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극장과 모래예술
버스는 아말리아 항구에 선다. 항구 앞으로는 오페라 하우스가 보이고, 뒤로는 아말리엔보리(Amalienborg) 궁전이 보인다. 우리는 먼저 바다 쪽으로 가 오페라 하우스를 건너다본다. 코펜하겐 오페라 하우스는 홀멘 섬에 있으며, 2001년 건설을 시작 2005년 1월에 개장되었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가 헤닝 라슨(Henning Larsen), 연극전문업체 테아트레플란, 음향회사인 아룹 음향, 조명회사인 스피어스 앤 메이저 등이 참여했다.
오페라 하우스는 덴마크 왕립극장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1492명을 수용할 수 있는 주무대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5개 보조 무대를 연결하면 1703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석에는 110명의 연주자가 앉을 수 있으며, 이들이 연주하는 소리가 객석에 아주 잘 전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소리의 울림을 반영해 특별히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아도 유리와 대리석 그리고 금속이 잘 결합된 현대적인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이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한 라슨은 덴마크의 대표적인 건축가로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오페라 하우스 옆에는 새로운 건축을 위해선지 모래가 쌓여있는데, 그 모래로 재미있는 건축물들을 만들었다. 성채로도 보이고 성당으로도 보이고 공공건물로도 보인다.
그곳에 cphsand.com이라는 인터넷 주소가 있어 확인해 보니 2012년 모래조각(Sand sculpture) 축제가 열리고 있는 것이었다. 5월 27일부터 8월 5일까지 '모래로 하나 되는 세상'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으나 찾는 사람들이 많아 9월 2일까지 전시기간이 연장되었다고 한다. 모래조각을 보고는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놀라운 장소가 여기 있구먼." "그것을 보게 되어 정말 행복해." "환상과 동화의 세계야."
내가 보기에도 환상과 동화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 같다. 모래조각전이 열리고 있는 이 해변의 이름은 오펠리아 비치(Ofelia Beach)이다. 이곳에는 현재 20개의 조각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조각은 천지창조, 공룡시대, 로마제국, 중세, 옛날 코펜하겐 모습, 현대, 미래사회 등 다양한 소재를 담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비오는 날에도 모래가 흐트러지지 않는 기술을 개발했으니, 우산만 있으면 항상 모래조각을 즐길 수 있다는 표현이다.
아말리엔보리 궁전과 프레데릭 궁정교회
이들을 보고 우리는 방향을 바꿔 아말리엔보리 왕궁으로 향한다. 아말리아 왕궁은 광장을 중심으로 네 개의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광장의 중앙에는 아말리엔보리궁을 세운 프레데릭 5세(Friederico Quinto)의 동상이 서 있다. 프레데릭 5세는 1746년부터 1766년까지 덴마크를 통치했던 왕으로 7년전쟁(1756~1763)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또한 예술을 사랑해서 1754년 왕립 덴마크 예술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1766년 그가 42세로 세상을 떠나며 남긴 말이 유명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을 공격해 본 적이 없으며, 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로서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말리엔보리 궁은 덴마크 왕실의 겨울 궁전이다. 8각형 광장에 4개의 건물이 대칭 형태로 서 있다. 건물은 바로크에서 로코코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으로 보인다. 아말리엔보리 궁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60년이다. 이들 중 몰트케에 의해 지어진 크리스티안 7세궁은 현재 접견, 의전, 회의 등을 개최하는 궁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레베차우에 의해 지어진 크리스티안 8세 궁은 2011년까지 왕세자 프레데릭(현재 마르그레테 2세 Margrette II 여왕의 아들)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프레데릭 8세 궁은 1934년부터 프레데릭 왕세자(크리스티안 10세의 아들)와 잉그리트(Ingrid) 왕세자비의 궁전이었으며, 프레데릭 왕세자가 프레데릭 9세가 된 1947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들의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1972년 왕대비가 된 잉그리트는 2000년까지 이곳에 살았으며, 그녀가 죽은 후 리노베이션을 거쳐 현재는 프레데릭 왕세자와 메리 왕세자비의 궁전이 되었다.
크리스티안 9세궁은 1967년부터 왕세자비인 마르그레테와 그녀의 남편 헨릭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1972년 아버지 프레데릭 9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마르그레테 2세가 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 이 궁전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는 근위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으며, 여왕이 근무할 때는 정오에 교대식을 한다.
아말리엔보리 궁 북쪽에는 궁정교회인 프레데릭 교회(Frederiks Kirke)가 있다. 돔이 아주 크고 웅장하며 지름이 31m나 된다. 이 교회는 바로크 양식의 대리석 건물로 지어졌으며,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대리석 교회라고도 불린다. 1749년 프레데릭 5세에 의해 공사가 처음 시작되었으나, 1754년 중단되었으며 140년이 지난 1894년에야 완공되었다.
교회의 정면 석주 위에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할 지어다(HERRENS ORD BLIVER EVINDELIG)'라는 덴마크어가 적혀 있다. 그리고 정면 양쪽에는 그룬트비히(Grundtvig: 1783-1872)와 안스가르(Ansgar: 801-865)의 동상이 서 있다. 그룬트비히는 덴마크의 정치가, 교육자, 목사, 철학자, 작가이다. 그는 우리에게 신학자와 민중교육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목사였던 그는 인간이 먼저고, 그리스도가 그 다음이라는 개혁적인 입장에 섰다.
