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대출 1000조원 시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대한민국 서민경제는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것이 대규모 개인파산 사태로 연결될 경우, 국가 시스템까지 해체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은 역사 속에서 이미 수없이 증명됐다.
서민경제 파탄은 조세수입 감소로 연결된다. 명나라의 멸망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병사들의 봉급을 제때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조세수입이 감소하면, 반란군이나 혁명군이 정부군을 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서민경제 파탄은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물론 '위험하다'란 것은 보수세력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기록으로 남은 역사를 기준으로 할 때, 한국 역사에서 서민경제 파탄이 국가 붕괴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시기는 9세기 말, 후고구려 궁예와 후백제 견훤이 등장한 시기였다. 여기서 '가장 직접적인'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뒷부분에서 설명하겠다.
9세기 후반, 신라의 서민경제는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쿠데타가 자주 발생하고 가뭄과 흉년이 큰 피해를 남기고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 데서 그런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서민경제가 피폐해지니 세금이 제대로 걷힐 리 없었다. 지방에서 경주로 올라오는 세금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진성여왕) 편에 따르면, 결국 진성왕(재위 887~897년) 초반에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진성왕) 3년, 국내의 여러 지방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비고 재정이 곤궁해졌다."조세수입이 계속 감소하다가 결국 국고가 비는 사태까지 발생한 것이다. 돈이 없으면 군대와 관료기구를 움직일 수 없으니, 신라의 국가기능이 마비될 정도에 도달한 것이다.
조세수입이 감소하는 동안, 신라 정부가 수수방관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정부 관료들이 지방에 나가 조세납부를 독촉하곤 했다. 이럴 경우, 웬만한 서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라도 세금을 납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세금이 걷히지 않은 것은 서민경제가 완전히 파탄났기 때문이다. 내고 싶어도 낼 돈이 없었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9세기 후반의 신라는 개인파산의 시대, 신용불량의 시대였던 셈이다.
9세기 후반, 신라는 개인파산과 신용불량의 시대
상황이 이 정도까지 악화됐다면, 이미 오래 전부터 신라 경제가 곪을 대로 곪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신라 정부는 이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금을 독촉하는 데만 신경을 썼을 뿐,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 점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있다. 신라 국고가 텅 비기 8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편에 그 일이 기록되어 있다.
"왕이 측근들과 함께 월상루(누각 명칭)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경주에 민가가 즐비하고 풍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은 시중(총리)인 민공을 돌아보며 '듣자 하니, 지금 민간에서는 지붕을 기와로 덮고 짚을 쓰지 않는다고 합디다. 또 밥 지을 때도 숯을 쓸 뿐, 나무를 쓰는 일은 없다고 하네요. 정말입니까?' 하고 물었다."서민경제가 파탄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에 헌강왕이 얼마나 안이하게 사태를 파악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헌강왕이 눈으로 확인한 것은 경주의 민가와 풍악소리였다. 그는 이 점을 근거로 '민간경제 전체의 사정이 좋은 게 아니냐?'며 시중 민공에게 은근히 동의를 구했다.
위 기록의 이어지는 부분에, 시중 민공은 맞장구를 치면서 "이 모든 게 거룩한 은덕 덕분"이라며 아부를 떨었다. 총리가 임금의 오판을 부추기고 있었으니, 신라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라의 경주도 기본적으로 지배층의 거주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상류층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잘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헌강왕은 경주 사람들의 경제현실을 국가 전체의 경제현실로 호도했다.
지도자 후보로 나선 사람이 "내가 나서면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할 때, 그 경제가 어떤 경제인지 반드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경제 전체를 살리겠다는 것인지, 상류층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인지 꼭 따져봐야 한다. 지난 4년간 한국인들은 '지도자가 생각하는 경제'와 '국민이 생각하는 경제'가 완전히 판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헌강왕이 생각하는 경제도 서민들이 생각하는 경제와 크게 달랐다. 그는 서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그는 경주 시내에 기와집이 즐비한 것을 보고 '건설업계가 돈을 많이 벌고 있겠구나'라며 흐뭇해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생각하는 경제는 '건설업계의 경제'였는지도 모른다.
위기를 기회로 생각한 이들
헌강왕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9세기 후반의 신라 정부는 서민경제의 위기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진성왕 때 가서 국고가 텅 비는 사태에 직면했던 것이다.
기존 체제에서 출세하는 것보다, 기존 체제를 뒤엎는 데 소질을 가진 인물들은 이런 위기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을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생각한다. 궁예와 견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신라 국고가 텅 빈 889년으로부터 2년 뒤인 891년, 양길이 이끄는 반란군의 중간보스인 궁예는 독립부대를 이끌고 10여 개의 강원도 군현(시군구)을 공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듬해인 892년에는 견훤이 전라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후백제 부활'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경제위기를 발판으로 세력을 확장한 궁예와 견훤은 결국 후고구려 및 후백제를 세웠다. 신라는 예전의 소국으로 도로 축소되었다. 서민경제 파탄이 한민족 정치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고려 말인 14세기와 조선 말인 19세기에도 서민경제는 도탄에 빠졌다. 특히 19세기에는 전국에서 민란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날 정도였다. 그런 민란의 결정판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었다. 가계경제의 위기가 혁명의 발발로까지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4세기와 19세기에는 서민경제 파탄이 국가 붕괴로 직접 연결되지 않았다. '서민경제 파탄'과 '국가 붕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방해하는 외부요인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14세기에는 원나라와 명나라가 고려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고려 서민들이 국가체제를 붕괴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가 동학농민군을 방해했기 때문에, 농민전쟁이 조선 멸망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9세기 후반과 10세기 초반에는 신라 문제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외세가 없었다. 당나라가 이리저리 찢겨서 지방할거의 양상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 이후에는 중국이 5대 10국의 분열기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내문제에 대해 입김을 행사할 만한 강력한 외세가 없었기 때문에, 신라의 서민경제 파탄이 국가 붕괴로 직접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궁예·견훤 같은 영웅들이 민중 속에서 튀어나와 새로운 왕조를 창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다.
서두에서 "서민경제 파탄이 국가 붕괴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시기는 9세기 말"이라고 했다. 이것은 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는 서민경제 파탄과 국가 붕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방해할 만한 외세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서민경제를 살리고자 한다면?이처럼 외세의 영향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서민경제가 붕괴될 경우, 서민경제 파탄이 국가 해체로 직접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서민경제 파탄은 단순히 서민들의 불행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국민 전체의 불행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상류층의 불행으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서민경제를 살리고 대한민국을 살리고자 한다면, 가장 일차적인 해법은 서민경제에 애착을 갖는 사람들에게 향후 5년을 맡기는 것이다. 서민들의 빚과 파산을 자신의 빚과 파산처럼 가슴 아파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미래 5년을 신탁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 출발이다.
'국민경제=상류층 경제' 혹은 '국민경제=특정업계 경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정권을 맡겨놓고 뒤늦게 "경제를 왜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았냐?"고 따진다면, 듣는 사람들은 의아하고 억울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