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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자 주요 일간신문에 '제2외국어교육 정상화추진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대통령 후보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실렸다. 급기야 제2외국어 교과 교수와 교사들까지 뭉쳤다. 정부의 영어 일변도의 외국어 교육 정책으로 인해 중고등학교 과정은 물론이고 대학교육에서까지 제2외국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절박함 때문으로 보인다.

하긴 현재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 교과는 '열외' 과목이 된 지 이미 오래고, 지금껏 제2외국어를 가르쳐온 교사들은 다른 교과로 옮겨가기 위해 별도의 연수를 받는 등 살아남기 위해 부산한 모습이다.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고등학교마다 개설돼 있던 독일어와 프랑스어 과목 등은 이젠 과목도 교사도 더 이상 학교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그것이 제2외국어 교과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재 중고등학교에는 이른바 '도구과목'이라는 이름으로 영어, 수학만 남았다. 심지어 초등학생들마저 영어, 수학을 제외하고는 쓸모없는 과목이라는 얘기를 공공연히 할 정도다. 대학입시에 초, 중, 고 교육과정이 철저하게 종속돼 있는 현실에서 제2외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을 제외한 모든 교과가 '기타 과목'이라는 이름으로 형해화해 버렸다.

수업시간 통사정해서 자는 아이 깨웠더니...

 엎드린 학생의 모습(자료 사진)
엎드린 학생의 모습(자료 사진) ⓒ 임정훈

얼마 전 제2외국어 교과를 담당하는 동료교사가 이런 푸념을 건넸다. "기타 과목도 과목 나름이에요. 그래도 선생님께서 가르치는 한국사는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필수 과목이잖아요." 고등학교의 기술가정 교과처럼 시나브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일 뿐 별반 차이가 없다.

교육과정 상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한다고 못 박은 건 어디까지나 '규정'일 뿐, 대학입시를 앞둔 아이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독도 문제로 시끄러워지면 냄비 끓듯 여론이 비등하고 정부가 온갖 대책을 쏟아내지만, 그때뿐 학교에서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대학입시라는 냉정한 현실을 이겨낼 무엇이 없고서는.

문과를 선택한 아이들에게 물리나 화학 과목이 그렇듯, 이과 아이들에게 한국사나 윤리는 취침시간으로 활용되기 일쑤다. 수험 과목이 아닌 탓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란 그저 최종 대학입시를 대비해 '전략'을 세우고 이행하는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그들 앞에서 자아실현 운운해봐야 하품 나오게 하는 소리일 뿐이다.

어느 대통령 후보는 자연과학자나 공학도에게도 인문학적 소양은 중요하다고 갈파했는데, 고등학교 교실에 직접 와본다면 그의 말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현실에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통섭'이 대세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곳곳에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고 서점이 들썩일지언정 공고한 학교 울타리는 쉬이 넘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작정 수업의 질을 높이라는 요구는 생뚱맞다. 대학입시에 출제되는 과목도 아닌데 교사가 피 토하듯 열강을 한다고 귀담아 들어줄 수험생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번은 이런 일도 겪어야 했다. 이과 수업시간, 통사정해서 엎드려 자는 아이를 깨웠더니, "선생님, 죄송해요. 그냥 자도록 해주세요. 저희들 입장 잘 아시잖아요." 그래도 나름 모범생으로 인정받는 아이의 하소연에 더는 깨우지 못했다.

절반 가까이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 그나마 나머지도 다른 교과 책을 꺼내놓고 공부하는 교실에서 수업을 해야 하는 교사의 마음을 헤아려본 적이 있는가. 시험을 어렵게 낼 거라고, 내신에 반영된다고, 또 생활기록부의 교과학습세부능력사항에 기재한다고 엄포를 놓는 건, 그렇잖아도 대학입시에 스트레스 받는 아이들 앞에서 몽니부리는 꼴이니 교사로서 차마 할 짓이 못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비록 극소수이긴 하지만 몇몇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좋은 대학 가려면 영어, 수학에 '올인'해야겠지?"라는 마음에도 없는 질문에, "그 시간에 제가 좋아하고 자신 있는 과목에 더 집중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어른스럽게 답한다.

또, 이런 답변도 들었다. "영어 잘 한다고 글로벌 인재고, 도덕 점수 높다고 도덕적 인간인가요? 비록 영어, 수학 점수 때문에 좋은 대학은 못 가겠지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걸 제가 선생님 앞에 증명해 보일 게요." 자존감에 상처 입은, 나와 같은 '기타 과목' 교사들에겐 아이들의 이런 말들이 큰 위로가 된다.

'문과-이과 구분 폐지'에서 교육의 변화 마련하자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고, 과연 해결할 방안은 없는 걸까. 강고한 학벌구조를 타파하고, 승자독식의 무한경쟁 체제를 해체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일 테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 거시적인 접근으로 실마리가 쉬이 찾아지던가. '교육은 백년지대계'라지만, 외려 아이들과 학부모, 교사들 두루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미시적인 대책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훨씬 더 실효적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자격고사화하는 것과 함께, 현재 모든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적용하고 있는 문과와 이과 구분을 폐지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기실 문과와 이과는 교육과정 상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모든 학교가 편의대로 나눠 운영하는 방식이다. 시험에도 나오지 않고, 대학 가서도 딱히 쓸모없는 과목을 왜 아까운 시간 들여 배우냐는 '전략적 판단'에서다.

문과와 이과를 나눠 운영하다 보니, 아이들이 실제 '신경 써서' 배우는 과목은 몇 안 된다. 예컨대, 이과를 선택한 아이들의 경우, 나뉘는 2학년 때부터 수능을 치르는 3학년까지 2년 동안 국어, 영어, 수학을 제외하면 과학 관련 교과 2과목만 집중해 공부하게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 다섯 교과가 고등학교 3년을 평가하고 결산하는 사실상 '모든' 과목이다.

물론, 필수과목인 한국사도 있고, 사회와 윤리 같은 과목도 배워야 한다. 그런가 하면 음악, 미술, 체육과 같은 예체능 과목 또한 정규 교육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다. 다만, 내신에 큰 의미도 없고, 수능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그러한 과목을 가르치고 배우는 건 '요식 행위'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몇 해 전, 영어와 수학 성적을 해당 과목이 아닌 다른 과목 성적으로도 표기해 물의를 일으킨 한 고등학교의 사례는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백 보 양보해서, 아이들의 문이과 선택이 그렇다고 진로와 적성에 대한 오랜 고민과 합리적 판단 끝에 내린 결정일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1학년 때 문이과를 선택하라는 건, 중학교 때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대해 대충 탐색이 끝났다는 전제에서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1학년 아이들 중 중학교 때 교육과정을 통해 진로에 대해 깊이 고민해봤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선택이 많고, 문과가 공부하기 쉽다거나 이과가 취업에 그나마 도움이 된다는 등의 떠도는 말들에 귀가 솔깃해 내린 섣부른 결정이 태반이다. 무슨 공부를 하면 즐거운지, 무슨 일을 하면 가슴이 뛸 것인지 등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가 없던 아이들에게 다짜고짜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들이미는 셈이다.

요컨대,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한 편법인 문이과 구분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는 낡은 잣대다. 그런 교육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잘 커봐야 '반쪽짜리 지식인'일 뿐이다. 단언컨대, 지금의 체제에서는 과학자의 손에 철학책이 들리고, 역사학자가 음악에 심취하며, 미술가가 기하학을 공부하는 모습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학생부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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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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