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변해 있었다. 기자가 봤던 서울대 총장 시절의 그는 이미 아니었다. 당연했다. 5년 전 야당 대선후보의 물망에 올랐고 현 정부에선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그 스스로 "전보다 숫기가 많이 없어졌다"고 할 정도였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를 11일 오후 서울역 세미나실에서 만났다. 빼곡한 강연 등의 일정 속에 잡은 시간과 장소였다. 이날도 대구로 강연을 떠나기 전이었다. 열차 출발 10분 전까지 1시간 20여 분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정 전 총리는 이미 대선 회오리 속에 들어와 있다. 물론 언론의 표현대로 '군소후보'일 수 있다. 언론 지지율 조사에서 그의 이름을 아예 넣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 전 총리는 "얼마 전 어느 일간지에서 낸 지지율이 0.3%"라고 기자에게 소개했다. 그러면서 "100만 명에 3000명인가? 어휴, 그분들의 지지라도 어디야"라며 웃었다. 정 전 총리 측근은 "5년 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라고도 했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자, 그의 부드러운 말투는 금세 사라졌다. 경제학자로서 한국경제를 이야기할 때는 아쉬움이 배어 나왔다. 대신 정치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자신의 소신을 적극적으로 내비쳤다.
- 5년 전에 비해 이번엔 개인적으로 준비도 많이 하셨다고 하는데."'준비됐다'는 말은 '국정경험을 해봤고, 국정 운영을 위해 정치권과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이런 경험이 없으면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운영하기 쉽지 않겠다는 의미다."
- 따로 신당을 창당한다는 이야기는?"사실무근이다. 제가 무슨 재주로 신당을 만들겠나. 일부 언론에서 그런 것을 추진한다고 했는데, 전혀 아니다."
"박근혜 후보는 친재벌·성장주의에 머물러... 경제민주화도 구호뿐"
곧장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 대해 물었다. 그는 지난 10일 CBS 라디오에 나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왜 그런지 물었다. 정 전 총리는 다소 길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박근혜씨에도 제가 비판적인데요. 세 가지예요.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이 박 후보로는 서민경제를 살릴 수 없다는 겁니다. (박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주창하고 있지만, 양극화와 지속 가능한 사회로 바꿀 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박 후보 정책이념이 친재벌 중심의 성장주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만의 정책 의지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최고지도자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확고한 이념과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박 후보는 그런 것이 부족해 보인다."
- 박 후보 스스로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는데."박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구호로서 빌렸을 뿐이다. 그 결과 구호와 내용이 다른 것이다. 특히 그의 재벌에 대한 인식은 국민과 다르다."
- 어떻게 다른가."(박 후보는) 재벌을 백성을 잘살게 해줄 수 있는 국가의 정책 기제로 보고 있다. 그래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서민 경제를 살릴 수 없음에도 기존 경제력 집중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박근혜는 절대왕정 군주 리더십... 모든 쿠데타 용인하는 사태 올 것"박근혜 후보에 대한 그의 날 선 비판은 계속됐다. 그는 박 후보의 리더십을 두고 "절대왕정의 군주와 같은 리더십"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박 후보의 정치의식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하는 정치를 보면서 형성됐다는 배경을 꼬집기도 했다. 그의 말이다.
"박 후보는 정치를 하면서 아버지의 후광을 받았죠. 그 덕에 '미다스의 손'으로 자리매김했죠. 사실상 보수층의 메시아가 된 겁니다. 그 결과 토의가 없어요. 자신이 결론 내린 것은 모든 것이 옳은 결정이고, 더이상 토론을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그의 리더십은 가부장적 국가주의가 은연중에 몸에 배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죠."그는 "박 후보는 어떤 문제에 대해 먼저 자신의 생각을 발언한 적이 별로 없다"면서 "어떤 미래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 박 후보의 역사인식에 대한 논란이 여전하다. 인혁당 사건을 두고 말들이 많다."(박 후보가) 아버지로부터 손해 보는 게 역사인식이다. 5·16부터 유신 등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한다. 인혁당 사건은 이미 대법원에서 (국가가) 잘못했다고 판결이 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역사에 맡기자는 것은 결국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역사인식을 흐리게 하고 있다."
- 역사인식을 흐리게 하고 있다는 것은."이미 역사는 5·16과 삼선개헌, 유신에 대해 헌정을 강압적으로 중단시킨 쿠데타로 평가했다. 박 후보는 이런 평가를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말로 고치려고 한다. 이런 인식대로라면 앞으로 모든 쿠데타를 용인하는 사태가 온다. 결과가 좋다고 과정이 정당한 것으로 평가돼선 안 된다."
"안 교수 철학과 비슷한 점 많아... 제3세력은 국민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70년대 무엇을 하셨느냐'고 묻자, 정 전 총리는 "60년대에 데모도 많이 했지만, 72년부터는 미국에서 공부를 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 당시 국내에서 민주화 운동 하신 분들에게 빚이 많다"고 말했다. 또 "그분들로 인해 우리가 민주주의를 달성한 것"이라며, "나 스스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왔고, 빚을 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와의 인연도 물었다. "별다른 인연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안 교수의 책을 읽어봤느냐고도 물었다. 정 전 총리는 "읽어봤다"면서 "부분적으로 동반성장 등 비슷한 점이 많이 보였다"고 답했다. 박근혜 후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 다소 조심스러웠다.
- 안철수 교수와 앞으로 만날 용의는."안 교수와 접촉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대선 국면에서 동반성장 가치가 정치권의 핵심 정책기조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안 교수뿐 아니라 다른 후보들과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 제3 세력을 꾸준히 언급해왔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세력을 말하나."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 가치를 실현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현재의 분열적인 정치와 양극화를 심화하는 경제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제3세력은 정치권 안에도 있을 수 있고, 밖에도 있을 수 있다."
그는 "구태를 일삼던 사람이 갑자기 새로운 용어를 쓴다고 제3의 세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면서 "저부터 진정한 제3세력의 일원이 될 수 있는지 반성을 해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제3세력은 국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들은 더이상 지역주의와 진영논리에 이끌리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했다. 인터뷰 내내 그에게선 더이상 경제학자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정치인' 정운찬만이 남아 있었다.
(* 인터뷰 두번째 이야기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