그는 또한 1844년 민간대학(folkehøjskoler)을 처음 세웠다. 이를 통해 국가 주도의 교육을 민간주도의 교육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룬트비히가 강조한 것은 선생과 학생 사이의 소통이었다. 과제를 부여하거나 학점을 부여하지 않고, 질문과 참여를 통해 스스로 배워가는 방식이었다. 질문을 통해 배우고 실습을 통해 체험하는 것이 교육이었다. 또 그룬트비히가 강조한 것은 평생교육이었다.
안스가르는 북유럽에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스칸디나비아 국가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소명으로 알고, 섬나라에 빛을 비추기 위한 구세군이 될 것을 천명한다. 그래서 그는 북방의 사도(Apostle of the North)로 불려진다. 이 교회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인물로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가 있는데, 그는 평생 프레데릭 교회의 건축에 반대했다고 한다.
성 알반 교회와 게피온 분수대궁전과 교회를 보고 나서 우리는 이웃에 있는 처칠공원(Churchillparken)으로 간다. 2차대전 때 덴마크의 해방을 위해 애쓴 처칠을 기리기 위해 1965년 처칠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처칠공원의 한쪽에는 성 알반(Saint Alban)이라는 영국교회가 있다. 1887년 영국풍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방에 제대가 있고, 그 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표현했다.
내 눈에 제대의 세 폭 병풍 조각이 눈에 띈다. 가운데 예수 승천이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는 부활한 예수의 상처를 만져보는 토마스와 유다의 배반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성당의 서쪽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이 성당의 주보성인인 성 알반의 모자이크가 있다. 성 알반은 로마가 영국을 지배할 당시 수도인 베루라미움(Verulamium)의 수비대 군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박해받던 기독교 신부를 숨겨주었고, 그를 통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신부를 체포하려는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성 알반은 자신이 신부복을 입고 신부임을 자처했다. 그로 인해 알반은 체포되었고,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켰고 그로 인해 순교하게 되었다. 알반은 영국 최초의 순교자로 이후 성인이 되었다. 그가 죽은 해는 305년 경으로 추정되며, 1075년 그의 유골이 덴마크의 오덴세로 이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 알반 교회를 나온 우리는 게피온(Gefion) 분수대로 간다. 게피온 분수대는 북유럽의 여신 게피온에 이끌리는 네 마리 황소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분수대는 덴마크의 대표적인 맥주회사 칼스버그 창립 50주년을 기념해서 1908년 이곳 항구에 세워졌다. 원래는 시청 앞 광장에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성채 입구, 성 알반 교회 옆, 항구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1999년부터 5년간 외부 확장공사를 거쳐 2004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게피온과 황소 이야기는 코펜하겐이 위치한 시애란트(Sjæland)섬의 탄생설화와 연관이 있다. 잉링가 전설(Ynglinga saga)에 따르면 스웨덴왕 길피가 게피온에게 하룻밤동안 일군 땅을 주기로 약속을 했다. 이에 게피온은 자신의 네 아들을 황소로 변신시켜 땅을 일구었고, 이 과정에서 나온 흙을 스카니아와 핀섬 사이 덴마크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시애란트 섬과 덴마크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전설로 인해 덴마크 사람들은 게피온을 덴마크의 어머니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
게피온 분수대를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면 항구를 따라 둑방이 만들어져 있다. 둑방에는 꽃밭과 동상이 곳곳에 보인다. 그리고 둑방 아래로는 돌을 쌓아 방파제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이 둑방 안쪽으로는 성채가 있고, 성채가 끝나는 곳쯤 바닷가에는 인어공주 동상이 있다. 우리는 인어공주를 보기 위해 둑방을 따라간다.
인어공주 동상 이야기멀리서도 인어공주 동상이 보이고, 동상 앞 둑방에는 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다. 가까이 가 보니 2단의 돌 위에 청동 인어상을 앉혀놓은 정말 평범한 동상이다. 높이가 1.25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동상이지만 코펜하겐의 명물이고, 1년에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이곳을 찾는다. 인어공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조각가인 에드바르트 에릭센(Edvard Eriksen)이 칼스버그 창업주의 아들인 카를 야콥센으로부터 인어공주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는 인어공주의 모델을 찾았고, 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공연된 발레 <인어공주>의 여주인공을 모델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여주인공이었던 엘렌 프라이스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누드 모델이 되는 것을 거절했다. 그래서 에릭센은 자신의 아내 엘리네의 누드를 엘렌의 얼굴에 접목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인어공주 동상은 1913년 8월 23일 설치되었고, 그 후 여러 번 수난을 겪으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1964년에는 목이 잘린 적이 있고, 1984년에는 오른쪽 팔이 잘린 적이 있다. 1990년에도 목을 자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고, 1996년에 또 다시 목이 잘리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더 수난이 잦아져서 다리가 훼손되기도 하고, 부르카를 걸치기도 하고, 콘돔이 끼워지기도 하고, 페인트가 칠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2010년 상하이 엑스포 때는 덴마크관에 공식적으로 인어공주가 전시되기도 했다. 인어공주는 이처럼 인기가 많아 미국, 캐나다, 루마니아 등에 그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다. 인어공주는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오줌싸개 동상과 함께 도시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들 동상은 관광객들이 보고 나서 가장 실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인어공주를 보고 나서 우리는 코펜하겐을 떠난다. 떠나면서 나는 차창으로 항구 너머로 보이는 구세주 교회를 바라본다.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95m의 첨탑이 눈에 띈다. 이 첨탑에 오르면 코펜하겐 시내는 말할 것도 없고, 스웨덴까지 보인다고 한다. 이제 하늘에 다시 구름이 밀려오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나마 시내관광을 하는 동안 날씨가 맑아서 천만다행이다. 버스는 코펜하겐 시내를 한 바퀴 돈 다음 E47번 도로를 타고 헬싱괴르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