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에 펜팔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여학생이었죠. 우리나라 여배우들에 빗댈 만큼 예뻤죠. 이름이 '케어리 호그리프'였는데, 지금은 영문으로 어떻게 쓰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 학생이 갖고 있던 취미는 승마에다 수영 등 갖가지 고상한 것이었죠. 나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그련 취미 말이죠.
그 학생과 펜팔이 끊겼던 것은 내 인물 사진 때문이었습니다. 내 딴에는 바다 풍경을 하고 있는 노을에 비친 멋진 사진을 보냈었죠. 그게 세 번째 답장이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그 학생이 쓴 편지를 받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참 씁쓸했죠.
그 시절에 펜팔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고등학교 선생님의 지도가 컸죠. 선생님은 주어와 동사와 목적어 정도의 어순만 알고 있던 우리들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줬습니다. 딱히 잘 쓸 필요도 없으니, 펜팔 교본을 보고 그냥 써보라고도 했죠. 어떤 날에는 선생님이 쓴 편지나 다른 친구들이 쓴 편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선생님과도 점점 가까워졌죠.
주상태 선생님이 엮은 <사진아 시가 되라>를 읽고 있자니, 문득 그 추억이 떠올라 몇 자 써보았습니다. 사실 학창 시절에 시를 써본다는 것도 결코 쉽지 않는 일이죠. 영어 단어에다, 수학공식에다, 심지어 소설책 하나 읽는 것으로도 벅찬데, 시까지 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써놓은 이 책의 시들을 읽어보니 꽤나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른들처럼 꾸미거나 뭔가 포장을 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느낌을 시로 읊조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어떤 시는 두 줄로 끝난 것도 있고, 또 다른 시는 한 장 빼곡하게 쓴 시도 있죠. 저마다 자기 주관과 감정을 잘 드러낸 것 같았습니다.
분홍색 아이유 티셔츠에 파랑 반바지에 빨강 줄이 있는 촌스러운 체육복 바지에 하얀색 바통을 움켜쥐고머리카락과 눈썹을 휘날리며 선두를 달리고 있는 1등과이마에 주름이 지고불안해 보이는 얼굴긴장해 온몸이 굳은 채 뛰고 있는 2등과꼴등이라 쪽팔리는지 얼굴도 못 들고5대 5 가르마가 만들어져도죽을힘을 다해 질주하는 표정이 압권인 꼴찌1등·2등·3등누구라 할 것 없이전쟁터에 뛰어가는 장군이 아닌말들처럼 보이는 그들중학교 1학년 이기현 학생이 쓴 <나를 따라라>란 시입니다. 이 시를 읽고 있자니 학창시절에 열심히 운동장을 뛰었던 봄·가을 체육대회가 떠오릅니다. 맨 앞에 뛰는 친구는 얼굴 표정이 밝아 보이고, 그 뒤에서 뛰는 친구는 죽어라 쫓아가고, 세 번째 친구는 창피해서 그런지 얼굴을 숙이고 뛰고 있죠. 어쩌면 이렇게 사실적인 시를 쓸 수 있는지 참 신기합니다.
운동화 부츠구두모두모두 작네난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거지?발도 크고손도 크고나도 저거 신은 적 있는데김하연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쓴 <작은 신발들을 보며>라는 시입니다. 아동화를 파는 가게 앞에서 찍는 사진을 보며, 옛 추억을 떠올리며 쓴 시 같습니다. 지금은 키도 크고 발도 크지만, 그 옛날 앙증맞게 생긴 신발을 신고 다녔던 그 시절을 자연스럽게 회상토록 하고 있죠.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 속에 담긴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쓴 시는 죄다 사진과 관련돼 있는 게 특징입니다. 주상태 선생님은 시 쓰기를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사진을 보고 시를 써보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 책이 나온 계기가 되었고요.
기존의 방식에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시를 해석해주었지만 학생들이 여러 번 시를 읽으면서 스스로 시의 감성을 이해하고, 시 속 주인공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시 속 핵심어를 통하여 파악하도록 한 것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먼저 시를 대하는 학생들이 시가 공부라는 부담이 아니라 스스로 시를 느끼고,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낸 것이 아이들의 시 이해에 더 좋은 결과를 내었다. 그럼에도 시 창작은 아이들이 여전히 힘들어했다. 간헐적으로 사진이나 그림을 이용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중심으로 놓고 시 수업을 진행해보았다.(224쪽)사진을 통해 아이들에게 시를 쓰도록 이끌어 준 주상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단순한 선생님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방학이 끝나면 자신이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을 인화하여 예쁜 엽서를 만들고, 그 밑에 멋진 시도 적어서 아이들에게 선물해준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하나로 묶는 데 있어서, 그것보다 더 좋은 교감을 이루는 길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참 고마운 선생님입니다.
덧붙이는 글 | * <사진아 시가 되라> 주상태 씀, 리더스가이드 펴냄, 2012년 8월, 260쪽, 1만2000원
* 이 기사는 도서포털 리더스가이드에도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