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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경주의 문화재는 대체로 통일신라 때 작품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쟁패를 다투던 삼국시대의 것이 아니라 무열왕 김춘추, 문무왕 김법민, 흥무대왕 김유신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부여나 공주, 김해가 경주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를 보유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금관가야(532년)와 백제(660년)가 망한 뒤 275년∼403년이나 지속된 신라 땅에 뛰어난 문화재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고, 또 남아서 전해지게 된 까닭이야 생각해볼 여지도 없는 일인 것이다.

남천은 남산의 북쪽 끝에서 급하게 오른쪽으로 꺾어진다. 포항으로 가는 대도로를 버리고 남천을 따라 닦여 있는 좁은 도로로 들어간다. 이 도로는 남천과 함께 남산의 동북쪽 비탈을 안고 이어지다가, 화랑교라는 작은 다리에서 통일전 가는 길과 만난다. 남산의 북쪽 비탈인 이곳에 세 골짜기가 있다. 부처골, 탑골, 미륵골이 바로 그들이다. 성실한 답사자는 이들 골짜기에서 통일신라 이전의 대단한 문화유산들을 만나게 된다.

석굴암의 원형으로 보이는 감실 석불
 석굴암의 원형으로 보이는 감실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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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골에는 부처가 계신다. 그것도 그냥 석불이 아니라 신라 사람들이 '석굴암의 전신(前身)'으로 믿었을 법한 대단한 부처님이다.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산15의 '군위 삼존석굴'(국보 109호)과 더불어 석굴암의 원형으로 인정되는 이 부처의 공식 이름은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보물 198호)이다. 경주 남산 부처골의 바위에 앉은 모습으로 새겨져 있는 부처상 정도의 뜻이다.

남천을 사이에 두고 낭산의 선덕여왕릉과 반대편쯤 되는 지점의 남산 북쪽 끝자락에 있는 이 불상, 경주 토박이 노인들은 아직도 '할매 부처'라 부른다. '할매'라는 말에 묻은 친근감이 진작부터 정겨움을 안겨주는 불상이다. 여인의, 그것도 나이 든 인자한 할머니의 느낌을 주는 불상인 까닭에, 찾아온 답사자의 마음도 자연스레 편안해진다.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히는 이 불상은 대략 7세기 초반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데, 선덕여왕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647년, 비담의 반란 중에 죽은 선덕여왕은 당시 60세 전후의 나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남산 끝자락의 모델로 후세에 남아 영원히 '할매' 소리를 듣게 되었다한들 생물학적 연령으로 견줘서는 크게 억울할 일도 아닐 법하다. 다만 국민들의 정서 속에 젊으면서도 지략을 겸비한 여왕의 심상으로 굳건히 남아 있는 선덕여왕을 '할매'라고 부르자니 왠지 미안할 뿐.

석굴암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감실석불의 원경과 근경
 석굴암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감실석불의 원경과 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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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의 원형 '남산 감실석불'

현장을 찾아보면, 높이 3m, 폭 4m 가량 되는 바위에 깊이 60cm, 높이 1.7m, 폭 1.2m 정도 되는 굴을 파고 그 안에 1.4m쯤 되는 부처가 모셔져 있다. 석굴암이 아직 없던 당대에는 최고의 '작품'으로 대단한 이름을 떨쳤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선덕여왕을 모델로 했다면 유명세는 더 더욱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았을 터이다.

할매부처는 오후에 찾아야 한다. 오전 중으로 찾아뵈면 감실의 할매부처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얼굴을 반쯤 그림자로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동쪽에서 비치는 아침 햇살이 바위그늘을 만들어 할매부처의 얼굴을 반쯤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후에 다시 찾아뵈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온통 얼굴을 환하게 밝힌 채 사람을 맞는다. 고개는 여전히 숙이고 있지만, 곱게 늙어 수줍은 듯한 미소는 영락없는 우리나라 전통 '할매'의 친근감을 가득 보여준다.

이 마애불상은 이곳 골짜기에 불곡(佛谷)이라는 이름이 붙도록 만들었다. 후세의 석굴암에 비견되는 '할매 부처'였으니 많은 신라인들이 찾았을 것이고,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이었으니 그것이 있는 골짜기를 '부처골'로 불렀을 것이다. 부처골의 한자어 표기가 곧 불곡이다. 부처골을 불곡으로 바꾼 것은 경덕왕 때인 757년일 듯하다. 우리나라의 사람이름, 땅이름, 산이름 등을 중국식으로 대거 바꾼 것이 바로 그때이므로.

경주 남산 부처바위에는 황룡사의 밑그림으로 보이는 석공의 솜씨가 새겨져 있다.
 경주 남산 부처바위에는 황룡사의 밑그림으로 보이는 석공의 솜씨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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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부처가 인자한 얼굴로 자리잡고 있는 부처골 바로옆 골은 탑골이라 불린다. 탑골 입구의 안내판은 통일신라 시대에 신인사(神印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 대단한 3층석탑이 있어 이 골짜기를 탑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해설한다. '대단한' 탑이 있었다고 하니 아니 찾아볼 수 없다. 열심히 찾아본다.

탑은 없다. 하지만 탑은 못 찾았어도 사람의 혼을 쏙 빼내는 듯한 엄청난 바위를 보게 된다. 답사자들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은 듯 사방을 살피게 된다. 골짜기 중간쯤에서 만난 높이 10m, 둘레 30m의 커다란 바위 때문이다.

