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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촉석루에서 가야금산조와 민요 등의 공연이 펼쳐진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촉석루에서 가야금산조와 민요 등의 공연이 펼쳐진다. ⓒ 김종길

'진주라 천리길'. 흔히 진주를 일러 하는 말이다. 서울에서 천리니 그만큼 멀다는 의미이면서도 천리길을 마다않고 다시 찾고 싶은 고을이라는 의미도 내재되어 있겠다. 천리길 진주를 오가는 데 한몫한 것이 기차였다. 근데 이 기차라는 것이 직선으로 치면 대전을 거쳐 서울로 곧장 가는 게 빠르겠지만 부산까지 거의 다 내려간 삼랑진에서 다시 방향을 돌려 남해안을 따라 올라와야 진주에 이를 수 있었으니 예전 진주에 오려면 조선 팔도를 다 구경하고도 남았음이라.

"천리길 진주 잘 오셨습니다"

"천리길 진주 잘 오셨습니다."

진주역은 1923년 12월 1일 삼랑진 진주 간 철로가 개통되면서 1925년 8월 1일부터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1968년 2월 7일에 진주 순천 간 철로가 개통되면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경전선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진주역은 1923년 12월 1일 삼랑진 진주 간 철로가 개통되면서 1925년 8월 1일부터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10월 23일, 개양역 인근 새 역사로 옮긴다.
진주역은 1923년 12월 1일 삼랑진 진주 간 철로가 개통되면서 1925년 8월 1일부터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10월 23일, 개양역 인근 새 역사로 옮긴다. ⓒ 김종길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돼 있는 진주역 ‘차량정비고’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돼 있는 진주역 ‘차량정비고’ ⓒ 김종길

진주역에는 흔히 놓치기 쉬운, 그러나 아주 중요한 구조물이 하나 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돼 있는 '차량정비고'가 그것이다. 기차를 정비하는 곳이라 그런지 규모가 대단하다. 예전에는 이곳이 기차를 수리하느라 쇳소리로 시끌벅적했겠지만 지금은 너무나 조용해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건물의 외벽에는 총탄 자국이 더러 있다. 한국전쟁 때의 상흔이라고 한다. 전쟁의 흔적은 이곳도 비켜가지는 못했나 보다.

차량정비고 옆 귀퉁이에는 원형의 구조물을 따라 레일이 둥글게 깔려 있는 곳이 있다.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알 도리가 없다. 역무원에게 물어 보았더니 '전차대'라고 했다. 기관차의 방향을 돌릴 때 사용하는 구조물이었다. 기관차는 이곳에서 방향을 180도 튼 후 객차를 연결하여 반대 방향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이곳의 진주역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10월 23일, 진주 마산 구간의 선로가 복선화되면서 개양역 인근의 새 역사로 옮긴다. 12월이면 진주에도 KTX가 들어오게 된다.

젓가락 안 주기로 유명한 해장국집, 이유는?

 진주중앙시장 내 제일식당 해장국은 지역민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다.
진주중앙시장 내 제일식당 해장국은 지역민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다. ⓒ 김종길

진주여행의 시작은 새벽 해장국으로 할까 한다. 진주하면 흔히 비빔밥과 냉면을 꼽곤 한다. 여행자가 찾은 제일식당도 실은 비빔밥으로 유명한 식당이다. 진주중앙시장 안에 있는 이 식당은 천황식당과 더불어 현재 진주에서 비빔밥으로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제일식당은 비빔밥뿐만 아니라 해장국도 유명하다. 외지인들이야 비빔밥을 주로 먹고 가지만 사실 이 지역 사람들은 제일식당의 해장국을 더 좋아한다. 영업 방식도 특이한데, 새벽 4시부터 오전 11시~11시 30분까지는 해장국을 팔고, 11시~11시 30분 이후에는 비빔밥만 판다.

식당 안은 의외로 비좁다. 근데 탁자 서너 개가 전부인 이 작은 공간이 마술을 부린다. 이곳에 오면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자연스레 합석을 하여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 물론 잘 살펴보면 2층도 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제법 너른 다락같은 2층 실내가 나타난다.

