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감시 기능''상관조정 기능''사회유산 전수 기능''오락 기능'매스커뮤니케이션 학자 찰스 라이트(Charles R. Wright)는 언론의 기능을 크게 4가지로 분류해 제시했다. 1988년 그의 저서 <매스커뮤니케이션 통론>에서 언론의 4가지 기능을 강조한 그는 언론의 기능이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하지 못했을 때 사회적으로 역기능이 발생한다는 점을 여러 사례를 들어 증명해 보였다. 언론이 4가지 기능을 고루 발휘할 때 비로소 사회적 순기능이 작용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언론은 이용자들을 편견 또는 무관심의 바다로 내몰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역설했다.
언론이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고의로 중요한 사회문제를 다루지 않을 경우 불공정 보도의 역기능을 초래한다는 대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특히 언론이 오락·스포츠에 지나치게 몰입할 경우 문화적 식민화 또는 순응주의를 불러올 수 있다. 더 나아가 환경감시 및 상관조정 기능을 더디게 함으로써 독자와 시청자들을 정치·사회적 무관심 속으로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국내 언론이 지금 찰스 라이트가 제기했던 역기능적 상황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와 주요 신문사들이 올림픽에 올인하며 환호하는 사이에 중요 이슈가 무관심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스포츠 애국주의'에 심취된 언론 '2012 런던올림픽대회' 개막 이후 지상파방송사들은 올림픽으로 편성표를 도배하다시피하며 연일 반복적으로 스포츠 소식을 내보냈다. 주요 신문들 1면과 해설·종합면 등이 온통 스포츠면으로 뒤바뀌었다. 대한민국 선수들의 메달 획득 소식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며 스포츠 애국주의에 흠뻑 취했다.
주요 신문과 방송사들의 보도에선 중요한 국내 정치·사회적 이슈가 사라졌다. 4개월 앞으로 다가온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위해 진행되고 있는 각 당의 경선소식은 지면과 영상에서 뒤로 말려나기 일쑤였다. 게다가 경선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새누리당의 공천헌금 파문도 올림픽 환호에 파묻혔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일파만파로 확대됐을 공천헌금 비리수사와 의혹 등에 관한 뉴스들이 점점 희석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새누리당 공천헌금 파문이 민주당이나 통합진보당 등 야당 내에서 발생했더라면 어떻게 다뤄졌을까? 지난 4.11총선 민주당 공천과정에서 불거진 모바일 경선 문제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태를 끈질기고 심층적으로 보도했던 언론들이 이번엔 죄다 올림픽 뒤로 숨었다.
이뿐이 아니다. '녹조라떼'를 방불케 하는 4대강 녹조폐해 심화와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는 안산 반월공단 SJM노조에 대한 컨택터스의 폭력진압 사태, MBC < PD수첩> 작가 집단해고 파문,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문화진흥회이사 선임 및 KBS 이사 추천 논란 등 중요 이슈들이 올림픽에 묻혀 제대로 알려지지 않거나 축소 보도됐다. 언론의 환경감시 기능과 상관조정 기능이 재대로 작동하지 않은 탓이다.
실제로 올림픽이 진행된 7월 28일부터 8월 11일까지 2주 동안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검색 사이트 <카인즈>를 통해 국내에서 발생한 중요 정치·사회적 이슈를 검색한 결과 올림픽 이슈가 다른 이슈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기사를 생산했다.
이 기간 동안 <카인즈>에 입력된 각 언론사 뉴스들의 제목과 본문에 포함된 중요 이슈들을 검색한 결과, 서울에서 발행되고 있는 10개 종합일간지가 다룬 '올림픽' 관련 뉴스는 모두 3226건으로 나타났다. 이는 같은 기간 중 '새누리당 공천헌금'(442건), '4대강 녹조'(22건), '컨택터스'(57건) 등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수치다.
지상파 방송사들의 올림픽 의제 집중화 현상은 더 심했다. 이 기간 KBS·MBC·SBS 3대 지상파 방송사들은 '올림픽' 관련 뉴스를 2266건이나 내보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국내 주요 정치·사회적 이슈인 '새누리당 공천헌금'(300건), '4대강 녹조'(30건), '컨택터스'(27건) 등은 인색하게 다뤘다. 올림픽에 올인한 공중파... 컨택터스 용역 폭력 외면한 조중동 방송사들은 메인뉴스 시간 외에도 대부분 프로그램에서 올림픽 소식을 반복적으로 내보내는 등 다른 이슈는 근접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의제편중이 심했다. 마치 '스포츠 바리케이드 게이트키핑'의 면모를 보여주는 듯했다. KBS·MBC·SBS 등 지상파 방송사는 인기 있는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등을 제외하고 절반에 가까운 편성시간을 올림픽 소식으로 편성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채널권을 제한했다.
그 사례로 올림픽 개막 일주일이 지난 3일 MBC가 편성한 19개 프로그램 중 올림픽 특집은 12개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또한 KBS 1TV가 이날 <뉴스 9>에서 내보낸 33개 리포트 중 17개가 올림픽 관련 리포트로 나타났다. '올림픽 올인 방송'이라는 말이 전혀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MBC는 올림픽 개막 이후 크고 작은 방송사고를 냄으로써 시청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사기도 했다.
