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제 여행의 종반부다. 이 문명기행의 마지막 유적지는 알렉산드리아다.

우리 일행은 1월 20일 아침 일찍 크루즈에서 나와 공항으로 달려 갔다. 카이로까지는 비행기로, 거기에서는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살인적인 카이로의 교통체증을 감수하면서 4시간 이상 달려 오후 3시경 알렉산드리아 시내로 진입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다시 카이로로 귀환하는 일정이었다. 단 몇 시간의 알렉산드리아 관광을 위해 8시간 이상 버스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패키지여행을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행 중에도 불평이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곳은 갈 만한 곳이다. 가지 않으면 후회가 되는 곳이 아닌가.

알렉산드리아 시내에 있는 로마제국 시대의 원형 극장이다.
 알렉산드리아 시내에 있는 로마제국 시대의 원형 극장이다.
ⓒ 박찬운

관련사진보기


알렉산드리아가 어떤 도시인가. 역사는 이 도시가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이 만든 도시로 기록한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손에 넣은 그는 그 이듬해에 이집트로 들어와 페르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이집트식 파라오가 된다. 나일강변의 여러 신전을 돌아다니며 파라오의 권위를 보여준 그는 마침내 나일강 하구의 지중해변에 도착한다. 그곳은 자신의 고향이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였다. 그는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만들 것을 명령한다. 그것이 알렉산드리아의 시작이다.

이곳은 동방과 서방이 만나는 곳이고 이집트의 물산이 유럽의 곳곳으로 퍼지는 지리적 요충이다. 알렉산더가 요절하자 이곳은 그의 부하 프톨레마이오스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며 그 수도가 된다. 본격적인 헬레니즘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시절에는 이 도시는 세계 최고의 도시로 성장한다. 도서관이 만들어지고, 학교가 설립된다. 특히 자연과학과 의학은 최고 수준을 자랑하였다. 그래서 주변국에서도, 저 멀리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젊은이들이 지중해를 건너와 이곳으로 유학을 왔다.

로마가 지중해의 패자가 되면서 이집트의 운명도, 알렉산드리아의 운명도 달라진다.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으면서 그의 정적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곳까지 왔다가 클레오파트라를 만난다. 그는 이곳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는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갑자기 암살되자 클레오파트라의 운명도 달라진다. 이제는 카이사르의 부하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동반자가 된다. 하지만 그도 끝내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제거된다.

이제 운명의 신은 그녀를 떠났다. 마침내 그녀는 알렉산드리아 그녀의 궁성에서 스스로 자결을 선택한다. 이것이 간단한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제국 간의 관계다. 그러니 이곳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제국을 만든 영웅들이 모두 한 번쯤은 왔던 곳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에 비하여 결코 뒤지는 곳이 아니었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면 카이사르도,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도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이집트에 들어올 때 이 나라의 위용에 자못 놀랐을 것이다.

세계 최대의 파로스 등대가 불을 밝히고 있고, 세계 최대의 도서관에서는 수많은 학자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욱 이들 모두가 한 번쯤은 여행했을 나일 크루즈에서 보았던 그 경이로운 신전들…. 아마도 이집트가 자기들 조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역사를 가진 곳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동경의 무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은 로마제국 치하에서도 단순한 로마의 속주가 아니라 황제의 직속령이었다. 그만큼 이집트가 특별한 나라였다는 반증이다.

이런 알렉산드리아이기 때문에 그 없는 시간, 그 무리한 일정 속에서도 이곳은 올 만한 곳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도시에 들어오는 순간 실망스럽다. 과거의 영화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도 이집트 제2의 도시라고 하지만 위엄도 없고 화려함도 없다. 그저 평범한 중동의 도시에 불과하다. 지하의 클레오파트라가 슬퍼할 도시가 되어 버렸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하더니 조상만한 후손이 없다.

우선 우리가 가본 곳은 최근에 발굴된 콤엘디크 원형극장이다. 폴란드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1990년대에 발굴되었는데, 기원후 3세기경 로마제국 치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담한 사이즈의 원형극장이다. 지금도 극장의 중앙 표시 돌에 서서 말을 하면 공명이 다르다. 마이크가 없이도 수백 명의 사람에게 배우들의 음성이 전달되었다는 증거다.

파로스 등대 자리에 세워진 카이트베이 요새의 모습이다. 지금은 해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파로스 등대 자리에 세워진 카이트베이 요새의 모습이다. 지금은 해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박찬운

관련사진보기


다음은 헬레니즘 시대에 축조되어 한때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칭송되던 파로스 등대 자리를 찾았다. 지금은 그 자리에 카이트베이 요새가 자리 잡고 있다. 파로스 등대. 이것이 무엇인가. 등대를 만든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다. 그러니 기원전 280년경이다. 그는 이곳 알렉산드리아 해변 한편에 당시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대형 등대를 만들었다. 높이 130여 미터,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서도 그 등대의 불빛이 보였다고 한다. 등대는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제국 시대까지, 그 뒤를 이어 이슬람 세력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도 건재했다.

그러나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아무리 견고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등대는 14세기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물속으로 들어갔다. 가끔 그 잔해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된다고 한다. 15세기 이슬람 세력은 이곳에 등대의 잔해물을 이용해 요새를 짓는다. 그것이 바로 카이트베이다. 현재는 해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이곳을 찾아간 때는 저녁 무렵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해변가에서 놀고 있다. 아이들은 축구도 하고, 어른들은 낚시를 한다. 요새는 파도를 맞으며 지난 700년의 역사를 잘 견뎌온 듯 늠름하게 서 있다.

