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 의해 기업이 타율적으로 가면 안 된다. 마음으로 승복해야 비로소 달라진다."
이석채 KT 회장이 작심한 듯 정부에 쓴소리를 내뱉었다. 이 회장은 17일 "위에서 룰(규칙)을 바꿀 수 없다"면서 "사회가 따라주면 좋고 안 따라주면 우리 길 가겠다"는 말로 최근 '접시 없는 위성방송(DCS)' 문제로 각을 세워온 방송통신위원회에 직격탄을 날렸다.
"정부가 룰 못 바꿔... 안 따라주면 우리 길 가겠다"KT(회장 이석채)는 이날 오전 광화문 올레스퀘어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콘텐츠 생태계 동반성장 방안'을 발표했다. 3년간 1000억 원 규모 펀드를 조성해 중소 콘텐츠 사업자(CP)와 채널 사업자(PP)를 지원하는 한편 KT 역시 통신회사에서 '미디어 유통 그룹'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다.
협력업체, 소프트웨어(SW)업체에 이어 KT의 세 번째 동반성장 방안이었지만 최근 DCS 문제로 케이블TV 업계와 갈등을 빚고 있는 와중이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방송통신위원회(아래 방통위)에서 지난달 말 위성방송을 IPTV망으로 중계하는 DCS 방식은 위법이라며 서비스를 중단시키자 KT는 낡은 제도로 기술 발전을 막는다며 반발해왔다.
기자들도 이날 DCS 관련 질문을 쏟아냈지만 이 회장은 직답을 피했다. 다만 이 회장은 "난 미래를 향해 얘기한다"면서 "여기서 부딪히는 작은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항해할 때 작은 파도에 불과하다"는 말로 DCS가 어쩔 수 없는 대세임을 강조했다.
아울러 자사 IPTV 서비스인 올레TV 안에 신인 등용 전용 채널을 만들겠다면서 '직접사용채널(직사채널)' 논란에도 다시 불을 지폈다.
이 회장은 이날 "IPTV를 만들 때 꿈이었다"면서 "젊은 연기자들이 자신의 공연 모습을 비출 수 있는 신인 등용 전용 채널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IPTV 직사 채널 운용을 금지한 현행 IPTV법에 대해서도 "3, 4년 후, 5년 뒤를 생각하라"면서 "(그때 돌이켜보면 지금 논란은) 아주 작은 이슈"라는 말로 정부 정책 변화를 주문했다.
정부 규제뿐 아니라 최근 정치권의 통신요금 인하 압박도 간접 비판했다. 실적 개선에 대한 질문에 이 회장은 "KT 자신의 역량으로는 시장을 앞서나가고 있다"면서 "너무 잘 나가니 너무 버는 거 아니냐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퍼포먼스가 나빠진 것"이란 말로 실적 문제를 통신비 인하 탓으로 돌렸다.
특히 이 회장은 "정부 정책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기업들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위에서 룰(규칙)을 바꿀 수 없다"고 정부 정책 무용론을 거론했다. 또 "(우리가 하는 걸) 사회가 따라주면 좋고 안 따라주면 우리 길 가겠다"면서 "정부에 의해 기업이 타율적으로 가면 안 되고 마음으로 승복했을 때 비로소 달라진다"고 꼬집었다.
이 회장이 최근 방통위 체제를 대체할 ICT 통합 정부 부처 출범에 힘을 싣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KT가 IPTV와 위성방송을 앞세워 미디어유통그룹으로 변신하려는 마당에 방송사업자간 공정 경쟁을 중시하는 방통위 구조는 자칫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고자 양심선언 외면... "안에서 삐꺽 소리도 안 나"
이석채 회장은 유독 '생태계'와 '협력'을 강조했다. "항공모함 한 대는 지뢰 한 방에도 무너질 수 있지만 함대는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애플-삼성 간 특허 소송에 대해서도 "애플-삼성 싸움의 문제 의식은 현대 기업 경쟁력이 청출어람처럼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생태계에서 나온다는 것"이라면서 "내가 다 독점하지 않고 공유하고 내가 아닌 생태계가 경쟁력 갖게 하는 것만이 지속 가능한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이처럼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미래 지향성과 동반 성장을 강조했지만 정작 KT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 한 치 앞도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회장은 이날 "6000명을 내보내고 매년 1000명씩 새로 뽑아 젊은이들이 날개를 펼 수 있게 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2008년 말 대량 정리해고 후유증은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다. KT가 회사 차원에서 '부진인력 퇴출 프로그램'을 운영해 온 사실이 최근 고용노동부 조사와 해당 업무를 직접 담당했던 해고자 양심선언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 회장은 "지난 8월 말 조직을 바꿨는데 삐꺽 소리도 안 나고 물 흐르듯이 흐르고 있다"고 밝혔지만 정작 앞서 양심선언 주인공인 박찬성 전 KT 글로벌영업팀장이 같은 시기 광화문 사옥 앞에서 경영진을 비판하는 1인 시위를 벌인 사실은 애써 외면했다. 오히려 이 회장은 이날 SW 가치 구매에 따른 어려움을 토로하며 "주인이 없는 KT에선 뭐 이상한 거 있는 거 아냐 하면 회장이나 간부가 배임 혐의로 고발당할 수도 있다"는 말로 경영진을 두둔했다.
이 회장은 이날 "우리 기업이 기술에서 최고 실력을 인정받은 적이 있나"라면서 "KT에 박수를 쳐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KT는 870만 고객 정보 유출로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인 지 겨우 50일이 지났을 뿐이다. 국가든 개인이든 기업이든 과거와 현재 없는 미래는 없다. 당장 KT에겐 미래보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더 절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