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군 한산면에 위치한 한산전통시장에는 장인들의 예술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한다(韓多)공방'이 있다. 작년 4월 개점한 이 공방은 시장의 유휴공간인 새벽모시시장 건물 일부를 활용, 오랜 세월 공예를 만들어온 장인들의 작품을 직접 만나 볼 수 있는 새로운 문화공간이다.
솟대, 짚불공예, 대장간의 농기구, 무형문화재 공작선, 천연비누와 천연염색, 함석 등의 공예품이 전시된 한다공방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한산의 예술을 만나는 뜻깊은 곳이다. 무엇보다 노년층이 주축이 돼 한산의 예술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한산의 다양한 문화가치를 뜻하는 한다(韓多). 최고의 장인들을 만나러 한다공방으로 향했다. 그것에선 충남무형문화재 21호 서천부채장 기능보유자 이광구(67세) 장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한 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그 옛날 부채만 한 것이 없었다. 더욱이 우리의 부채는 조선시대를 거슬러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특산품으로 그 역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197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고 선풍기와 에어컨이 보급되면서 부채는 현대기술에 밀려 점차 사라져갔다. 게다가 1988년 이후 값싼 중국제 부채가 유입되면서 점차 부채를 찾는 사람들도 줄어들어갔다.
부채의 이용이 줄어들면서 제작하는 기능 또한 사라져갈 위기에 처하자 문화재관리국이 나섰다. 전국에서 부채를 제작하는 장인들을 조사한 것이다. 그때 전통공예 계승자로 지목된 이한규 전 보유자(1917년~2006년)가 충남무형문화재 제21호 서천부채장으로 지정되었고, 그의 아들 이광구 장인이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오일장(1일, 6일, 11일, 16일, 21일, 26일)이 열리는 날. 장인들이 순번을 정해 당직을 서고 있는데 오늘은 이들이 당번이란다. 때마침 어제 저녁, 서울 북촌한옥마을에서 주문이 들어왔단다. 덕분에 부채제작과정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근래에 와서 서천부채가 인기가 많아. 남대문시장, 이태원 할 것 없이 주문이 많이 들어오지. 10년 전에 이런 인기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수. 요즘 같아서는 주문은 많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힘들어. 그래도 서천부채의 가치를 알아주시고 찾아주시니 감사하지…." 작년 한다공방의 개점과 함께 서천부채의 가치가 재조명받고 있다. 서천부채 공작선(孔雀扇)은 서천군 특산품으로 예로부터 벽걸이 장식으로 쓰였다. 공작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부채자루와 활짝 편 날개 모양의 부채살이 한데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광구 보유자가 만든 이 공작선은 증조부 이군중, 조부 이을용, 부친 이한규를 거쳐 4대째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부친이 1997년 충남무형문화재 제21호 서천부채장 보유자로 인정되면서 그는 전수교육보조자로 활동했다.
2006년 부친의 사후 그가 보유자(2008년)로 인정된 이후부터 공작선을 비롯 수요가 비교적 많은 선녀선, 화봉선, 산봉선 등을 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인과 함께 1남 3녀 중 막내인 이형복씨와 셋째 사위 유방석씨에게 공작선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부채 만드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이광구 장인. 그가 기억하는 부채 전성기는 1982년부터 1988년(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영향)까지다. 이때는 각종 부채의 수요가 많아 초등학교 다니던 자녀들까지 총동원하여 밤잠을 잘 틈도 없이 부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인기 많던 부채는 1988년 값싼 중국제 부채가 유입되면서 점차 주문도 줄고 일이 끊겨 자연히 수입도 줄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자라고 학비는 들어가는데 부채는 안 팔리고 사람 죽겠더구만. 그래서 아버님은 부채 만들고, 안사람이랑 나랑은 일을 했지. 서천군청에 들어가 미화원도 하고, 위생원도 했어. 그렇게 10년을 일했지. 그러던 중 아버님이 덜컥 앓아 누우신 거야. 그때부터 내가 다시 부채를 잡았지." 1993년 전승공예대전 선녀선 입선, 1994년 전국공예품경진대회 공작선 수상 등 부친에게 배운 기술로 다수의 작품을 인정받은 그는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 지난 45년간 이한규옹이 사용하던 부채의 재료와 제작도구, 제작기술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예전에는 먹고살기 위해 부채를 만들었는데…. 이젠 부채 하나 만드는 데도 책임감이 들어. 그만큼 내 역할이 막중한 게지. 나이 먹고 무슨 욕심이 있겠어. 하나라도 더 좋은 작품 만드는 게 남은 여생 내 몫이지…."
인터뷰를 마치고 한동안 그의 작품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장인정신이란 이런 걸까. 그를 닮은 소박하고 우아한 공작선 하나만으로도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영광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