이 식당은 중앙시장 내에서도 대를 이어서 하는 꽤나 오래된 식당이다. 벽면에는 처음 식당을 운영했던 시어머니 사진이 걸려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식당에서 뵐 수 있었다. 전두환 부부도 이곳을 다녀갔다. 예전부터 걸려 있던 사진인데 해장국 먹고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네. 얼마 전 뽀빠이 이상용도 다녀갔는지 벽에다 글을 남겼다.

 해장국은 전날 밤부터 사골을 푹 고와 우려낸 육수에 시래기와 푹 고인 부드러운 고기가 들어가 있다.
해장국은 전날 밤부터 사골을 푹 고와 우려낸 육수에 시래기와 푹 고인 부드러운 고기가 들어가 있다. ⓒ 김종길

"어서 오이소."

워낙 자주 가는 곳이라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했다. 주문할 것도 없이 해장국이 나왔다. 여행자에겐 국 따로 밥 따로 나왔다. 대개 국물에 밥을 말아 나오는데 밥을 따로 달라고 하면 된다.

다른 반찬은 아예 없다. 딸랑 해장국과 깍두기가 전부다. 근데 먹다 보면 다른 반찬이 있을 이유가 없다. 너무 과하여 재활용 및 잔반 문제로 골치를 앓는 여느 식당과는 달리 이곳은 그런 걱정이 없다.

해장국은 전날 밤부터 사골을 푹 고와 우려낸 육수에 시래기와 푹 고인 부드러운 고기가 들어가 있다. 고기는 거의 보일 듯 말 듯 씹힐 듯 말 듯하여 먹기에 아주 좋다. 그냥 심심해 보이는 깍두기도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밤새 마신 술에 이 해장국 한 그릇이면 숙취 같은 건 몸에 붙어 있을 재간이 없을 듯하다. 부드러운 시래기와 시원한 국물은 해장하기에 그만이다. 사실 술꾼들이 새벽 같이 이곳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행자도 한때 이 집을 제집 드나들 듯 번질나게 드나든 적이 있다.

 이 집의 해장국에 나오는 반찬이라곤 깍두기뿐... 숟가락으로 깍두기 국물과 같이 먹어야 해장국이 제맛이다.
이 집의 해장국에 나오는 반찬이라곤 깍두기뿐... 숟가락으로 깍두기 국물과 같이 먹어야 해장국이 제맛이다. ⓒ 김종길

"아주머니, 젓가락 좀 주세요."

예전에 같이 갔던 일행이 젓가락이 없다며 아주 당연하게 주인을 불렀던 적이 있다. 여행자처럼 자주 가는 사람이야 젓가락 없이 먹는 걸 당연하게 여기겠지만, 외지인의 눈에는 아주 낯설었던 모양이었다. 가만 보니 젓가락 없이 먹는 게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사실 이 집에서 젓가락을 주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 비밀은 깍두기 국물에 있다. 그냥 깍두기만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 것보다 숟가락으로 깍두기 국물을 담아서 같이 먹으면 훨씬 시원한 맛을 즐길 수 있고 해장국에 남은 잡냄새마저 깔끔히 잡을 수 있다. 한번 먹어 보면 '아, 이래서 젓가락이 필요 없구나!' 하고 누구나 공감을 하게 된다. 물론 비빔밥을 먹을 때에는 젓가락이 나온다.

'이 냉면 기가 막혀' 조선의 2대 냉면 진주냉면의 맛

 진주냉면은 한식 세계화를 위한 음식으로도 인정받았다. 2008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한식요리대회에서 '대령숙수 전통음식상'을 받기도 했다.
진주냉면은 한식 세계화를 위한 음식으로도 인정받았다. 2008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한식요리대회에서 '대령숙수 전통음식상'을 받기도 했다. ⓒ 김종길

아침은 해장국이라면 점심은 냉면이다. 진주냉면집 '하연옥'을 찾았다. 예전 서부시장에 있을 때 간혹 들렀었는데 작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난 후부터는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몇 번 가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지나치기만 했다. 이번에는 날씨도 제법 쌀쌀해져 손님들이 뜸하겠지 생각하며 찾았으나 역시나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이른 점심시간에 가서 10여 분을 기다린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진주의 대표적인 음식을 들라면 단연 비빔밥과 냉면이다. 비빔밥은 전주비빔밥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최근의 일이고 그 역사와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비빔밥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00년대 말엽에 발간된 <시의전서>인데, '부븸밥'으로 표기하고 있다. 다만 육당 최남선은 <조선 상식>에서 지방마다 유명한 음식으로 전주의 콩나물과 진주의 비빔밥을 들고 있어 이때만 해도 진주의 비빔밥이 훨씬 유명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냉면 또한 지금이야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이 유명하지만 사실 예전에는 북에는 평양냉면, 남에는 진주냉면이었다. 오늘날 이름을 얻고 있는 함흥냉면은 그 역사를 쳐봐야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북한에서 출간된 <조선의 민속전통(1994)>이란 책을 보면 '랭면 가운데서 제일로 일러주는 것이 평양랭면과 진주랭면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진주냉면은 냉면의 본고장 북한에서도 인정하는 맛으로 진주 지방에서는 옛날 양반의 특식이자 기방의 야식으로 유명했다.

