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사는 친척은 호주에서 온 우리를 위해 여행 안내원을 자처한다. 퇴직한 후 여행 다니며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사진에 대해 나름대로 독학(?)을 한 덕분에 사진에 대해서는 아마추어 경지를 넘어선 듯하다. 다녀본 곳 중에서 우리가 좋아할 만한 곳을 골라 여행 계획을 세운다. 삼일 정도의 여행이다. 광활한 나라 미국을 돌아볼 기회가 온 것이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난다. 첫날 목적지는 시애틀에서 350여 마일(500~600킬로) 떨어진 화산이 폭발했던 국립공원이다. 오랜만에 내가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자동차 여행이다. 도로에 펼쳐지는 풍경을 마음껏 감상한다. 넓은 땅이다. 고속도로 속도 제한은 70마일(110킬로 정도)이지만 거의 모든 차량이 과속으로 달린다.
워싱턴 주를 지나 오레곤 주에 들어선다. 포틀랜드에 있는 장미 공원에 들러 장미 향기에 흠뻑 빠져본다. 시내를 떠나 다시 산으로 들어선다. 도로 주변은 추운 지방에서 볼 수 있는 키 큰 침엽수가 건장한 모습으로 정렬해 있다. 보기만 해도 산림욕을 하는 기분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한눈에 보아도 규모가 큰 댐이 나온다. 디트로이트 댐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깊은 산 속을 흐르는 큰 강줄기를 막아 세운 댐이다. 댐의 높이가 120 미터나 된다고 한다.
차에서 내려 댐을 산책한다. 중국어로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사진을 찍으며 관광을 하는 가족이 있다. 여러 명의 현지인이 호수 쪽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세월을 낚고 있는 한가한 풍경도 보인다. 우리도 거대한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산 냄새, 물 냄새가 가슴으로 밀려온다.
우리를 안내하는 친척은 이 지역을 와 본 적이 있기에 능숙한 여행 안내자처럼 다음 갈 곳을 찾아 나선다. 폭포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산책길도 많고 폭포도 여러 개가 된다. 친척은 갈 길이 멀다며 주차장에서 가까운 폭포로 안내한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오래된 이끼를 배경으로 깊은 숲 속에서 무지개를 만들며 떨어지는 폭포가 눈을 끈다. 사진에 담는다. 아내는 폭포보다 주변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들꽃에 정신을 더 쏟는다.
간단하게 폭포 주위를 산책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얼마나 갔을까? 난생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화산으로 생긴 까만 돌만 보이는 황량한 풍경이다. 오르막을 어느 정도 달리니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에는 짐 싣는 트레일러까지 끌고 다니는 멋진 오토바이 두 대가 있다. 나름대로 멋을 내며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차에서 내리니 디라이트 전망대 라는 푯말과 함께 까만 돌로 쌓아 놓은 전망대가 있다. 아주 특이한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전망대일 것이다. 전망대에 오른다. 바람이 시원하다. 주위는 온통 화산으로 만들어진 까만 돌로 뒤덮여 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싱싱하게 푸르름을 자랑했을 침엽수가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다.
화산이 터질 때 이곳의 모습이 어땠을까? 이 수많은 돌덩이가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화산으로 말미암아 쓸모 없어진 땅이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주차장에는 황량한 화산암을 찾아오는 자동차로 붐빈다.
하룻밤 캠핑을 위해 파울리나 호수 (Paulina Lake)를 찾아 떠난다. 해발 2000 미터 정도에 있는 거대한 호수다. 숭어와 연어가 많이 잡힌다고 소문이 난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캠프장 근처에는 배를 댈 수 있는 선창도 있고 배를 가지고 온 사람이 유난히 많다.
우리도 텐트를 친다. 호수가 있어서인지 높은 지대임에도 모기가 많다. 간신히 모기와 싸워가면서 텐트를 치고 전망대를 자동차로 찾아간다. 캠프장에서 멀지는 않지만 올라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드디어 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다다랐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용암이 흘러 내린 죽음의 땅과 싱싱한 침엽수가 빽빽이 들어선 삶이 넘쳐나는 땅이 선명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삶과 죽음의 극한 대립을 본다. 나도 언젠가는 삶의 경계를 넘어 죽음의 땅으로 들어설 것이다. 지는 해를 마주하며 크게 심호흡을 한다. 바람이 싸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