가 뽀글뽀글 솟아오른다.
우리는 이희영씨와 다시 마을회관으로 돌아온다. 그는 원래 농사꾼이 아니고 서예가다. 원광대학 서예학과를 졸업하고 청주에서 글씨로 먹고살아왔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아 이제 연잎차도 만들어 팔고 전통한지도 만들고 있다고 한다. 또 어암리에 사시는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 초보 농사꾼이어서 아직 일이 능숙하지는 않아 보인다. 얼굴에서도 아직 도시티를 벗지 못했다. 우리는 그와 헤어지고 나서 각자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이희영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올갱이국을 끓여놨는데 아침식사 때 가져다 먹으면 좋겠다고. 우리도 아침 6시면 떠나야 하는 관계로 5시 15분부터 벌써 밥을 먹고 있었다. 이를 어쩐다, 저 맛있는 올갱이국을. 결국 우리는 그 올갱이국을 다음 날 아침 칠성면 외사리에서 먹기로 하고 지원대 편에 그리로 보낸다. 내일 아침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