 비빔냉면은 아주 부드러우면서 적당히 매운 맛이라 젊은 층에 인기가 좋다. 고명과 지단이 만들어낸 색이 참으로 예쁘다. 비빔냉면과 함께 나오는 육수는 해물육수가 아닌 양지사태를 우린 고기육수다.
비빔냉면은 아주 부드러우면서 적당히 매운 맛이라 젊은 층에 인기가 좋다. 고명과 지단이 만들어낸 색이 참으로 예쁘다. 비빔냉면과 함께 나오는 육수는 해물육수가 아닌 양지사태를 우린 고기육수다. ⓒ 김종길

"한 줌밖에 안 되는 메밀국수에 볶은 고기를 가늘게 썰어 넣어 배와 생강으로 맛을 여민 육수로 된 이른바 진주냉면이 구사마의 호물이었다. '이 냉면 기가 막혀.' 구사마는 한꺼번에 두 그릇을 먹곤, '진주를 떠나면 영영 이 맛있는 냉면을 못 먹게 될 텐데….' 하고 숙연히 한숨을 지었다."

소설가 이병주의 <지리산>에 나오는 구절이다. 일본인 교사 '구사마'가 진주를 떠나면서 다시는 냉면을 못 먹게 되는 것을 한숨짓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진주냉면은 그 맛이 유명했다.

조선시대 진주냉면은 화려했던 진주의 교방문화와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진주의 한량들이 기생들과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다 선주후면의 식사법에 따라 입가심으로 즐기던 고급 음식이 냉면이었다. 교방문화가 꽃폈던 진주의 '귀족냉면'이었던 셈이다. 당시는 냉면의 고명 또한 교방청 별식답게 전복, 해삼, 석이버섯 따위의 비싸고 귀한 재료가 올라갔는데 이후 냉면이 서민 음식이 되면서 소박해졌다.

<한국향토전자문화대전>에 따르면 진주냉면은 중앙시장 대화재로 1960년대 중반에 진주지역에서 사라졌다가 1999년 진주냉면 원형을 중심으로 식생활문화연구가에 의해 재현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까지 옥봉동을 중심으로 수정식당, 평화식당, 은하식당 등 7~8개 업소가 성업 중이었으며, 옛날에는 이러한 식당들이 하인을 두고 직접 배달을 하였다 한다.

진주냉면을 하던 식당들이 사라지고 그 맥이 끊겼는데 유일하게 서부시장에 자리 잡은 '부산식육식당'이 당시의 맛을 간신히 이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60여 년 전 진주의 나무전거리(지금의 중앙시장)에서 냉면장사를 시작했던 황덕이 할머니의 냉면집이었다. 이후 이 식당은 '부산냉면', '진주냉면'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가 2011년 5월에 '하연옥'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으로 옮겨왔다. 허영만 화백의 <식객>에 등장하기도 했다.

 진주냉면은 메밀가루에 고구마전분을 섞어 면발을 뽑아 쫄깃하다.
진주냉면은 메밀가루에 고구마전분을 섞어 면발을 뽑아 쫄깃하다. ⓒ 김종길

진주냉면은 고명과 육수가 다른 냉면과 확연히 다르다. 다른 재료들은 일반적인 냉면과 차이가 없으나 고명으로 올린 두툼한 육전이 별미다. 계란을 입힌 소고기를 기름에 부쳐 썰어낸 육전은 쫄깃한 면과 묘한 조화를 이뤄 진주냉면만의 독특한 개성을 보여준다.

