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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쩌나, 안쓰럽게 내려다 보는 성호의 눈빛이 애처롭다.
▲ 비포장길 달려온 배낭 이걸 어쩌나, 안쓰럽게 내려다 보는 성호의 눈빛이 애처롭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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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늡'이라는 산골에 도착했을 때 트럭에 실어간 배낭에는 먼지가 새하얗게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붉은 황톳길을 따라 겨우 스무 채 정도 될까 싶은 나무집들이 있었고, 돼지며 닭이며 개나 오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집과 길과 빨래줄 사이를 드나들고 있었다.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피부가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사람들이 여행학교 아이들이 배낭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동네 사람들이 죄다 나온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우리들이 이 마을에 발을 들인 첫 외국인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이 역시도 '미스터 리' 덕분이다. 라오스 시골마을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방비엥에서 알고 지내는 이의 고향 마을을 소개해준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몇몇 분들이 기금을 모아 그 마을에 우물을 파주었는데, 마침 그 분들이 공사 완공에 맞추어서 방문하게 되어 우리 일행도 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잔치가 벌어졌다. 우물이 생겼고, 마을이 생기고 처음으로 외국인 손님이 방문하였으니 잔치가 없을 수 없다. 돼지를 한 마리 잡는다 하여, 손을 보태는 의미로 한 마리 값을 내겠다고 했더니 한꺼번에 두 마리를 잡기로 했다. 마을 초입에서부터 돌아다니던 돼지들 중에서 두 녀석이 한국에서 온 이방인들의 히늡마을 방문을 이유로 오늘저녁 지상에서의 마지막 생을 다할 모양이다. 

돼지와 닭, 고양이와 개. 우린 모두 다정한 친구
 돼지와 닭, 고양이와 개. 우린 모두 다정한 친구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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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인과 인사를 나누고, 몰려다니는 동네 꼬마들과 눈을 맞추며 아내와 함께 마을을 돌아보는데, 곧 돼지를 잡을 거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운, 영준, 승현, 도솔, 서희 등 여행학교의 '중딩'들이 겁도 없이 돼지 잡는 광경을 보겠다며 몰려간다.

아내와 나도 따라갔으나, 결국 멱을 막 따려는 결정적 장면에서 고개를 돌리고 이장님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 '겁 없는 중딩'들은 그 장면이 생전 처음임이 분명한데도 남김없이 보고 돌아와서 그 처참했던 광경을 생생히 중계하는 냉혹함(?)을 보여주었다.

깃털 같은 어둠이 가볍게 내리고, 이장님 댁 마당에는 커다란 밀주 통 하나가 놓였다. 우리네 단지처럼 생긴 통인데 긴 빨대가 두 개 꽂혔다. 이것이 마을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오래된 전통이란다. 밀주 통을 사이에 두고 이장님과 마주 앉아 빨대로 빨아올려 술을 마시는 것이다. 우물을 파준 분들 다음으로 나도 앉았는데, 달착지근한 맛이 우리 청주와 비길만하다.

처참한 광경 생생히 중계... 겁 없는 '중딩'

형,누나들과 신나게 뛰어놀았다.
▲ 히늡 마을 이장님 손자 형,누나들과 신나게 뛰어놀았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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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인 성호와 희경이가 슬슬 눈치를 살피더니 자리에 앉아 빨대로 밀주를 술술 빨아올리자, 다음에는 대학생인 상훈이와 하영이가 나서고, 이어서 '겁 없는 중딩'들이 앉기 시작하더니 1학년 꼬마들까지도 한 명 빠짐없이 마을 분들과 마주앉아 빨대를 통해 올라오는 밀주의 달착지근함과 이방인에 대한 환영의 마음을 쪽쪽 술술 잘도 마셔댄다. 마을 분들도 아이들의 행동이 귀엽고 재미있는지 왁자지껄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어쩐지, 흐뭇했다. 나중에 이 글을 읽고 청소년들에게 술을 먹였다고 그이의 부모님들이 뭐라 할진 모르겠으나, 난 왠지 좋았다. 그날 아이들의 눈에서 여행의 맛을 느낀 자들 특유의 어떤 자유로움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자신의 느낌, 감정, 생각, 혹은 현재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게, 가장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여주는 중이다. 

