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월급쟁이지. 법조인으로 자존감 챙긴다고 하면, 그 안에서 살아가기가..."
그는 변호사다. 올해 나이 48세. 한때 잘 나가던 검사였다가 재벌그룹 법무실 임원을 지낸 그다. 2년 전 몇몇 선후배와 조그마한 법무법인을 차렸다. 김정훈(가명)씨는 "(돈)벌이는 예전만큼은 안 되더라도 마음은 편하다"고 말했다. 대기업 변호사로 7년을 일한 그는 "기업이 잘 되기 위해선 정말 그들이 제대로 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에서 공부하고 사법시험을 거쳐 서울중앙지검 검사를 지냈다. 5년여 동안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김 변호사는 "그땐 정말 밤낮으로 공소장을 쳤던 기억만 난다"고 했다. 그리곤 검찰 정기인사 때 속칭 물을 먹었다. "그땐 참 서운했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우연히 학교 선배의 추천으로 기업 사내(社內, in-house) 변호사가 됐다.
국내 4대 재벌 중 하나인 그룹 법무실이었다. 넉넉치 않은 집안 살림과 노부모의 병원비 부담이 컸다. 그는 "검찰복을 벗기가 쉽지만은 않았다"면서도 "경제적 부담 말고도 (선배로부터) 전문성을 키워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역시 달랐다. 그룹의 준법경영 약속은 말그대로 약속일 뿐이었다. 기업 현장에선 잘 먹히지 않았다.
총수 눈치 보고, 기업 이익이 최우선그는 "과거보다는 준법을 더 강조하고 있지만 법무실 역시 중요한 것은 기업의 이익"이라고 했다. 특히 재벌총수와 관련된 사안은 그룹 법무실에서 별도의 팀을 꾸려 따로 챙긴다. 총수의 법적 리스크가 그룹 전체에 끼치는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총수와 직접 관련된 사안은 그룹 차원에서 전방위적으로 대응한다"면서 "법무실뿐 아니라 대외협력부문 등 핵심인사들이 참여하는 팀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전했다. 이들은 검찰을 비롯해 사법부, 정관계와 언론 등과 접촉빈도를 높여가면서, 최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다. 구체적인 법정 공방은 별도의 외부 법무법인에 맡긴다.
국내 대형 로펌 한 관계자는 "삼성을 비롯해 SK 등 주요재벌 사내 법무팀 변호사만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면서 "게다가 최근 기업들이 앞다퉈 준법, 윤리경영을 내세우면서 이들의 그룹 내 입지도 높아졌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법조계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해 놓고도 이들이 그룹 내에서 독립성과 전문성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라며 "오히려 각종 법적 분쟁 해결을 위해 재력을 바탕으로 국내 다른 로펌들에게 종속적 관계를 요구하는 등 횡포를 부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라고 토로했다.
삼성 국내외 변호사, 특허인력 등 1000여 명
실제 삼성의 경우 그룹 미래전략실 산하 준법경영실과 계열사 소속 국내외 변호사는 모두 450명에 달한다. 삼성전자 소속만 270명이다. 2012 삼성전자 지속가능성보고서에 나와 있다. 2010년엔 200명이었다. 1년 만에 70명이나 늘었다.
여기에 특허전문인력만 450명이다. 올해엔 그룹차원 로스쿨 출신 인턴까지 뽑아 쓰고 있다. 이렇게 합하면 삼성그룹 전체 법무인력이 1000여 명이나 된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은 국내외 변호사와 변리사 등 모두 700명 정도다. 사실상 국내 최대 로펌인 셈이다.
삼성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새 글로벌 시장에서 기업들 간 특허 소송 등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크게 늘고 있다"면서 "기업의 미래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이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특허 등 관련 전문인력을 채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 이외 SK, LG그룹 등도 법조인력 확충에 나서고 있다. 최태원 회장이 배임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SK그룹도 변호사 등 300명에 달하는 법조인력을 구축하고 있다. LG그룹 역시 200명에 가까운 사내 변호사가 있다. 특허전문인력의 경우엔 LG전자에서 대거 채용에 나서고 있다. 현재 200명 수준의 특허전문 인력을 2013년까지 30% 이상 끌어올릴 방침이다.
김 변호사는 "최근 몇 년 새 기업을 둘러싼 법적 환경이 매우 급변하고 있다"면서 "국내 문제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과 특허분쟁 등에 대비해 국제 변호사뿐 아니라 변리사 등 전문직에 대한 수요 역시 크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거액 연봉에 갑(甲) 위치로 신분변화?
또 다른 국내대형 로펌의 중견 변호사는 "과거에는 기업의 사내 변호사는 한 수 아래로 생각했었다"면서 "하지만 해당 기업이 거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그들의 영향력도 함께 높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중견 로펌뿐 아니라 연수원의 젊은 변호사들이 대거 삼성 등 기업으로 옮기자, 로펌들의 위기의식도 높아지고 있다. 그는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옮겨가는 쏠림 현상이 크다"면서 "로펌과 비슷한 연봉을 받는 대신, 업무시간도 상대적으로 짧고, 로펌을 상대로 일감을 주는 갑(甲)의 위치로 변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미국, 유럽연합 등과 맺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외국계 로펌까지 국내 시장에 들어오면서 국내 로펌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대형 인수합병이나 소송 등에서 국내 기업들의 외국로펌 선호 현상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국내 로펌들은 해당 외국로펌으로부터 다시 하청을 받아 일을 맡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
이 때문에 법률서비스 분야에서의 무역적자 역시 날로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의 서비스무역 통계 자료를 보면 작년 국내기업과 정부 기관 등이 외국로펌에 지불한 돈이 11억8360만 달러였다. 2010년 10억8360만 달러보다 11.6%나 늘어났다. 하지만 국내 로펌이 외국에서 벌어들인 돈은 6억8090만 달러에 불과했다. 법률서비스 분야에서만 무역적자가 5억270만 달러에 달했다.
날로 거세지는 글로벌 특허전쟁과 재벌총수를 둘러싼 각종 위법 리스크까지…. 대기업 내부 법조 인력의 독립성과 전문성 확보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힘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