육수는 멸치, 홍합, 다시마, 소고기 사태를 주재료로 하여 만드는 데만 꼬박 2박 3일이 걸리며 이후 15일간의 저온 숙성으로 맛을 갈무리한다고 한다.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냉면 육수의 맛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해물 특유의 풍부한 향미와 감칠맛 나는 풍미는 두고두고 입맛을 당기게 만든다. 특히 벌겋게 달궈진 쇠막대기를 사용하여 육수의 잡내를 없애는 방법은 진주냉면의 숨은 비법이다. 면은 메밀가루에 고구마전분을 섞어 면발을 뽑는 것이 특징이다.

근데 재미있는 사실은 예전에는 냉면이 겨울음식이었다는 데에 있다. 냉면에 관한 기록이 문헌에 보이는 건 19세기 중엽 무렵이다. <동국세시기>에는 냉면을 여름음식이 아닌 '겨울시식'으로 꼽고 있다는 점이다. 쌀쌀해진 요즈음 진정한 미식가라면 냉면 한 그릇 시원하게 들이키는 건 어떨까?

박진감 넘치는 진주소싸움, 전율...

 제120회 진주전국민속소싸움대회가 10월 2일부터 7일까지 진주시 판문동에 있는 진주전통소싸움경기장에서 열렸다. 대회 기간 동안의 관람객은 (사)한국민속소싸움협회의 추산에 따르면 하루 평균 9000명, 총인원 5만여 명이 다녀가 예년에 비해 2배 정도 늘어 전국소싸움대회 사상 최고의 인원이 관람했다고 한다.
제120회 진주전국민속소싸움대회가 10월 2일부터 7일까지 진주시 판문동에 있는 진주전통소싸움경기장에서 열렸다. 대회 기간 동안의 관람객은 (사)한국민속소싸움협회의 추산에 따르면 하루 평균 9000명, 총인원 5만여 명이 다녀가 예년에 비해 2배 정도 늘어 전국소싸움대회 사상 최고의 인원이 관람했다고 한다. ⓒ 김종길

육전과 냉면으로 점심을 든든히 먹었으니 이번에는 그 유명한 진주소싸움을 볼 일이다. 소싸움 경기장엔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진양호 방면의 진입로부터 막히기 시작하더니 길가에 세운 차들로 길은 더 막혔다.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와~' 하는 탄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쯤 되면 궁금해서 배길 재간이 없다. 한달음에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원형의 경기장에 나무를 엮어 만든 울 너머로 두 마리의 소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제120회 진주전국민속소싸움대회가 10월 2일부터 7일까지 진주시 판문동에 있는 진주전통소싸움경기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유명 싸움소 211여 두가 참가하여 6일간의 열전에 돌입했다. 첫날 태백급 예선전을 시작으로 종별로 경기가 진행됐다. 대 태백, 소 태백, 대 한강, 소 한강, 대 백두, 소백두 등 모두 6체급으로 나눠 추첨에 의해 결정된 대진표에 따라 토너먼트 방식으로 대결했다.

최소 600kg에서 최고 850kg이 넘는 육중한 황소가 김을 푹푹 내쉬며 모래판을 휘젓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부리부리한 눈망울과 날카로운 뿔로 상대방의 빈틈을 노리는 소들의 치열한 탐색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올해 120회를 맞는 진주 전국 민속 소싸움 대회는 1897년 첫 대회에서 시작됐다.
올해 120회를 맞는 진주 전국 민속 소싸움 대회는 1897년 첫 대회에서 시작됐다. ⓒ 김종길

들치기, 목치기, 머리치기, 밀치기, 뿔걸이, 뿔치기, 연타, 옆치기(배치기) 등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며 아찔한 상황을 맞으며 팽팽하던 접전은 연이은 공격에 한쪽이 꽁무니를 빼며 도망을 치면서 승부가 갈렸다. 이긴 주인은 결전을 잘 치러낸 싸움소가 그 어느 때보다 대견하고, 진 소주인은 애써 서운한 감을 감추고 덤덤하게 소를 끌고 나간다. 이때마다 관중들의 아낌없는 박수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급기야 장내 아나운서의 한마디에 모두 괴성을 지르며 열광하게 된다.