그 사이에 마당 한 편에선 꿀꿀거리던 돼지가 어느새 쇠꼬챙이에 꿰어진 고기 덩어리가 되어 노릇노릇 냄새를 날리고, 집안마루와 마당에는 '찐밥'과 고기와 술이 한 상 차려진다. 수저가 없는 밥상. 아이들은 잠시 어색해하지만 저어하지는 않는다. 곧 현지인들처럼 손으로 밥을 주물럭주물럭 거리다가 쏘옥 입으로 가져가고, 돼지털이 숭숭 박힌 고깃덩이도 잘 씹어댄다. 

텔레비전에 선풍기까지... 뜻밖!

자급자족이 아름다운 삶
 자급자족이 아름다운 삶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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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우리들은 3~4명씩 짝을 지어 마을 분들의 집에 가서 잠을 잤다. 아내와 나, 그리고 수경이와 서희가 함께 잔 집에는 할머니 한 분과 여덟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손자가 있었다. 아마도 다른 식구들은 우리에게 잠자리를 양보하고 이웃집으로 가신 듯했다.

집은 나무널판들로 짜졌는데, 통나무 기둥으로 땅바닥에서 1.5미터 정도의 공간을 띄웠다. 낮에 보니 그 아래 공간에서 햇빛을 피해 베를 짜고 지푸라기로 새끼를 꼬는 일을 했다. 실내에는 부엌과 방이 분리되어 있고 방은 두 개가 잇대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의외로 텔레비전이 있다. 전기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더니, 역시 전기가 가는 곳이면 TV는 선발주자로 빠질 수가 없는 모양이다.

나는 방바닥에 놓인 부채가 하도 예뻐 이리저리 돌려보고 부쳐보고 하는데, 할머니께서 손자를 시켜 선풍기를 가져오게 하신다. 더워서 부채를 가지고 논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은 덥지 않았다. 오히려 추웠다. 우리들은 씻지 않아 구린 냄새가 진동을 하는 담요를 두 장씩이나 덮고도 틈이 벌어진 나무널판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새벽녘에는 몸을 떨어야 했으니까.

불평하는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화기애애한 아침 밥상
 화기애애한 아침 밥상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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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그렇게 라오스 산골마을의 첫 이방인이 되어 하룻밤을 보낸 아이들은 '잠들은 잘 잤니?'라는 나의 아침인사에 밤사이의 에피소드를 쏟아놓는다.

"하영 언니가 눈에서 렌즈 빼는데 식구들이 전부 신기해서 쳐다보는 거예요. 무슨 외계인 보듯이."

"저녁 내내 온 가족이 우리만 쳐다보고 계셔서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그냥 난감했어요."

"새벽에 깜짝 놀랐어요. 눈 떴는데 아기들이 우리들을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거예요."

"밤새 닭들이 울었거든요. 알고 보니까 우리 집 사람들이 우리 땜에 닭장에서 잤어요. 그래서 밤새 닭들이 그리 울었던 거였어요."

다들 씩씩하다. 밤새 생겨난 이야기도 많다. 그날 아침, 바람이 있다면 여행이 그들에게 이처럼 많은 이야기로 남았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염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아기가 없어 아쉽고 말이 안 통해 답답했다고는 해도, 잠자리가 춥고 냄새 나고 화장실이 없다고 불평하는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할머니가 아저씨가 아줌마가 자신들을 귀한 손님으로 대해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 아침 나는 우리들의 여행이 그렇게 중반을 지나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고 느꼈다.  

