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은 일꾼이었다. 의천은 일을 좋아했고, 일머리를 알았고, 일 처리에 능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일을 해냈다. -<일꾼 의천> 209쪽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오윤희, 불광출판사에서 출판한 <일꾼 의천>의 저자인 오윤희는 대각국사 의천을 '일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의천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왕자 출신으로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천태종 개창조입니다. 11세 되던 1065년에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에게 출가하여 그해 구족계를 받고 13세 되던 1067년에 고려 시대 최고 승직(僧職)인 승통(僧統)에 올랐습니다.
왕자 출신, 13살에 최고 승직인 승통에 오른 의천은 낙하산? 출가한 지 불과 3년, 아직은 앳된 13세의 나이에 최고의 승직인 승통에 오르는데 왕자라는 신분이 영향을 끼쳤다면 고려시대의 승통은 낙하산 승통, 권력을 등에 업고 오를 수 있는 낙하산 승통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의천이 후대에 대각국사라는 시호로 추앙받고, 오윤희 같은 불교학자들에 의하여 '일꾼'으로 불리는 것은 의천이 산 삶, 의천이 남긴 업적이 역사가 기릴 만큼 위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생각됩니다.
의천은 책을 만들던 사람이었다. 의천이 생전에 했던 숱한 일들, 책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 모든 일의 바탕에 책이 있었고, 책에 대한 일관된 목표와 신념이 있었다. 의천은 책을 만드는 일을 사명으로 삼았고 본원으로 삼았다. 하지만 책을 만드는 일, 특별 할 것도 없다. 문자가 생기니 이후로 책을 만드는 일도, 책을 만드는 사람도 끊어진 적이 없다. 책을 만들던 의천, 그런 일을 주목하는 까닭은 그의 일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목적도, 목표도, 방법도 모두가 남달랐다. 그래서 의의 일을 두고 '공전(空前)'이라는 수식어를 보태 칭찬하는 것이다. -<일꾼 의천> 365쪽
교장 수집을 발원한 의천은 31세가 되던 1085년에 송나라로 들어가 14개월 동안 머물며 송나라의 지도자급 승려들을 만나고, 불서 발행에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합니다.
송나라에서 귀국한 의천은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 <신집원종문류>, <석원사림>, <간정성유식론단과>, <신편제종교장총록> 등을 편찬했으며, 불교역사 이래 최초로 <속장경>을 간행하였습니다.
송나라에 들어가서조차 송나라 관료인 양걸(楊傑)의 안내를 받으며 유행하고, 혜인원에 머물 때는 불교전적 7500여 권을 기증할 정도로 재정적 영향력을 발휘한 의천이었기에 의천의 행각은 여느 구법자들의 행각과는 많이 다릅니다.
의천이 신분이 그랬고, 의천의 행각이 이러했기에 의천의 수행이력이 선지적이지 않고 남긴 업적이 위대하지 않았다면 의천에 대한 후대 평가는 현재까지의 평가, '대각국사'나 '일꾼'으로 호칭되는 평가와는 사뭇 달라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송나라로 유학을 가는 의천의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의천은 송나라에 유학할 것을 결심하고 국왕에게 요청했지만 거절당합니다. 하지만 의천은 유학에 대한 결심을 굽히지 않고 이듬해 5월에 왕과 태후에게 편지를 남기고 제자 수개(壽介)를 데리고 몰래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대각국사 의천이 목숨을 걸고 송나라로 간 이유는?이것이 의천이 목숨을 걸고라도 꼭 송나라로 가야만 하는 이유였다. 그가 부여받고 자임했던 불교의 길, 그 길의 구색을 갖추고 제자리를 잡아 주는 일이었다. 유통이 끊긴 '삼장(三藏)의 정문(正文)'과 헤아릴 수조차 없는 '백가(百家)의 장소(章疎)', 이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완비하는 일이었다. 의천은 이런 일을 통해 불교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불교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 또한 나라의 구색을 갖추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꾼 의천> 194쪽국왕의 허락하지 않는 유학, 풍랑을 거스르는 배에서 몇 개월씩이나 목숨을 걸어야만 갈 수 있는 송나라로 의천이 유학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삼장(三藏)의 정문(正文)'과 헤아릴 수조차 없는 '백가(百家)의 장소(章疎)', 이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완비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천은 계획(이유)을 실천으로 옮기고, 실천은 불교역사 이래 최초로 간행되는 <속장경>과 엄청난 수의 교장(敎藏)을 출간하는 결실로 이어집니다.
의천은 47세가 되는 1101년 10월 5일 숨을 거둡니다. 의천은 삶은 부처에 버금가는 대각(大覺)이었고, 남긴 업적 또한 지대하지만 900여 년 전 인물인 의천이 한국 불교사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900여 년 전 송나라 선종에 대한 의천의 비판이 선종을 주창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되거나 현재진행형으로 잔재하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송나라 선종에 대한 의천의 비판은 두 가지 측면으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선과 교의 관계다. 선이 교, 곧 부처님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인지에 대한 회의다. 선종이 불교라면 응당 불교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의천에 따르자면 예전의 선종은 그랬었는데, 지금의 선종은 불교의 가르침을 벗어났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하여 의천의 표현은 더할 나위없이 단호하다. 당대 송나라의 선종은 불교도 아니라는 뜻이다. 둘째는 실천에 관한 문제다. 선은 수행이다. 행동이다. 의천은 선사들이 수행을 등한시 하고 입에 발린 말만을 앞세우는 현실을 비판한다. 말에 집착하여 내용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한다. 가르침을 벗어나 속이고 기만하는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한다. 의천이 만났던 선사들, 그들의 말은 화려했지만 의천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 의천이 찾던 사람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일꾼 의천> 65쪽여름 벌레가 겨울의 얼음을 이야기 할 수 없고, 우물안 개구리라 큰 바다를 이야기 할 수 없는 세태, 의천은 그런 세태를 뒤집고자 했다. 그가 자임한 일은 불교 안의 일이었다. 불교를 먼저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의천의 일을 혁명이나 개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의 혁명은 책의 혁명이었고, 읽기의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꾼 의천> 404쪽
불교전문 계간 평론지인 <불교평론>이 폐간 된다고 합니다. 2012년 가을호에 민족사 대표 윤창화가 쓴 '경허의 주색과 삼수갑산'이란 글을 문제 삼아 폐간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현대판 분서갱유'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의천에게 <불교평론> 폐간에 대해 물으면 어떤 답할까? 분명한 다른 이유 없이 귀에 거슬리는 정도의 비판, 시시비비가 따를 수 있는 논쟁적인 글을 게재했다는 이유가 폐간의 단지 이유라면 한국불교의 언로에 비춰지는 한국불교의 미래, 만행인지 독단인지가 구분되지 않는 한국불교의 언로는 너무도 절망적입니다.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오윤희가 불광출판사에서 출판한 <일꾼 의천>을 통하여 전하거나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일꾼으로서의 의천, 의천이 이룬 업적의 토대를 조명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에 집착하여 내용을 잃어버리고 있는 한국불교에 대한 통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의천이 말한바와 같이 선은 수행이고 행동입니다. '삼장(三藏)의 정문(正文)'과 헤아릴 수조차 없는 '백가(百家)의 장소(章疎)'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려고 했던 의천에게, 선을 주창하고 있는 한국불교 유력종파에서 <불교평론>의 폐간이 회자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지가 무척이나 궁금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일꾼 의천>┃글 오윤희┃ 펴낸곳 불광출판사┃2012.09.20┃값 2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