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참으로 많이 흘렀다.
그들을 처음 만난 것이 30년 전이었으니 지금의 물골 노부부가 지금의 내 나이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횡성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갑천중고등학교 앞에서 내리면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한 시간여를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 길의 끝자락 즈음에 분명히 '물골'이라는 마을이 있으며, 거기에서 길 끝과 맞닥뜨리면 부부가 사는 외딴집이 한 채 있을 것이라 했다. 그래, 그때는 노부부가 아니라 부부였다. 이제 막 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이들이었으므로.
평안남도 개천이 할아버지(최문용, 82세)의 고향이며, 해방되기 직전인 1944년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17세가 되던 해에 열다섯 살 꽃 같은 할머니(김영자, 80세)와 혼례를 치렀다.
"지금은 쭈그렁탱이 할망구지만 젊어서는 참 고왔지."그 말에 할머니는 수줍은 듯 배시시 웃음으로 화답한다.
이제 그들은 귀가 순해져 남의 말을 제법 들을 수 있는 나이인 이순(耳順)을 넘기고,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혹은 마음에 따라 살아도 좋은 나이인 종심(從心)도 훌쩍 넘긴 산수(傘壽)의 나이가 되었다. 1944년부터 그곳에서 살았다고 했으니, 거반 70년의 세월을 그곳 외딴집에서 단둘이 살아왔던 것이다.
외로웠을까?
사람을 얼마나 반기던지 강원도를 다녀오는 길이면 멀리 돌아서라도 종종 들르는 곳이 되었다. 그곳에선 그냥 곡식을 쌓아둔 방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있어도 편안했다. 나락을 훔치려는 쥐들이 들락거려도 시골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외양간에 소 몇 마리와 흑염소와 누런 똥개와 마당에 풀어 키우는 닭이 그들의 친구들이었으며, 그들의 재산목록이기도 했다.
어느 해 겨울, 할아버지가 산토끼를 잡아왔다며 탕으로 내왔다. 처음으로 먹어보는 산토끼 요리는 퍽퍽하면서도 질겼다. 내심 기대하고 먹었다가 서울 촌놈이 되어 버렸다.
"서울 양반들은 입이 고급인가 보우. 이 맛있는 토끼탕을 그리 드시는 걸 보니?"고급이라서가 아니라 난생처음 먹어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했지만, 그들에게는 입맛이 까다로운 서울 양반으로 보였을 터이다.
어느 해 가을, 고라니가 농사지은 것을 다 망쳐놓는다며 덫을 놓았는데 내가 그곳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잡혔다고 한다. 마당엔 동네 분들이 모여 고라니 가죽을 벗기고, 생간을 참기름과 소금에 찍어 먹는다. 기겁하며 눈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하는 나를 보며 "다른 고기들도 다 따지고 보면 다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는데 뭘 그리 새삼스럽게…" 했다.
어느 해 여름, 물골에서 십여 분 걸어 내려가면 제법 큰 내가 있는데 그곳에서 천렵했다며 민물고기 매운탕을 양푼그릇에 가득 내왔다. 막걸리 두어 잔에 거나해진 할아버지는 살아온 내력들을 하나둘 풀어놓았다.
그런데 지금도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을 보면, 내 기억력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퍽퍽한 삶의 단편들을 다 기억하고 있으면 상처가 될 것 같아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의도적인 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물골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다 훌쩍 제주도로 떠나 6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육지로 돌아왔다. 잔설이 남은 이른 봄, 물골로 달려갔다. 여전히 외딴 집이었으며,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서울 양반, 이게 얼마 만이야, 연락 좀 하고 살지! 죽었는지 알았어."무슨 정이 있어 이렇게도 반긴단 말인가? 나는 그냥 내 삶에 파묻혀 잊고 살았는데.
뜨끈뜨끈하게 장작불로 데워진 구들장에서 몸을 지지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산책길에 잔설을 녹이고 피어난 선연한 보랏빛 처녀치마 군락지를 만났다. 꽃을 보는 눈이 막 뜨이던 때라 너무도 반가웠다.
노부부에게 물었더니만, "그거 흔하디흔한 거지 뭐" 하며 대수롭지 않은 것에 뭐 그리 관심을 두느냐는 표정이었다. 사계절을 드나들면서, 야생화 마니아들을 유혹할 만한 특별한 것은 찾지 못했지만 나름 강원도 숲 속이 아니라면 만날 수 없는 꽃들을 그곳에서 만났다. 그곳으로 꽃을 만나러 가는 길이면 어김없이 밥 한 끼는 얻어먹고 온다. 돌아오는 길에는 할머니가 바리바리 챙겨주신다. 물론, 나는 받은 것 이상으로 셈을 정확하게 한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사람들 속에 섞여 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그곳이 가장 편안하다고 하는 물골 노부부, 그들의 근력이 자급자족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면 좋으련만 가는 세월은 막지 못하는가 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세월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조금 천천히 가면 좋을 것 같은데, 도시 생활에 시달리다 3년이라는 터울을 두고 물골을 찾아보니 그 사이 몰라보게 늙으셨다.
"이제 쭈그렁탱이가 되어 힘도 없어. 기력이 있어야 농사라도 부치겠는 데 힘이 없어…. 둘 중 하나 죽으면 자식들한테 가든지, 아니면 큰아들이 들어와 여기서 살든지 해야지…."가을 초입에 찾은 물골 노부부의 외딴집, 이제는 외딴집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를 하고 귀농한 부부가 외딴집과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노부부에게 농사를 배우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돌아오는 길은 덜 외로웠다. 혹시라도 노부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늘 걱정을 하며 돌아오곤 했는데 그 걱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