2002년 개관한 현대식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까.
 2002년 개관한 현대식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까.
ⓒ 박찬운

관련사진보기


카이로로 오는 길에 우리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찾았다. 2002년 개관한 현대식 도서관이다. 바로 이 자리에 헬레니즘 시절 세계 최고의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다. 당시 이곳은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떤 자료에 보면 100만 권이라고 한다. 과장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책은 모두 파피루스였기 때문에 대단히 귀했다. 서양세계의 모든 책을 다 모은다 해도 몇만 권이 되기 어려웠다.

여하튼 이곳은 당시 지구의 반쪽에 해당하는 유럽과 근동(Near East) 지방의 모든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오는 배에 실린 책은 무조건 도서관에 제출되어야 했고, 도서관에는 이를 필사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때때로 원본은 돌려주지 않고 필사본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식으로 장서를 모았다고 한다.

헬레니즘 시절 수많은 학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이곳의 학자들이 발견하였고 그것에 기해 지구의 둘레를 정확히 계산해 낸 것도 바로 이곳이다. 기원전 2세기 말 도서관장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 둘레를 계산한 것은 수학사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그는 정오를 기준으로 알렉산드리아와 아스완(당시 시에나) 사이에 그림자 각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알렉산드리아와 아스완 사이의 거리를 실측한 다음 지구 둘레를 계산해 낸 인물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던 헬레니즘 최고의 학문의 전당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 없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면서 부주의로 불을 냈다고 하는데 이를 믿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헬레니즘 시대를 지나 도서관은 점점 쇠퇴했지만 이슬람이 들어 온 7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서관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완전히 불타 버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새로운 도서관은 21세기형 최첨단 도서관이었다. 아직 장서는 보잘것없다고 하지만 인류의 지혜가 결집하여 그 옛날 인류의 지식창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기념하여 멋있는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하얀 화강석 외벽에는 120여 개 문자가 쓰여 있다. 한글도 있다. 이국땅에서, 그것도 문명사에 길이 남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만나는 한글을 보니 반가웠다.

여행을 마치며... 바하리아 사막 여행

이렇게 해서 나일문명기행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 일행에게는 이집트에서 마지막 여행이 덤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관광이다.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바하리야 백사막을 간 것이다.

이집트는 전 국토의 95%가 사막이다. 그런데 사막이 삭막할 것만 같은데 자연미로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2010년 실크로드 여행에서 사막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돈황의 명사산, 선선의 쿠무타크 사막에서 본 사막의 진풍경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한 마디로 절대미라 할까. 이번의 백사막 여행도 그랬다.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 속에 어떤 곳은 흑사막이고 또 어떤 곳은 백사막이다.

바하리야 백사막의 모습, 석회암이 마치 버섯 같다. 그 앞에 있는 조그만 바위는 버섯을 바라보는 매와 같다.
 바하리야 백사막의 모습, 석회암이 마치 버섯 같다. 그 앞에 있는 조그만 바위는 버섯을 바라보는 매와 같다.
ⓒ 박찬운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하룻밤 묵은 곳은 석회암이 사막 한가운데에 솟아나 온갖 조각상으로 변한 곳이었다. 버섯 모양, 사람의 얼굴 모양, 나무 모양, 동물 모양 등등 온갖 모양들이 마치 조각을 해 놓은 것처럼 사막 한가운데 서 있다. 신들이 지상에 내려와 서로 조각 대회를 하고 천상으로 올라간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그 한가운데서 천막을 치고 모닥불을 놓은 채 잠이 들었다. 밤하늘에는 섣달 보름달이 올랐다. 별들이 총총하다. 사막에서 보는 별들은 남다르다. 비록 보름달이 뜬 밤이라 별이 선명하지 않았지만 도시 속에서 보아 온 별과는 사뭇 다르다. 새벽녘이 되어 나가 보니 달이 스러지고 별들이 점점 밝아져 왔다. 선명하게 북두칠성이 보이고 카시오페이아도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 북극성이 반짝인다.

인간이 만든 나일문명은 위대하다. 4천 년 이상 인류 역사에 분명한 자태를 보여준 그 문명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자연은 더 위대하다. 아무리 돌이 만들고 기후가 만든 나일문명이라 할지라도 또 4천 년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4천 년이 아니라 4만 년, 그 이상을 버티면서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준다. 바하리야 백사막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깨달음 안고 9박 10일 나일문명 기행은 막을 내렸다.

[후기] 나일문명, 영원히 보존되길...
이 여행을 마친 직후 이집트에는 큰 소요가 일어났다. 30년 무바르크 독재 정권에 염증을 느낀 민중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자스민 혁명이 마침내 이집트에 도착한 것이다.

내가 갔던 카이로 도심 한복판의 국립박물관의 앞 광장 엘-타흐리히에는 수십만의 군중이 운집하여 무바르크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결국 무바라크 정권은 막을 내렸고, 독재자 무바라크는 병상에 있으면서 사법심판을 받게 되었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시민들이 다치고 죽었다. 민주주의를 키우는 것은 '민중의 피'라고 하더니만, 이것은 과연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그런데 아쉬운 것은 보도에 의하면 소요를 틈타 국립박물관에 강도들이 난입하였다고 한다. 보물 중의 보물인 투탕카멘의 배가 없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러한 사태를 보는 나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집트의 민주화가 조속히 오길 바란다. 그리하여 인류문명의 기원인 나일문명의 찬란한 유적지와 유물들이 온 인류의 갈채 속에 영원히 보존되길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세계문명기행 I - 나일문명 기행편을 애독해주신 독자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어서 세계문명기행Ⅱ-페르시아편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태그:#세계문명기행, #나일문명기행, #알렉산드리아, #백사막, #이집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