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
집에 대한 사람들의 추억은 어떨까. 어떤 이에게는 어머니 품처럼 따뜻한 곳, 어떤 이에게는 지독한 열등감을 갖게 했던 곳, 또 어떤 이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곳일 테다. 이렇게 각자 처해있는 환경, 부모의 경제력,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추억하는 바도 다를 것이다.
내게 있어 집은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방 한 구석처럼 춥고 아팠으며 애잔한 곳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야 했던 집들은 왜 이렇게 비루했던지... 지독한 가난과 아픔은 부모의 원망으로 이어져 내 스스로의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이제야 한 단계 올라서 지난날을 내려다보니 후회스럽기도,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내세울 것 없는 자화상과 같지만, 지금의 나를 키운 원동력이기에 부끄럼 없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는 열심히 일해도 번듯한 내 집 마련이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입자의 현주소와 그 궤를 함께 하기도 한다.
내 집 마련 앞두고 돌아가신 아버지 어렸을 때 기억 중 유달리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게 있다면 '이사'다. 이사라는 단어만 들어도 징글징글하다. 코딱지(?)만한 동네부터 시작해 이곳저곳 이사를 다녔던 기억이다. 식당에 딸린 방, 연탄 때는 집, 연립주택 2곳, 아파트 4곳 등 지금 생각나는 곳만도 8곳이다. 어렸을 때, 학교를 마치고 무심코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가 창피를 당한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에는 이사에 도가 터 여러 권의 책을 단번에 끈으로 묶고, 서랍장은 일일이 테이프로 봉했다. 지금에 와서야 약이 된 경험이지만, 당시에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왜 이사를 자주 해야 했는지 알 리가 없었다. 이후 중학생이 되면서 전세·월세라는 개념을 깨우치고는 알게 됐다. 그동안 2년 혹은 3년 단위로 계약 기간이 끝나면 이사를 했던 것을 말이다.
목수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는 항상 나무 냄새가 나는 분이셨다. 말이 목수지 일은 막노동과 다름없었다. 훤칠한 키(183cm)에 장동건 뺨치는 외모를 자랑하셨지만 옷은 항상 허름했다. 옷 몇 가지를 제외하곤 모두 작업복이다.
오전 5시, 딸랑 커피 한 잔 마시고 출근하셨던 아버지는 자신이 간식으로 받은 빵과 우유를 우리 남매를 위해 매일 같이 갖고 오셨던 그런 분이다. 겨울엔 일거리가 없어 길거리에서 바나나빵 장사를 했던 아버지는 1년 365일 쉬지 않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그렇게 살아오셨다.
중학교 3학년 무렵(1999년)이다. 그때 당시 내가 살았던 김제시에도 신규 아파트가 대거 들어섰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아파트 계약서'를 보여주셨다. 아버지는 "이제 이사 갈 일 없이 평생 여기서 살아야겠다"며 기뻐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당시 아파트 입주 예정일은 3개월 후, 그러나 당시 살던 집은 일주일 후 계약이 만료될 예정이었다.
월세를 더 받고 3개월만 더 살게 해주면 안되겠냐는 아버지의 사정에 주인 내외는 거절로 답했다. 결국 초겨울에 이사를 해야 했던 우리는 임시방편으로 연탄 때는 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3개월만 버티면 된다는 심정으로 추위를 온몸으로 버텼다. 저녁은 말할 것도 없이 한낮에도 추운 그런 집. 길거리에서 바나나빵을 파셨던 아버지의 추위는 집에 와서도 녹지 않았을 것이다.
몸과 마음을 춥게 만든 겨울이 지나고 봄은 소리소문없이 찾아왔다. 아파트 입주일은 예정보다 더뎌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1교시 무용시간에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내 집 마련을 한 달 남겨 놓고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49재가 끝날 무렵 아파트 입주가 시작됐지만, 우리는 들어갈 수 없었다. 새어머니 곁에서 떨어져 나온 우리 남매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 아파트 계약금도 법적인 분쟁을 통해 우리 지분만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학수고대했던, 새 아파트에서 살 수 있다는 꿈은 아버지와 함께 모두 떠나갔다.