올해 120회를 맞는 진주 전국 민속 소싸움 대회는 1897년에 첫 대회가 시작됐다. 특히 진주의 소싸움 대회는 일제 강점기에도 이어질 정도로 100년 이상의 전통과 박진감 넘치는 경기력을 자랑해왔다. 진주소싸움은 다른 지역의 소싸움에 비해 기록과 사진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팔월 추석 중에 남강의 백사장에서 소싸움이 벌어졌고 그 기원을 백제에 이긴 신라의 전승 기념잔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고려 말에 자연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의 소를 많이 잡아먹어 소들을 위령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설 등을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민속놀이>는 소싸움이 줄다리기와 함께 진주 일대의 연중 큰 행사로 치러졌다고 적고 있다. <조선도읍대관> '진주편'에선 소싸움과 촉석루를 소재로 한 당시 우표의 스탬프 인장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 지방지의 효시인 <경남일보> 1909년 11월 23일자에는 주필이던 위암 장지연이 <진양잡영(晋陽雜詠)>이라는 소제목으로 진양(진주)을 노래한 것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농가의 8월에는 술 향기 번져나고/가을 곡식 드리운 꽃은 땅에 가득 누렇네/천고의 영웅들이 전쟁하던 이 땅인데/지금에 이르러 투우장이 되었구나"라는 시와 "가을 풀 우거지고 밭갈이 쉬었기로 목동들은 한가한데/억센 소 힘이 솟아 그 분기가 산과 같네/뒤엉킨 뿔싸움 다투어 충돌하니/제(齊) 나라 군대가 절묘한 승리로 묵적(墨翟) 군을 파하고 돌아오는 듯하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이곳의 투우가 심히 성하여 수많은 무리들이 크게 충돌을 부리며 그 등약(騰躍)하고 포효하는 모습이 진실로 일대 장관이더라"고 적고 있다. "이미 남강 백사장은 일제강점기 시작 전부터 '수무바다'라고 일컬어 소싸움 때면 백사장에 수많은 차일(遮日)을 치고 진주 인근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박진감 넘치는 진주소싸움
박진감 넘치는 진주소싸움 ⓒ 김종길

 진주소싸움은 다른 지역의 소싸움에 비해 기록과 사진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진주소싸움은 다른 지역의 소싸움에 비해 기록과 사진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 김종길

이런 기록들로 보아, 소싸움은 멀리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에도 성행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도 우리 민족 고유의 민속놀이로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싸움이라는 것이 많은 구경꾼을 동원하여 넓은 백사장이나 공지에서 행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동네 아이들끼리 소꼴 먹이러 가서는 심심풀이로 소싸움을 붙이는 경우도 있어 농경을 주로 하던 전통시대에 있어서 소싸움은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전통 민속놀이였다.

'칠보화반'으로 불렸던 남다른 맛의 진주비빔밥

이젠 냉면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진주의 맛 비빔밥을 맛볼 차례다.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리는 유등축제를 본격 관람하기에 앞서 배를 든든히 채울 일이다. 진주에 왔으니 진주비빔밥을 먹지 않을 수 있나. 그중 3대 80년째 운영해오고 있는 천황식당을 찾았다. 진주비빔밥은 임진왜란 당시 서둘러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자 비벼 먹은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제사에 썼던 나물과 탕국을 즐기던 음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자는 지금 진주비빔밥으로 후자는 진주 헛제사밥으로 전해진다.

 '칠보화반'으로 불렸던 남다른 맛의 진주비빔밥
'칠보화반'으로 불렸던 남다른 맛의 진주비빔밥 ⓒ 김종길

진주비빔밥이 남다른 데는 먼저 사골국물로 밥을 짓는 데 있다. 밥 위에는 손가락 사이에 뽀얀 물이 나오도록 까부라지게 무친 나물을 얹는다. 여기다 살코기와 선지·간·허파·천엽·내장을 푹 곤 국물에 작고 도톰하게 썬 무와 콩나물, 대파를 넣어 만든 선짓국이 함께 나와 맛을 돋운다. 진주비빔밥은 동황색의 놋그릇과 하얀 쌀밥, 나물들이 만들어내는 색상이 아름다워 '꽃밥' 혹은 '칠보화반'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 색상이 선명하고 신선한 소고기육회를 쓰는 점과 특별하게 만든 고추장인 '엿꼬장'와 '쏙대기(돌김)' 등이 들어가는 점도 특이하다.

