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다가옵니다. 처가에 다녀와야지요. 지금은 자연스럽게 처가에 갑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처가에 가기 영 불편했습니다. 아내의 고향인 광양으로 차를 몰 때면 괜스레 다리에 힘이 없거나 머리가 아파 왔죠. 왜냐하면 신혼 초에 겪은 일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십 년 전 일입니다. 깨 쏟아지는 신혼생활을 하고 있던 중 추석을 맞았습니다. 처가에서도 하룻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내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었고 저는 양복을 걸쳤죠. 조금 긴장된 마음으로 처가를 향했습니다. 아내가 차 안에서 말하더군요. 들러야 할 곳이 많으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요.
뒤늦게 안 사실입니다만 장인과 장모님은 한 마을에서 결혼한 사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내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만큼 들러야 할 곳도 많겠지요. 아내가 차안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외가와 친가의 가족관계를 자세히 설명해주더군요.
고령에도 건강하신 작은집 할머니를 시작으로 큰아버지와 고모들 그리고 세 명의 외사촌 오빠들까지 기억해야 한답니다. 아내 입에서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름을 헤아리니 스무 명이 넘습니다. 결혼식 때 잠깐 얼굴을 봤을 뿐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머릿속에 집어넣을지 답답합니다.
아내의 친절한 설명에도 기억은 가물가물아내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친척들을 얼굴과 함께 기억하랍니다. 어른들께 큰절한 후 건강을 여쭈어야 하는데 앞에 앉은 분이 누군지 모르면 예의 없는 사위로 입에 오를 테니까요. 때문에 아내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친절하게(?) 가족관계를 설명하더군요.
반면, 제 머리는 아내의 기대와는 반대로 점점 뒤죽박죽으로 변해갔습니다. 천재도 아닌 제가 짧은 시간동안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을 외운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죠. 운전대를 잡고 반복해서 외웠지만 소용없더군요. 잠깐 딴생각을 하면 아내의 친척들은 몽땅 제 머리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렇게 진땀 빼며 머릿속에 사람 얼굴을 채워 넣으며 처가에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을 본 장모님은 서둘러 어른들께 인사하고 오라며 짐을 풀기도 전에 등을 떠밀었습니다. 가장 먼저 작은집 할머니부터 찾아뵈었죠. 큰절 올리고 안부를 여쭈었습니다. 물론 건강하셨지요.
그리고 다음 집을 향했습니다. 이때까지는 별 일 없었죠. 큰아버지 집과 고모 네도 들렀습니다. 문제는 추석이라 가는 곳마다 상다리가 휘도록 푸짐한 음식을 내놓는 겁니다. 추석을 맞아 처가를 찾은 사위에게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스무 번 넘게 먹는 음식, 넘치는 정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스무 곳이 넘는 집을 오가다 보니 먹고 마신 음식들이 뱃속을 압박해 왔습니다. 몸이 점점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로 변해갔지요. 아내의 친척들은 음식을 조금만 입에 넣으면 맛이 없어서 그러냐며 좀 더 먹으라고 심각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럴 때는 정말 넘치는 정이 원망스럽더군요.
결국, 어쩔 수 없이 상 위에 오른 음식을 싹 입속에 쓸어 넣고 집을 나서기를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배를 움켜쥐고 인사를 드리러 온 동네를 싸돌아 다녔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뱃속에 온갖 음식을 가득 채우고 경사진 길을 수차례 오르내리면 어떤 상태가 되겠어요.
다리에 힘이 점점 빠지고 있었습니다. 엎친 데 덮쳐 어른들 앞에서 큰 절 올리려고 허리를 굽히면 뱃속 음식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더군요. 애써 참으면 얼굴이 붉어져 어른들 앞에서 민망했습니다. 그 상태가 이어지다 보니 뱃속도 거북한데 다리까지 풀리더군요.
이 지경에 이르자 머리까지 멍해졌습니다. 그렇게 큰절 행진을 마무리하려는데 아내가 마지막 한 집을 꼭 들러야 한답니다. 외삼촌에게 인사드려야 한답니다. 그곳에는 세 명의 외사촌오빠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죠. 집에 들러 아내의 외삼촌을 향해 큰절을 올렸습니다.
떨리는 다리 보며 너무 긴장하지 말라니... 누구 약 올리나?이제 풀렸던 다리가 떨리기까지 합니다. 눈치 없는(?) 아내는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속삭이더군요. 속으로 외쳤습니다. 누구 약을 올리나? 그 집에서 또 음식을 먹었습니다.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 앞에서 세 명의 외사촌오빠들이 저를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던지더군요.
음식을 정성껏 차려 놓았으니 함께 먹고 마시자고 했죠. 깊은 뜻은 따로 있었겠지요. 여러 집을 돌며 음식을 실컷 먹었을 텐데 우리 집 음식까지 먹고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는 심산 아니겠어요? 왜 있잖아요. 남자들만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 비슷한 행동 말이에요.
저는 그날 자존심을 깨끗이 접고 기 싸움에서 질 생각이었습니다. 더 이상 음식 들어갈 곳 없는 배를 만지며 살짝 엉덩이를 뒤로 뺐죠. 그때 사촌오빠 한 분이 거부할 수 없는 말을 던지더군요.
"자네 덩치를 보니 웬만큼 먹어서는 간에 기별도 없겠네. 많이 차려 놓았으니 맘껏 먹게. 우리는 자네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네. 설마 벌써 집에 가려는 건 아니겠지?"그곳에서 또 다시 배에 음식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집을 나오는데 다리가 확 풀려 버리더군요. 그 후부터 몇 년간 처가에 가려고만 하면 다리와 머리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머리로는 처가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거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전어회 준비했네"... 처가로 달려갑니다하지만 그 증상도 10년의 세월이 쌓이면서 점점 사라지더군요. 지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처가에 갑니다. 딱 한 가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있습니다. 처가에 들러 인사를 나누다 보면 여전히 누가 누구인지 헷갈립니다. 그럴 때면 저만의 노하우를 발휘하죠.
일단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눈에 띄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큰 소리로 인사합니다. 그러면 백발백중 "황서방 왔는가"하고 반갑게 맞아주시죠. 그리고 가던 길을 재촉해 걸어갑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친척과 인척이니 무조건 인사하면 그만입니다.
반면, 그분들은 저를 잘 기억하고 있겠지요. 한 사람이 스무 명을 기억하는 일은 어렵지만 스무 명이 사위 한 사람 기억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 아니겠어요. 요즘도 처가에 들르면 처가댁 위쪽에 살고 있는 세 명의 외사촌오빠들이 반갑게 저를 맞아줍니다.
큰 상에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저를 부르죠. 올 추석에도 처가에 들르면 이런 소리를 듣겠지요? "어이, 황서방 오늘은 전어회를 준비했네 이쪽으로 올라오소"라고 말이죠. 그 구수한 소리를 듣고 싶어 추석에 빨리 처가로 달려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