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대통령 선거가 두 달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번 대선은 제3후보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렵다. 문재인과 안철수의 야권후보단일화는 87년 양김의 단일화 실패 이래 가장 중요한 대선 변수로 떠올랐다. 일각에서는 후보단일화가 후진적인 정치행태이기 때문에 배격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결선투표가 없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항상 제3후보의 출현과 후보단일화의 개연성이 상존할 수밖에 없다.
제도의 미비로 민의가 선거에 충분히 반영되기 어렵다면 우선은 그 제도부터 고치고 볼 일이다. 선거시간 연장 논란도 마찬가지이다. 돈이 좀 더 들고 행정력이 더 소모된다는 이유로 공민권 확대를 안 할 거라면, 아예 옛날처럼 저렴하게 체육관 선거로 돌아가는 게 낫다.
답답한 빅3 후보
그런 한계가 있긴 하지만, 추석 연휴가 지나고 본격적인 선거전이 펼쳐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돌아보면 온갖 선거공학적인 논의만 난무할 뿐 우리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후보단일화 논란에서 비껴나 있는 박근혜나 새누리당은 최근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논란에서 보듯이 아직도 '노무현 탓'을 가장 중요한 선거 전략으로 삼은 듯하다.
문재인은 남북문제나 군사안보 관련 정책공약을 발표했지만 지난 참여정부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난 느낌이고 안철수는 여전히 현안에 대한 교과서적인 답변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대통령 선거는 단순히 지도자 한 명을 뽑는 이벤트가 아니라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자리이다. 지금 당장 우리 삶을 옥죄는 현안들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들을 살펴보는 것,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제시하는 것도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이른바 지금의 빅3 후보는 모두 낙제점이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질문, 산업화와 민주화 그 다음은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어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산업화라는 말은 군사독재의 치부를 덮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다지 적절한 단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흔한 대답은 선진화이고 요즘 유행하는 대답은 복지화이다. 빅3 후보들의 답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 정치쇄신 모두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은 무엇? 그런데 좀 더 근본적으로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나라 대한민국을 어떤 국가로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수준에서 생각해 보면 빅3의 이런 답변은 대단히 피상적이고 즉자적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조망하며 역사를 인식하는 깊이와 통찰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5년짜리 대통령에게 너무 큰 요구를 하는 게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이미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다. 대통령이 5년 동안 어떤 관점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현격하게 바뀔 수 있다.
한 국가를 하나의 온전한 국가로서 제대로 운영하려면 무엇보다 '자기완결성'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각 개인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하나의 완결적인 구조가 국가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우리의 자아를 실현하려면 기본적으로 그에 필요한 영토와 자원(특히 식량자원과 에너지 자원)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를 외부로부터 수호하는 물리력은 군대의 형태로 실물화되고, 자원의 확보와 배분은 경제활동으로 드러난다. 또한 현실의 모든 국가는 자기 혼자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외교를 통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완결성을 높인다. 자기완결성이 높은 국가에 대한 별도의 이름이 필요하다면, 나는 '문명국가'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적인 국가를 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타국 땅의 임시정부로 시작해야 했던 한국은 자기완결성이 거의 전무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이제는 어엿한 중견국가가 되었지만,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한 취약함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군사권이다. 군사권에 관한 한 한국은 자기완결적이지 못하다. 전쟁을 개시하거나 종료할 권한(한국은 불행히도 한국전쟁의 정전협정당사자가 아니다.)이 아직 우리에게는 없다. 한국군의 가장 큰 문제는 낙후된 무기나 짧은 미사일 사거리가 아니라, 독자적인 군사작전 수행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자원 확보는 어떨까?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22.6%에 불과하다. 유엔은 이상기후 등의 이유로 내년에 식량위기를 경고했다. 국내 농산물 가격의 폭등으로 지금 우리는 외산 삼겹살에 상추를 싸먹어야 할 지경이다. 에너지 자원은 원래부터 취약했다. 중동이 불안하면 유가에 따라 나라경제가 들썩거린다. 이 둘은 모두 한국에서 사양길에 접어든 1차 산업과 관련이 깊다. 선진문명국가일수록 1차 산업이 강한 것은 자원 확보에서의 자기완결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요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자원인 인적자원도 우리 자체의 완결적인 구조 속에서 키워내지 못한다. 보육비나 교육비 때문에 아이 낳기가 겁나는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좀 사는 집 치고 자기 자식들 외국에 안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기가 길러 낸 국내박사는 외국박사에 비하면 인간취급을 못 받는다. 전문적인 학과 내용은 한국말이 아니라 영어로 배워야만 제대로 배웠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노벨 과학상이 아직 못 나오는 이유도 비슷하다. 노벨상을 수상하려면 과학적 성과에 대한 오리지낼리티(originality)가 있어야 하는데, 학문적 자기완결성이 취약한 한국에서는 그 오리지낼리티를 확보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아직 번듯한 문명국가라고 말하기가 무척 부끄럽다. 해방된 뒤 내전을 치르고 절대빈곤을 벗어나 민주화를 하느라 우리는 우리의 문명에 대한 고민을 하지 못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한국이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누가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문명국가 혹은 문명사회의 건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문명국가의 요체는 높은 수준의 자기완결성이다.
