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신공(造化神功) 가야산의 정기를 받고 / 절승경개(絶勝景槪) 수덕산의 정기를 모아 / 금수강산 삼천리 무궁화원에 / 길이길이 빛을 내는 우리 시량리(枾梁里)'(윤봉길 의사가 4·29 상해의거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자신을 찾아온 김구 선생에게 남긴 것으로 알려진 유서에 등장하는 '시량동가(枾梁洞歌)' 1절. 윤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를 향한 애향심을 엿볼 수 있다.)40여년 전에 발간된 계간지에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출신인 매헌 윤봉길 의사의 인간적인 면모와 불같은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소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1976년 외솔회가 발간한 <나라사랑>에서 상해시절 항일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이자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인 고 김홍일(1889~1980) 장군은 4·29 상해의거가 있기 전까지 윤 의사와 겪었던 흥미로운 비화를 공개했다.
김 장군은 독립군의 상해병공창에서 일하면서 제19집단군 사령부 정보국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윤 의사의 폭탄과 나'라는 김 장군의 글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일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상해의거에 관한 기록이다.
김 장군은 한자 한자 써내려 간 문장에서 "거사(상해의거)는 제1탄을 던져 성공하면 제2탄으로는 얼굴에 대고 자폭해야 하는 비장한 계획이었다"며 "나는 백범 선생, 윤 의사와 같이 고창묘에 있는 상해병공창 수류탄 시험장으로 가서 윤 의사로 하여금 폭탄 던지는 연습을 세 차례나 실시케하였다, 1cm 두께의 철판이 부서지는 위력을 보고 윤 의사는 만족한 웃음을 웃으며 기뻐했다, 자기 목숨까지도 빼앗아 갈 폭탄의 위력을 보고 오히려 기뻐하는 윤 의사야말로 진실로 애국의 화신이로구나 하는 감개를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특히 "(상해의거) 폭탄 소리는 중국뿐만아니라 전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필경은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도 독립하게 된 것이다"라며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상해의거가 차지하는 상징성과 의미를 조명했다.
1932년 상해의거에 앞서 자신이 만들기로 한 시계폭탄 제조가 늦어져 상해에 있는 일제의 군용품창고 폭파계획이 좌절된 일도 소개했다.
김 장군은 일제 군용품창고 폭파계획이 무산되자 윤 의사가 "사람이 목숨을 내놓고 국가를 위하여 일하려는데 한 나라 병공창에서 두 주일이 걸려서도 필요한 폭탄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느냐. 정성이 부족해서 일들을 게을리 하였기 때문"이라고 크나큰 불평을 했지만 "대답할 말이 없었다"고 또렷이 기억해 냈다.
또 "나와 김구 선생은 다 같이 나라를 위해 죽을 결심을 한 이상 큰일을 할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올 터이니 이번 일로 낙심 말고 다음의 기회를 기다리자고 애써서 위로했다"고 덧붙였다.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애국애족 뜻을 기려 국어교육과 국어운동을 펼치기 위해 1970년 창립한 외솔회가 발간한 계간 기관지인 <나라사랑> 제25집은 화보, 매헌 논집, 매헌 추억·일화, 매헌 자료집 등 '매헌 윤봉길 특집호'로 꾸며져 있다.
사료를 바탕으로 윤 의사의 구국투쟁과 농촌운동, 생애와 사상, 상해의거의 전모를 다루고 있고, 상해의거 이틀 전에 백범 선생에게 남긴 유서와 유촉시도 담겨 있다.
한편, (사)매헌윤봉길월진회와 '봉길사랑 학습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영우 늘푸른예산21 사무국장이 윤 의사 관련 자료를 수소문하던 중 약 한 달 전 경남 마산의 한 헌책방에 <나라사랑>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어렵게 손에 넣었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