'입에 척 감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진주비빔밥은 맛나다. 근데 여기서 하나. 비빔밥은 젓가락으로 비벼야 재료가 상하지 않고 제대로 맛이 난다는 사실…. 천황식당의 계산대 옆에는 후식으로 계피와 감초가 놓여 있다. 이들은 음식을 먹고 난 후 약간은 찝찝한 입안을 싸하고 상쾌하게 한다.

전주비빔밥이 세련되고 거하게 나와 가격이 비싼 반면 진주비빔밥은 소박하고 맛깔나면서도 가격은 절반에도 미치지 않으니 여행자의 가벼운 주머니에는 제격이다. 진주비빔밥으로는 제일식당과 천황식당을 들 수 있다. 천황식당의 비빔밥이 약간 고슬고슬 하다면 제일식당의 비빔밥은 조금은 차진 편이다. 천황식당이 손바닥만한 마당 둘레로 방이 몇 칸 있어 마치 60, 70년대의 예스러움이 있다면 제일식당은 장터의 활력을 느낄 수 있는 시끌벅적한 곳이다.

대명천지가 따로 없군! 물·불·빛의 향연, 진주남강유등축제

 진주 천수교에서 본 진주남강유등축제
진주 천수교에서 본 진주남강유등축제 ⓒ 김종길

 촉석루 앞 진주남강유등축제
촉석루 앞 진주남강유등축제 ⓒ 김종길

드디어 어둠이 내렸다. 축제가 열렸다. 시월이 시작되자마자 1일부터 2주 동안 14일까지 진주시 남강은 빛의 도시로 변했다. 대낮처럼 강을 밝힌 수많은 유등을 보는 순간 아찔해진다. 이를 두고 대명천지라 하면 과장일까. 그 불빛을 따라 사람들이 강물 위를 걷고 있다. 부교였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강으로 내려섰다. 역시 발 디딜 틈이 없는 건 마찬가지. 음악소리를 따라 발길을 옮기니 예전에 보았던 페루인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어두운 남강을 밝히는 유등 빛과 안데스의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묘하게 어울린다.

부교를 건너기로 했다. 입장료는 1000원. 출렁이는 부교가 불안하기도 하지만 강물 위를 걷는다는 건 설렘 자체다. 각양각색의 유등과 형형색색의 빛으로 출렁이는 물빛이 환상적이다.

성 안은 인파로 넘쳤다. 마침 한바탕 풍물놀이가 질펀하게 펼쳐지고 있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한 줄로 길게 앉은 아이들이 온 신경을 집중하고 보고 있는 건 뮤지컬이었다. 가을밤 야외에서 공연을 보니 절로 흥이 나고 유쾌해졌다. 박물관 앞 공연장도 떠들썩했다. 온 성 안이 축제의 장이었다.

 촉석루와 남강 야경
촉석루와 남강 야경 ⓒ 김종길

덧붙이는 글 | ☞ 지난 10월 6일과 9월 29일 등 수차례에 걸쳐 다녀왔습니다. 이 글은 코레일과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진주 남강에 유등을 띄우는 유등놀이는 임진왜란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오늘날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기록되는 진주대첩이 일어난 1592년 10월, 진주성 싸움에서 당시 의병들이 성 밖의 지원군과 연락하기 위해 군사 신호로 풍등을 하늘에 올리면서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운 데서 비롯되었다. 군사 신호로 쓰이기 시작한 유등은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 전술로도 쓰였으며, 진주성 안의 병사들과 백성들이 두고 온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1593년 6월 진주성의 함락으로 7만에 달하는 병사와 백성들이 순국하여 이들의 넋을 기리게 위해 유등을 띄웠는데 그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진주전국민속소싸움대회가 개천예술제와 유등축제 기간 동안인 지난 10월 2일부터 7일까지 진주시 판문동에 있는 진주전통소싸움경기장에서 열렸다. 이 시기가 아니더라도 진주전통소싸움경기장에선 매주 토요일 오후 상설 경기가 열린다.

진주냉면의 본점에 대해선 약간의 논란이 있다. 현재 장남인 하연규 씨는 ‘황덕이 진주냉면’을, 그의 남동생은 평거동 진주냉면들말점을, 여동생 하연옥 씨는 하연옥을, 그녀의 남편 정운서 씨는 진주시 하연옥 하대직영점을, 언니 하귀옥 씨는 하연옥 사천직영점을 운영하고 있다. 하연옥 본점은 경남 진주시 이현동 1191 이현웰가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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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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