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
평범한 직장인이 40대가 되기 이전에 자기 집을 장만했다는 소식을 가끔 듣는다. 이 말은 '뻥'이다. 억대 연봉자도 아닐 테고, 가사 '우부가'에 나오는 '개똥이'처럼 부모 덕에 호의호식하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리라. 또, 주식과 같은 '불로소득(不勞所得)'에 의거해 돈을 모았거나 이것도 아니라면 은행에서 수천만 원의 대출을 받아 집을 샀던지. 대한민국 서울에서 순전히 월급만 받아 집을 장만한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불로소득에 대한 내 생각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사전적 의미도 그렇고, 이 단어가 주는 뉘앙스도 마찬가지다. 육체적으로 땀을 흘리지 않거나 정신적으로 합당한 사고의 결과물에 따른 보상 정도가 아니라면, 그건 불로소득이다. 정당한 수입이 아닌 것이다. 예컨대 부동산 투기, 주식 투자 등으로 돈을 번 축들은 불로소득자로 분류돼야 마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주식 투자로 축재하는 걸 불로소득이라고 간주하면 많은 사람의 질타를 받겠지만, 내 생각은 요지부동이다. 논밭 등지에서 땀흘려 일하든가, 몇 날 며칠 아니 몇 달 이상을 머리싸매며 나온 정신적 고통의 산물이 정당한 수입원인 것이다.
볼일도 마음 놓고 보기 힘든 무시무시한 곳, 서울
1991년 지방국립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나는 서울 소재 출판사의 부름에 따라 이듬해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무엇보다 이 회사가 이전에 몇 번 투고한 내 글을 인정해주어서였다. 시쳇말로 스카우트였다. 일종의 출세였다.
지인도 거의 없는데다 고향에서 농사짓는 부모에게 손을 또 벌릴 수 없었다. 신경림 시인의 시구처럼,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일'만 해마다 반복하고 있는 부모에게 과연 몇 푼의 돈이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외가쪽 형의 도움을 받아 코딱지만한 작은 방에서 기숙할 수 있었는데, 그 형도 전셋집을 전전하고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자녀가 있던 터여서 그들에게 국영수를 가르쳐준다는 조건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청파동 소재 직장과 구의동 기숙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장에서는 나이가 가장 어렸고 '초짜'나 다름없기에 야근은 다반사였다. 일요일 같은 쉬는 날에도 행사가 있으면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써야 했다. 직장과의 거리도 멀고, 파김치가 돼 퇴근 후 바로 쓰러져 버렸기에 조카들의 학습 도우미가 될 수 없었다. 한 해를 버티다 다시 고향의 부모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기르던 소를 팔아 자녀의 학비를 대주었던 부모는 서울의 직장에 취직한 맏아들에게 또 1700만 원이라는 거금을 건네주었다. 1993년 무렵, 서울 청파동에 1700만 원짜리 전세를 비로소 얻게 된 것이다.
만리동 고개를 넘어가기 전 비탈길에 위치한 전셋집은 1층에 주인이 살고, 2층에 세 가구가 살았는데 화장실이 2층에 하나밖에 없음이 충격적이었다. 당시 나는 혼자였지만, 나머지 두 집은 젊은 부부가 살았는데 특히 출근 가까운 때 그곳 화장실에 앉아는 있었지만, 밖에서 노크하면 그야말로 사색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장실 문제가 이렇게 고통이 될 줄이야! 고향에서는 조금만 달려가면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널려 있는데, 서울은 볼일도 마음 놓고 보기 힘든 곳, 무시무시한 곳으로 서서히 각인되기 시작했다.
3년 후엔가 화장실 공포로부터 탈출해야만 했다. 나에게도 '짝'이 생긴 것이다. 결혼한 후에도 원효로 전세방, 은평구로 직장을 옮긴 후에도 갈현동 전셋집을 전전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현재는 18평짜리 8천만 원 전세! 청약저축 덕에 아파트 당첨이 됐다는 지인들의 소식도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 청약은 단지 저축의 일환이다. 집 뒤편에 수국사가 있고, 피톤치드를 내뱉는 숲이 있으니 나는 고향에는 못 미치지만, 이 삶이 좋다.
유년의 추억이 있는 고향 '자은도'에서 여생 보낼 것
솔직하게 말해, 나는 서울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비교적 정년이 보장된 직장을 62세까지 다니다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보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사람들이 북적이면서 알콩달콩 사는 재미가 있다고, 각종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라며 서울예찬을 하지만, 나는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실내공간에 들어가면 곧 머리가 띵해지기에 두통약을 입에 넣어야만 하고, 아직까지도 6층 이상의 고층에서 5초 이상 밖을 내다보면 속이 울렁거리기만 한다.
지금 서울은 과밀 상태다. 이걸 해소하려고 수도권으로 영역을 확대해 생태친화적 아파트 등을 짓는 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만, 지방에 대한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 지방을 홀대해서는 안 된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관용적 표현을 이제부터라도 바꿔야 할 것이다. 무분별한 '인 서울' 정책에 제동을 걸어야 할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방의 중소도시를 대도시로 탈바꿈하게 해서 한국에는 '서울'이라는 거대도시만 있는 게 아님을 세계인들에게 인지시켜야 할 것이다.
나는 어쩌다 로또와 같은 일확천금의 경우가 생긴다 할지라도, 집은 절대 안 살 것이다. 집은 지금처럼 축재의 수단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누구 말대로, 집은 사는 곳이지 사는 곳이 아니지 않겠는가!
전남 신안군 자은도(慈恩島)가 고향인 나는 여생을 유년의 추억이 있는 그곳에서 보낼 것이다. 맑은 하늘, 푸른 산, 시원한 들판이 있는 그곳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곳이다. 아직도 배를 타고 가야만 하는 오지이지만,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이 오롯하게 살아 숨쉬는 미지의 땅이다. 동양 최대의 돌살, 크고 작은 20여 개 해수욕장, 올레길 못지않은 해넘이길 등이 있어서 사유의 공간으로 최적지이다. 올해에는 서해안에서 가장 깨끗한 해수욕장이 있는 곳, 국제철인3종경기 개최, 전국노래자랑 촬영 등이 열려 외지인들에게 그 비경을 살짝만 보여준 곳.
A형 남자이면서 고소공포증 환자인 나는 정확히 15년 후 서울을 뜰 것이다. 때로는 주인의 눈치도 봐야 하는 등 스트레스를 많이 던져주는 전세로부터도 그때 비로소 해방되리라. 전세라는 단어조차 발 디딜 곳이 없는, 아니 전세의 의미를 잊은 지 오래인 고향사람들과 자은도 고향 집에서 소규모 농사를 짓고, 해넘이길을 걸으며 사유를 즐기다가, 바닷가 주변에서 낚시하는 등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간의 인위성이 가미된 자연도 때에 따라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온통 자연만이 있는 곳에서 사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