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더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고, 불쾌지수까지 팍팍 올라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피서 계획일랑 애시당초에 접었다. 가족들끼리는 휴일에 영화 한 편 보고 끝내고, 친구들끼리는 시원한 카페에서 수다 떠는 것으로 피서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두 달이 넘는 방학 동안 덥다는 핑계로 피서 한 번 가지 못하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던 차에 일본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산인국제관광협의회와 여행박사의 도움으로 시마네현과 돗토리현 관광지들을 둘러보고, 그 곳에서 열리는 박람회들을 볼 수 있게 된 것. 시마네현과 돗토리현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산인 지방의 시마네현과 돗토리현은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지만,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 지방이다. 지난 7일부터 10일까지 시마네현과 돗토리현을 둘러봤다.
좋은 인연 맺어주는 힘이 충만하다는 '시마네현'
시마네현의 첫 일정은 '마쓰에성'에서 시작됐다. 마쓰에성은 일본 전국에 현존하는 12개의 천수각 중 하나로 산인 지방에서는 유일하다고 했다. 일본의 성을 말로만 들었지 보는 것은 처음이라 더 눈여겨 보게 되었다. 400년이 지났음에도 견고하고 안정된 모습의 마쓰에성은 무척 특이하게 보였다.
나는 마쓰에성보다는 성 주변의 정취가 더 좋았는데, 성에서 내려오면 보이는 호수 호리카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호리카와는 예전부터 물자의 수송이나 사람들의 왕래에 이용되었고, 호수 자체가 도시 전체를 지켜주었다고 했다. 현재 호리카와에서는 유람선을 타고 도시를 구경할 수 있다.
유람선을 통해 일본 특유의 느낌을 체험할 수 있었다. 배 위에서는 옛 무사의 집도 보였고, 지나가는 여고생들도 볼 수 있었다. 유람선 선장이 운행 중에 탑승객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줘 박수를 받기도 했다.
마쓰에성을 둘러본 후에는 이즈모시로 이동해 '신화박람회'를 구경했다. 시마네현은 일본 고대신화의 배경이 되는 지역으로, 고대 신화가 소개된 책 <고사기>가 완성된 지 올해로 1300년이 됐다고 한다. 이것을 기념해 시마네현 전역에서 행사가 열렸는데, 특히 이즈모시에서 집중적으로 '신화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신화박람회에 가는 도중, 나와 함께 했던 가이드는 신화박람회를 설명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믿는 신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일본의 모든 신들이 시마네현에 모여서 회의를 한다"는 얘기라든지, "신들이 묵는 숙박시설도 있다"는 등의 얘기들이었다. "그럼 신들이 모여서 무슨 회의를 하느냐"라고 가이드에게 묻자 "사람들의 인연을 맺어주는 것에 대한 회의를 한다"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내겐 웃음만 나오는 얘기들이었는데, 알고 보니 시마네현은 좋은 인연을 맺어주는 힘이 충만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는 곳곳마다 인연을 맺어주는 장소, 상품, 식당 등이 즐비했다.
신화박람회장 바로 뒤편에는 이즈모타이샤라는 신사가 위치해 있었다. 이즈모타이샤도 '인연'을 관장하는 신을 모시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인연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었다. 이즈모타이샤를 소개하던 가이드는 내게 "운이 좋다"고 표현했다. 이즈모타이샤는 60년에 한 번씩 수리하는데, 곧 수리를 하기 때문에 60년 후에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번에 이즈모타이샤를 보지 못했다면, 아마 평생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더욱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이즈모타이샤까지 둘러본 후에는 근처 유명한 온천 타마쓰쿠리에서 묵었다. 온천 근처에서는 밤에 재즈 공연을 보거나 유카타를 입은 가족들을 볼 수 있다.
돗토리현 국제만화박람회와 '코난거리', 신기하네다음 날에는 시마네현을 뒤로 하고, 돗토리현으로 향했다. 돗토리현에서도 시마네현 못지않게 큰 박람회를 열리고 있었다. '국제만화박람회'가 바로 그것. 이 박람회에서는 돗토리현 출신 세 작가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난>의 작가 아오야마 고쇼, <게게게의 기타로> 작가 미즈키 시게루, <열네 살>의 작가 다니구치 지로가 그 주인공들이다.
박람회에는 엄마나 아빠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이 굉장히 많았다. 아이들은 곳곳에서 만화책을 읽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만화 영상을 보기도 하는 등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박람회의 세 작품 중 <코난>을 가장 좋아했는데, 박람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코난>의 원작자인 아오야마 고쇼의 출생지가 있었다. 출생지에서는 <코난>에 등장하는 발명품이나 트릭을 보고 듣고 체험해 볼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출생지 근처에서는 <코난>의 동상을 볼 수 있는 코난 거리나 실제 열차가 다니는 코난역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돗토리현은 만화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가는 곳곳마다 만화 이야기가 가득했다. 코난 거리나 코난역 말고도 작가 미즈키 시게루의 거리도 볼거리였다. 미즈키 시게루는 전쟁 중 폭격으로 한 팔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재밌는 만화를 많이 그려 유명해진 작가다. 미즈키 시게루 거리에는 그의 기념관도 있었고, 요괴 마을이라고 칭할 만큼 요괴 동상이 굉장히 많았다.
요괴마을에서는 거의 모든 상점이 요괴를 모티브로 해서 꾸며져 있었고, 요괴 모양의 스탬프가 길목마다 구비되어 있어 관광객들이 구경하면서 기념으로 스탬프를 찍기도 했다. 더욱 신기했던 것은 요괴 마을에 '요괴 신사'까지 있었는데 아이들은 신사 앞에 비치되어 있는 요괴의 눈을 보고 경악하기도 했다.
나도 요괴 신사에 들어가 보았는데, 신사에 걸어놓은 목패를 보다가 반가운 글씨를 보기도 했다. 학업성취를 위한 목패였는데, "원하는 서울대 꼭 붙기를"이라는 문구가 써져 있었다.
돗토리현은 유명한 만화 작가들의 거리 외에도 쉽게 볼 수 없는 사구, 모래미술관 등의 관광지도 있었고, 온천도 많았다.
나는 짧은 일정으로 시마네현과 돗토리현을 다녀왔다. 여행 내내 와이파이가 되는 곳을 찾기 힘들어 통신이용의 불편을 겪긴 했지만, 오히려 항상 들고 다니던 핸드폰을 내려놓으니 잊고 살았던 여유를 찾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빡빡했던 일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고, 한국에서 지겹게 듣던 자동차 경적도 들리지 않아 좋았다. 다녀온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벌써 그곳이 그리워진다. 밤마다 온천 근처에서 또각또각 들리던 일본 게다의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