거대한 바위에는 사방으로 30여 점에 이르는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렇듯 부처가 많으니 일반 백성들이 그 바위를 '부처바위'라 부르게 된 것이야 뻔한 일이다. 부처바위의 불상을 학자들은 7세기 무렵의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아니나 다를까, 놀라운 조각이 보인다. 선덕여왕이 세운 황룡사 9층목탑의 원형으로 보이는 탑이 바위의 북쪽면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몽고군이 불살라 볼 수 없게 된 황룡사 9층탑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황룡사 9층탑의 원형을 볼 수 있는 부처바위

부처바위에 새겨져 있는 부처님들 중 일부
 부처바위에 새겨져 있는 부처님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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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안내판의 해설에 설득력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신인사의 탑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골짜기를 탑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니라, 34점의 불교 그림이 한꺼번에 새겨져 있는데다 황룡사 9층탑과 7층탑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보물 201호 사면바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다.

탑은 불상과 법당보다 먼저 생긴 신앙의 대상이다. 신라 사람들은 이곳 부처바위에 영험한 탑 조각을 새겼다. 그것이 밑그림이 되어 황룡사 탑이 지어졌다. 어찌 골짜기에 탑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을 것인가.

물론 부처바위의 탑그림이 황룡사탑의 완공을 기려 그 뒤에 그려졌을 수도 있다. 황룡사 9층목탑 자체가 세우는 데 2년이 걸린 엄청난 불사(佛事)였으니 그것이 차차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목격한 어떤 승려 조각가가 감동에 겨운 나머지 황룡사탑 건립에 맞춰 자신도 부처바위에 똑 같은 모양의 탑 그림을 새겼을 수도 있을 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처바위의 웅혼한 탑그림은 불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았을 터, 그들은 이 골짜기를 드나들면서 "탑골 다녀오리다", "탑골  함께 가려오?" 등의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남산 석불 중 가장 완전한 원형을 보여주는 보리사 석불

탑골에서 화랑교 쪽으로 좀 더 나아가면 갯마을이 나온다. 갯마을이라면 보통 바닷가의 어촌에 붙는 이름인데, 남산 북녘의 작은 산비탈 마을에 그런 동명이 주어진 것이 조금은 신기하다. 어쩌면 이곳이 아득한 옛날에는 남천과 가장 가까이 붙어있으면서 물고기도 잡고 배도 띄우던 마을이었는지 모른다.

보리사 석불좌상. 남산에서 가장 완벽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불상이다.
 보리사 석불좌상. 남산에서 가장 완벽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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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갯마을 이름을 들고 보리사 석불좌상을 찾기는 어렵다. 임업시험장이 훨씬 손쉬운 기준점이다. 보리사는 임업시험장 바로 뒤편 산 속에 있다. 그리고 석불좌상은 보리사의 대웅전 옆에 있다. 대웅전 앞에 선 채, 잠깐이지만 가팔랐던 오르막을 헉헉 올라온 숨을 고르면서 왼쪽을 쳐다보면 너무나 잘 생긴 부처님이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앉아 계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보리사 석불좌상은 불상 높이 2.44m, 전체 높이 4.36m에 이르는 대작이다. 자비로우면서도 거룩한 얼굴, 연꽃띠 바탕 사이사이에 작은 불상과 불꽃 무늬를 아로새긴 화려한 광배, 부드러운 옷자락과 반쯤 감은 눈으로 세상을 굽어보는 표정의 유연함 등 통일신라의 문화적 향기가 골짜기를 가득 메우는 듯한 걸작이다. 그래서 안내판은 '경주 남산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보물 136호이다. 

이 석불좌상에는 특이한 점이 한 가지 있다. 뒷면에 약사여래불이 따로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앞뒤로 불상이 새겨진 희귀한 예로, 멀리서 찾아와 오르막을 다마 하지 않고 걸어온 답사자를 한껏 즐겁게 해주는 '고마우신' 부처님이다.

보리사에서 내려오다가 길이 휙 굽는 지점은 잠깐 주의를 기울일 곳이다. 올라오는 길에 숨이 가빠 미처 '미륵곡 석불좌상 180m, 마애여래좌상 150m' 이정표를 못 본 분은 지금이라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올 때 못 본 그 꽃'이 전문인 고은 시인의 짧은 명작의 교훈을 되새기자는 말이다.

보리사 좌상의 미소
 보리사 좌상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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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3호인 이 마애불은 보리사 석불좌상보다 약간 후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배경돌의 가운데 부분을 약간 안으로 파서 1.5m가량 되는 얕은 감실을 만든 다음, 그 안에 90cm 정도의 부처를 양각으로 새겼다. 양뺨 가득 자비에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국보가 수두룩한 경주에서 보물도 아닌 유형문화재 수준으로는 명함도 내밀기 어렵다. 하지만 보리사 마애불상은 그 경지를 뛰어넘는다. 그 위치 덕분이다. 오죽하면 안내판의 첫 문장이 '이 마애불은 망덕사터를 비롯한 벌지지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있다'로 되어 있을까.

선덕여왕릉의 낭산, 그 자락의 사천왕사터, 그리고 앞뜰을 이루는 망덕사터, 다시 멀리 황룡사터까지 한눈에 다 보인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이 실물 그대로 존재했던 통일신라 당대에는 과연 어떠했을까. 이곳에 마애불을 새긴 신라인들의 심미안이 새삼 눈물겨울 지경이다. 그들은, 서울 전경이 시원하게 바라보이는 이곳 바위에 나라와 사람들을 지켜줄 부처님을 아로새겨 놓고서 날마다 찾아와 기도를 올렸다. 그들은 진정 불국토를 자처한 신라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보리사 마애불상에서 내려다 본 망덕사터 쪽 풍경
 보리사 마애불상에서 내려다 본 망덕사터 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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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황룡사,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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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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