 볼펜 하나도 귀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아이들... 가슴이 먹먹

학교 가는 길
 학교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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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인근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우물을 파준 한국 분들이 이곳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학용품과 축구공을 전달할 계획인데 우리 여행학교 아이들이 함께 가주기를 원했다. 대나무로 엮어 만든 교실로 들어서며 칠판도 공책도 책상도 연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교실환경에 아이들은 당황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나눠줄 볼펜과 공책을 한 아름 쥔 아이들의 손이 작게 흔들렸다. 여행학교 아이들로부터 학용품을 받아든 이곳 아이들은 쉽게 포장지를 뜯지 못했다. 포장지를 뜯은 아이는 또 포장지를 쉽게 버리지 못했다. 볼펜 하나 공책 한 권을 그처럼 귀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이곳 아이들의 태도 앞에서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또 손이 흔들리고 몸이 굳어진다.

무언가를 나누어준다는 기쁨과 함께 왠지 모를 미안함이 그들 눈동자에 겹쳐진다. 나 또한 마음이 무겁다. 다함께 어울려 운동장에서 축구라도 한 판 했으면 좋았을 걸…. 하지만 대한민국 방문자들의 얼굴에 또 미소를 짓게 하는 것도 이곳 아이들이다. 어찌 그리 맑은 눈빛을 하고 있는지, 어찌 그런 싱싱한 웃음을 보여주는지…. 

그날 아침 여행학교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곳의 대나무로 엮어 만든 엉성한 교실과 대한민국의 편리한 현대식 학교를 비교했을까, 아니면 그곳 아이들의 맑고 싱싱한 눈빛이나 미소에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자신들의 힘든 일상을 겹쳐 보았을까. 그도 아니라면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로서는 그 마음들을 다 짐작할 수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든 그날 아침의 풍경은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잊지 못한 한 장면이 되었을 듯싶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햇살과 함께 교실 밖으로..
▲ 라오스의 초등학교 교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햇살과 함께 교실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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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웃음은 어딜 가나 환히 빛난다.
 아이들의 웃음은 어딜 가나 환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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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2~3시간 정도 달리고 어느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 완전 좋음. 동물 완전 많아!!!! 근데 충격적인 걸 목격했다. 돼지를 잡아서 죽이는 걸 내 눈으로 봐버렸다. 근데 오늘 아니면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봤다. 새끼 돼지는 진심 많이 불쌍했다. ㅠ-ㅠ. 그래도 이미 먹어버렸음. ㅋㅋㅋ. 우린 모닥불 주변에서 놀다가 각자 홈스테이를 했다. -김도솔(열여섯 살)

삼촌은 '스티키 라이스(찐밥)' 그 밥이 나올 때마다 쪼물딱쪼물딱 거려서 먹으면 맛있고, 하면 할수록 더 맛있어 진다라고 하시는데 나는 조금은 괜찮을 거 같기도 한데 심하게 하는 건 왠지 찝찝하다고 느껴져서 4~5번 정도만 하는데, 제일 하기 싫은 이유는 바로 저 번에 희경이 누나가 밥을 얼마나 쪼물딱거렸으면 심지어 흰 찰흙 같이 된 것을 봤던 데다가 그걸 반지로 만들기도 하며 노시다가 그걸 또 상훈이 형인가 하영이 누나한테 먹였는데… 아~ 어쨌든 적당하게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였다. -송승현(열다섯 살)   

하… 귀여운 아이 덕분에 울음소리에 4시에 깼다가 겨우 잠이 들었더니 또 5시부터 과장 없이 약 50마리의 닭들이 울어대는 통에 일찍 잠에서 깨어났어. 할 것도 없어서 우물에 씻으러 갔더니 미리 가 계셨던 분들이 바가지를 빌려주셨어. (중략) 학교로 버스를 타고 갔어. 조그만 시골학교 교실 안에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서 수업을 받고 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라구. 아이들은 내가 선물을 들고 갔는데 '사바이디'하고 인사를 건네니까 모두 합창하듯이 '사바이디'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선물을 받았어. -신희경(열여덟 살)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제민일보>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김향미 & 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 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습니다.



태그:#라오스, #여행학교, #히늡, #시속4킬로미터의 행복, #방비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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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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