방송과 주요 신문들이 올림픽에 몰입한 사이에 대통령의 턱밑까지 올라간 듯했던 권력형 비리수사, 4대강 녹조, 노조폭력으로 물든 컨택터스 파문 등 굵직한 이슈는 거의 보도되지 않거나 수박 겉핥기 수준에 머물렀다. 올림픽 환호와 함께 금세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특히 노동자들이 경비용역업체의 폭력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는 등 파문이 고조됐지만 지상파방송과 보수신문들은 관련 내용을 거의 다루지 않거나 피상적으로 보도해 노동자들을 두 번 울렸다.
지난달 27일 경기도 안산 반원공단 내 자동차 부품업체인 SJM 공장에서 발생한 사측 고용 용역경비업체 직원들의 노동자 폭력사태 후 경찰의 폭력 방관 의혹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증폭됐지만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등 보수신문은 이 내용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경찰청의 감찰결과와 중징계 조치가 발표된 8일까지도 SJM 폭력사태와 관련된 기사를 다루지 않았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앙>은 경찰의 조사결과만을 전하는 데 그쳤으며, <동아>는 문제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주장을 사설 등에서 열거했다. 지상파 방송사들도 올림픽 메달 소식에 올인 하느라 이 문제를 회피하거나 피상적으로만 다뤘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월터 리프먼이 1922년 <여론(Public Opinion)>이란 그의 저서에서 강조한 "언론에 의해서 여론이 조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새삼 떠오르게 한다. 그는 "언론 보도를 조작하면 여론을 손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고발했다. 언론보도가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는지, 사람들의 판단이 얼마나 언론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지를 잘 지적했다. 연일 환호하는 올림픽저널리즘으로 인해 국민의 알권리들이 무시되고 있는 현상에서 월터 리프먼의 지적이 더욱 뚜렷하게 읽힌다.
MB 독도방문, 권력·언론 입체적 '깜짝쇼'?
여기에 또 한 가지 주목할 사건이 있다. 연일 스포츠 애국주의를 좇던 방송사와 보수신문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10일 독도 깜짝 방문을 '역대 대통령 최초 방문' 또는 '헌정사상 최초 독도 방문'이라며 극찬했다. 선정적인 제목과 드라마 같은 이미지를 경쟁적으로 내보냈다. 권력과 언론이 입체적으로 만들어 낸 '깜짝쇼'라는 비판을 받을 만했다.
타이밍 또한 절묘했다. 한국과 일본의 올림픽 축구 동메달 결정전을 앞두고, 이 대통령의 독도방문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엄청난 혈세를 쏟아 부으며 조성한 4대강 곳곳이 녹조로 뒤덮여 국민의 생명과 환경을 위협하고 있는데도 이는 외면한 채 독도를 택한 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보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조사와 내곡동 사저의혹 특검, 언론사 파업 청문회,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의 BBK 관련 발언 무혐의 처분 등 굵직한 이슈들도 올림픽 환호와 함께 지면과 영상에서 멀어져갔다.
그렇다면 보수신문과 방송들은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일까? 언론사 내외부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상업주의와 시청률 지상주의가 깊이 뿌리 내린 때문이다. 언론이 흥미위주의 스포츠나 오락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이유다. 그러면 그럴수록 독자와 시청자들은 중요한 문제에 무관심해져 사회적·정치적 참여를 외면하게 된다.
'국가·애국주의 이데올로기' 가득... 이유는?언론이 제공하는 스포츠나 오락에 탐닉하여 국민들이 공공문제 해결에 무성의하거나 대선과 같은 중대 선거를 앞두고 참여와 관심을 회피한다면 이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칫 국민을 우민화, 또는 순응주의에 빠져들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정권시절 3S(스포츠·섹스·스크린)를 '우민화 정책'의 도구로 활용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도 TV와 인터넷 등에서 '3S'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상업주의 원칙과 문화적 순응주의에 길들여져 온 탓이 크다. 게다가 올림픽 같은 대형 스포츠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국가주의와 애국주의까지 곁들여져 있다.
잘 듣고 다시 보라. 올림픽저널리즘의 기사 한 줄, 멘트 하나에도 국가와 애국주의 이데올로기가 가득 묻어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올림픽은 국가대항전이자 거대한 광고대항전이기도 하다. '공식후원'이란 광고문구와 함께 '한국', '대한민국', '우리'라는 단어와 멘트가 유난히 넘쳐난다. 이 기간 동안 광고에 많은 영상과 지면을 아낌없이 할애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상파방송과 보수신문들은 MB정권 출범 초기부터 줄곧 '한편'이란 소릴 들어왔다
천문학적인 혈세를 쏟아 부은 4대강 곳곳에서 냄새가 진동하고, 심지어 간암을 유발하는 남조류 독성이 넘치는데도, 경비용역업체에 노동자들이 폭행을 당해 피와 눈물을 흘리는데도, 여당이 대선을 앞두고 공천헌금 비리로 얼룩져 있는데도 모른 체하며 스포츠 애국주의에 열을 올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들이 숨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