그리고 찾아온 새로운 가족과 집, 그곳은 된장찌개 냄새 구수하게 진동하는 따뜻하고 포근한 곳이었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고모집... 아파트보다 더 따뜻했다세상에 둘만 남겨진 남매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넨 분은 다름 아닌 고모였다. 일찍이 홀로 돼 두 명의 자녀를 키우고 계셨던 고모는 뼈다귀탕집을 운영하셨다. 변변한 집은 따로 없었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에서 함께 생활했다. 고모는 그곳으로 우리 남매를 불러들인 것이다. 방이 너무 좁아 기초생활수급자가 살 수 있는 10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를 얻어줬지만 그곳엔 자주 가지 않았다. 깨끗하고 편리하기론 아파트가 단연 좋겠지만, 따뜻하고 편안하기로는 식당에 딸린 방이 더 좋았다. 다섯 식구가 도란도란 티격태격하는 밥상도 따뜻했고, 좁고 불편했지만 한 이불 속에서 체온을 나누는 잠자리도 따뜻했다. 그리고 고모의 꾸지람과 잔소리도 따뜻하고 또 감사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왜 불편한 게 없지 않았겠는가. 10m 떨어져 있는 화장실에 가기가 무서워 밤마다 전쟁을 치렀고, 약간 과장해 엄지손가락만한 바퀴벌레와 매일 밤 사투를 벌였다. 게다가 정신적 고통도 컸다. 여자 홀몸으로 자녀 넷을 키워야 했던 고모는 집주인의 횡포를 온몸으로 버텨야 했다.
고모는 총 네 번 정도 식당을 이전했는데, 한 번은 집주인으로부터 전세금 돌려받지 못해 길거리에 나앉을 뻔했다. 사업 실패로 연락 두절된 집주인을 어렵게 찾아 사정사정해 두 번에 걸쳐 전세금을 돌려받기는 했지만.
또 한 번은 한 집주인 아주머니가 "기물 파손을 했다"는 이유를 대며 임의대로 수리비를 제한 일도 있었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전세금 2천만 원 중 1980만 원만 돌려줬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던 난 집주인 아주머니를 만나 재점검을 요청했고, 막무가내로 못 주겠다고 버티는 그녀와 한바탕 큰 싸움을 치렀다. 옥신각신한 끝에 나는 그녀에게 20만 원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나는 세입자의 서러움과 억울함을 처음 느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이후 나는 사전 점검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부동산을 계약할 때는 꼼꼼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이것저것을 확인했다.
예나 지금이나 집 걱정, 예비세입자의 두려움 커
지금 우리사회의 화두는 '내 집 마련'이다. 이 한 몸 누일 편한 곳이 바로 집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누구네는 이렇게 살고, 누구네는 저렇게 사는데, 우리는...'이라며 집을 나 자신의 척도로 삼는다.
그래서 걱정과 두려움이 쌓인다. 내 나이 29세. 이제 결혼 적령기다. '대개 남성이 마련해야 할 집을 두고 여성이 무슨 고민이냐'고 물어볼 수 도 있겠지만, 그건 소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집 마련은 부부 공동의 책임이다. 무리해서 내 집을 장만하면 어마어마한 대출금과 그 이자 때문에 걱정이고, 전세를 얻자니 부쩍 오른 전세금을 충당할 생각을 하니 또 대출을 찾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월세를 내고 살자니 월세 걱정과 함께 가족과 주변 지인들의 편견에 시달릴 것 같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될 리 만무하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으러 다닐 때마다 더 간절하게 생각나는 것은 내 집 마련을 앞두고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변변한 집 한 채 없지만 자식을 재산으로 생각하고 사는 고모다. 정말 법 없이도 살 것만 같은 아버지와 고모가 '이놈의 집' 때문에 고생하고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안쓰럽고 또 불쌍하다.
그런 아버지를 23일 뵈러 간다. 벌초를 하며 아버지 앞에서 마음을 다잡고 싶다. 내가 사는 곳이 내 집이니 내 집 마련에 목매지 말고, 대출금에 허덕이지 않고, 남과 비교하며 주눅이 들지 않기를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는 세입자다' 공모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