문명화 척도로서의 자기완결성이라는 시각으로 사회 현안을 들여다보면 한국사회의 야만적인 속성들이 속속 드러난다. 2012년 현재 한국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4580원, 월 96만원이 채 안 되는 수준이다. 이 돈으로 한국사회에서 문명인으로서의 자아실현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 자체가 쓴웃음만 짓게 한다. 많은 대학생들에게는 이제 그 본분이 학업이 아니라 알바가 돼 버렸다. 졸업해도 취직은 어렵고, 집값이 많이 내렸다고는 하지만 내 집 마련은 여전히 쉽지 않은 꿈이다. 행여 큰 병에 걸리거나 갑자기 실직되면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순식간이다.(쌍용차 사태를 보라.)
'착취 사회' 해결할 철학과 비전 보여야 빅3 후보들은 너나없이 일자리를 많이 만들겠다고 하지만(물론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한국 사회의 이런 총체적인 모순을 조망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정책은 땜빵식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당장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지도자가 어떤 철학과 비전을 갖고 있느냐, 국민 개개인이 문명인으로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민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최저임금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의 한국사회는 아직도 저가의 노동력에 기초한 '싸구려 사회'이다. 이는 다른 지적노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 싸이의 국내 음원수익이 고작 3600만원에 불과하다니. 정부가 정한 음원단가가 60원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대형 기획사도 음반만으로는 자기완결적인 사업을 굴리기가 벅차다고 한다. 말이 좋아 '싸구려 사회'이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착취 사회'에 가깝다.
이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동력 자체가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문명사회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점진적으로라도 시스템을 바꾸는 데에는 상당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일종의 대타협이 필요하다.
대선정국은 그런 대타협을 논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이다. 정말로 믿을만한 대선후보라면 자신의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고통과 비용에 대해 객관적이고 솔직한 정보를 공개해 사회적인 논의를 촉발하고 적극적으로 합의를 중재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빅3후보에서 이런 모습을 찾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어떤 문명국가를 건설할 것인가 (혹은 그냥 야만적인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물론 지금 우리의 선택에 전적으로 달려 있지만, 먼 미래의 제3자는 우리더러 편의상 '한글문명'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문명의 역사는 기록의 역사이고, 기록문명에 관한 한 다라니경이나 금속활자부터 한글과 조선왕조실록에 이르기까지 꽤나 할 말이 많은 우리이고 보면 이 작명도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건설할 문명사회가 결국에는 어떤 형태로든 한글문명으로 외부에 인식될 것이라면, 애초에 지금부터 우리가 '한글문명권'을 염두에 두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북한이나 조선족의 문제도 하나의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조망하게 된다.
대북관련 핵심 과제는 군사적 긴장 완화 대북관련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물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다. 북핵을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예컨대 군대나 국방에 대한 자기완결적인(주한미군 등의 문제 때문에 100%는 안 되겠지만) 비전을 가진 지도자라면 북한의 김정은 정권에게 획기적인 재래식 무기 감축협상을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북한경제가 중국경제로 포섭되느냐 남한경제로 포섭되느냐 하는 것도 동북아 전체의 역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 통계청이 추정한 북한의 지하자원 매장량만 해도 최소 7천조 원에 달한다. 북한의 노동력까지 생각해 본다면, 실속 없는 자원외교 한답시고 굳이 지구 반대편까지 갈 이유가 없다.
선거가 중반으로 접어든 만큼 앞으로 각 후보 진영에서는 본격적으로 정책과 공약들을 쏟아낼 것이다. 이미 대세론이 무너진 박근혜는 박근혜대로, 후보단일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문재인과 안철수는 또 그들 나름대로 메가톤급 공약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것이다. 이달 26일로 예정된 나호로의 발사성공여부가 하나의 분기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5년 전 대선에서 민주당의 정동영 후보가 달 탐사 추진을 공약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획기적인 우주개발이나 대규모 과학프로젝트 공약부터 난무할 수도 있다. 항공우주산업육성이니, 차세대 성장 동력이니, 고급 일자리 창출이니, 하는 식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호사롭게 할 문구들이 벌써부터 예상된다.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문명사회에 대한 고민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그런 공약들은 거의 모두 사기에 가깝다. 후보들도 유권자들도 이제부터는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큰 그림과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해 좀 더 격이 높은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선택의 순간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제는 그리 많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