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유비와 손권이 동오에서 바위를 앞에 놓고 차례로 칼솜씨를 뽐내는 대목이다. 유비는 속으로 '내가 무사히 형주로 돌아가 대업을 성취할 수 있으면 이 칼에 바위가 갈라지게 해주십시오' 하며 칼을 휘두른다. 손권이 '무엇을 빌었느냐'고 묻자 유비가 대답한다. '우리가 조조를 물리쳐 한의 정통을 이을 수 있게 해주십사 기원했다'고 응수한다.
손권도 이어 칼로 바위를 가른다. '내가 형주를 차지하여 대업을 이룰 수 있다면 바위가 갈라지게 해주십시오.' 유비가 '무엇을 빌었느냐'고 묻자 손권도 유비와 대동소이한 대답을 한다. <삼국지연의>의 이 장면과 유사한 전설을 품고 있는 역사유적이 경주에 있다. 바로 단석산이다.
건천IC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단석산으로 간다. 왼쪽으로 내리면 금척 고분군을 거쳐 법흥왕릉, 김춘추 묘, 서악 고분군으로 간다. 그러나 만약 등산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여행자라면 먼저 단석산부터 오르는 게 좋다. 단석산은 신라의 상징 인물인 김유신이 청소년 시절 입산하여 무예를 닦으며 통일을 염원한 곳이다. 국보 마애불도 있다.
'단석산(斷石山)'이라면 '돌[石]을 자른[斷] 산'이라는 뜻이다. 단석산의 이름은 김유신이 화랑 시절 이곳에 들어 무예를 수련하던 중 산 정상에 있는 큰 바위를 칼로 내리쳐 두 동강이 낸 데서 유래했다. 유신은,
"이 바위가 둘로 갈라지면 삼한일통이 이루어지고, 아니 갈라지면 통일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겠나이다."하고 천지신명께 기원했는데, 유신의 칼에 바위가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그 바위가 지금 단석산 정상에 있다.
단석산 상인암, 신라 최초의 석굴 사원
신라 화랑들은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따라서 김유신도 단석산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영남 알프스'라 부르는 가지산 일대에서도 수련을 했고, 팔공산 끝자락의 불굴사 뒤편 동굴에서도 무예를 연마하고 하늘에 기원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자취가 가장 분명하게 남은 곳은 단석산이다.
단석산은 신라의 군사들이 오가는 길의 남쪽에 있는 산이다. 북쪽은 선도산이다. 두 산줄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신라의 장수와 군사들은 싸우러 다녔다. 그래서 단석산이 화랑들의 수련장소로 애용되었을 것이다. 전쟁터로 나아가고 또 돌아오는 장졸들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면서 신라의 청소년들은 저절로 몸과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단단해졌으리라.
'선도산은 높이도 낮지만 본래가 신라인들의 기도처였으니 화랑들의 입산 수련장이 되지는 않았을 거야.' 이런저런 역사적 생각을 하며 단석산 827m를 오르면, 무심코 등산을 하는 데 비해 훨씬 힘이 덜 든다. 물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 오르막을 탔을 어린 화랑들의 수련에 견주면 오늘의 1회 산행이야 '힘이 든다, 안 든다' 할 만한 게재도 못 되는 일이지만.
단석산, 김유신의 단칼에 반 토막으로 난 바위를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역사 체험장이다. 특히 청소년 자녀와 함께 경주를 방문한 답사자라면 반드시 찾아보아야 할 유적이다.
신선암 마애불상은 단석산 정상 가는 중간쯤에 있다. 신선암은 신라 천년 고찰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건물도 아니고, 현재 면모 또한 옹색하다. 그러나 암자 바로 옆에 버티고 있는 마애불상은 보는 이의 숨을 가로막을 만큼 장엄하다.
높이 8m, 입구 폭 3m, 깊이 10m의 거대한 ㄷ자형 암벽 틈으로 들어가면 삼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어마어마한 암벽 사이로 들어가는 느낌도 대단하려니와, 김유신이 입산 수도를 한 7세기 전반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부처상 1구와 보살상 8구를 눈앞에서 대하노라니 비록 불신자는 아니지만 저절로 엄숙해진다.
국보 199호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이 암벽의 이름은 상인암(上人巖)이다. 전문가들은 이 상인암을 신라 최초의 석굴(石窟) 사원으로 인정한다. 토함산 석굴과, '제2 석굴암'으로 널리 알려진 경북 군위의 삼존불보다도 200~300년 앞선 시대의 석굴 사원으로 보는 것이다.
석굴 사원이라면 천정으로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이 뻥 뚫려 있다. 그래서 뜨거운 폭염과 소나기, 삭풍한설이 안으로 쏟아진다. 결국 석불이 손상될까 봐 보호막을 씌웠다. 그러나 옛날에는 기와 지붕을 덮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주위에서 신라 시대의 기와 조각이 다수 발견되었다.
단석산 정상, 난승에게 도 깨친 김유신의 자취
상인암 앞으로 지나 조금 나아가면 왼쪽으로 등산로가 나타난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다. 봄에 찾으면 참꽃이 만발한 길이지만, 겨울에 들르면 습기에 젖은 참나무 잎새들에 휘둘려 넘어지기 십상인 험로의 인상만 남는다. 그 길이 바로 김유신이 화랑이던 10대 때 수련 도중 난승(難勝)이라는 도사를 만나 도를 깨친 후 산 정상으로 뛰어올라 커다란 바위를 단칼에 베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로 그 단석(斷石)을 찾아가는 길이다.
단석은 정확히 산꼭대기에 있다. 게다가 좌우로 분명하게 한복판이 갈라져 있다. 갈라진 바위 사이로 하늘이 시원하다. 이 광경을 보노라면, 날카로운 검법의 소유자가 단칼에 두 동강이를 내었다는 '전설'은 저절로 '사실'이 된다.
단석산, 뜻을 품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홀로 깊은 산중에 들어와 몸과 마음을 단련했던 김유신의 자세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위에서 아래로 칼날같이 갈라진 바위를 매만져보며 어린 나이에도 그토록 철저하게 시간을 영위했던 김유신을 생각해본다.
정상에 서면 동북쪽 아래로 경주 시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시 고개를 북쪽으로 조금 돌리면 무열왕릉이 지키고 섰는 선도산 아래를 한 줄로 지나가는 길이 보인다. 아(!) 신라의 군사들이 줄을 지어 힘차게 행진하는 모습이 환상처럼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