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의 말발굽, 아케메네스 유린... 샤푸르, 로마황제 무릎 꿇려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는 그리스를 통일하고 마침내 BC 330년 동방원정에 나선다. 당시 페르시아 왕은 다리우스 3세였지만,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알렉산더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지금 카스피해 연안의 박트리아로 도주하고, 알렉산더는 페르세폴리스로 진입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 신성한 도시는 초토화되고 결국 땅속으로 파묻혀 그후 2천 년간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알렉산더 사후 페르시아는 그의 부하 장군 셀레우시드에 의해 통치되어 헬레니즘 페르시아 왕조가 한때 만들어진다(이것은 BC 162년까지 지속됨). 그러나 이 시기 페르시아 이곳저곳에서는 끊임없는 반란이 일어난다.
헬레니즘 페르시아기에 페르시아의 북쪽에는 파르티아 왕조(BC247~AD224)가 들어선다. 이 왕조는 카시피해와 아랄해 사이에서 만들어져 점점 세력을 뻗쳐 BC 2세기 후에는 과거 아케메네스 제국의 페르시아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게 된다. 이 제국은 로마와 경쟁 관계에 들어가며, 이 시기에 페르시아의 건축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페르시아는 서기 3세기에 이르러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화가 다시 살아난다. 그 주인공이 바로 사산왕조다. 이 왕조는 바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근거지인 파르스를 중심으로 서기 224년에 아데쉬르 1세의 영도하에 강력한 왕국을 만든다. 이 왕국은 241년에서 272년 사이에 아데쉬르의 아들 샤푸르 1세에 이르러 최번성기에 들어간다.
샤푸르는 박트리아 지역을 손에 넣고 드디어 로마와 경쟁한다. 그의 군대는 서기 260년에 에데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생포한다(이것과 관련된 그림이 뒤에서 보는 페르세폴리스 근처 낙쉐 로스탐의 암벽 부조이다). 로마사에서 황제가 적의 포로가 된 것은 아마도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일 것이다. 한편 이 왕국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발전시킨다. 역사가들은 이 왕조를 제2차 페르시아 통일 제국이라 부른다.
서기 7세기 이후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이슬람의 성장은 결국 페르시아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들 세력은 동진을 거듭하면서 사산 왕조를 무너뜨린다(637년). 우마야드 칼리프는 페르시아를 복속시키고 이어 8세기 중엽에 이르러 아바스(Abbas) 왕조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강화한다. 이 시기 이슬람 문화는 페르시아 전역을 지배한다. 페르시아는 이후 왕조가 달라지더라도 이슬람의 영향은 결코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페르시아는 11세기가 되어 또 다른 이민족인 셀주크 터키에 의해 지배된다. 1051년 셀주크 터키인들은 이스파한을 점령하여 그곳을 수도로 정한다. 11세기 중반이 될 즈음에는 이들은 현재의 시리아, 이라크, 인도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한다.
13세기에 이르러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는 유라시아 전역을 손에 넣는데, 이때 페르시아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페르시아도 칭기즈칸 대제국의 일부가 된 것이다. 몽골은 페르시아를 칭기즈칸의 손자인 훌라구에게 내주어 일한국을 세움으로써 통치케 한다. 이 기간 중 몽골인들은 페르시아의 많은 도시를 파괴하고 역사문헌을 훼손한다. 한편 14세기 말에는 몽골 왕국의 분파로 볼 수 있는 티무르 왕국이 세워진다.
페르시아의 후예, '세계의 절반' 이스파한을 만들다
16세기 초 페르시아는 또 하나의 강력한 왕국이 세워진다. 이름하여 사파비 왕조다. 이 왕조를 연 사람은 이스마일 사파비인데, 그는 시아파 부족 사파비족의 지도자로 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 지역을 통일시킨 다음 수도를 타브리츠로 정한다. 이후 두 번째 왕 타흐마스프는 수도를 테헤란 근처의 카즈빈으로 옮긴다.
사파비 왕조의 절정기는 아바스왕(1587~1629) 때인데 그는 투르크메니아와 터키 세력을 모두 격파하여 또 하나의 대제국을 건설하는 한편 이스파한으로 수도를 이전한다. 이스파한의 이맘 모스크 등의 대형 건축물은 모두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스파한이 세계의 절반이라고 불린 시절이다.
사파비 왕조 200년은 18세기에 들어 와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프간인들의 침입과 러시아 및 터키 등의 지속적인 침략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내이더 샤인데, 그는 사파비 왕조의 문을 내리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18세기 중반 그는 암살되고 그의 뒤를 이은 카림 칸이 나타나 잔드 왕조를 연다. 그는 수도를 이스파한에서 시라즈로 옮긴다. 그러나 이 왕조도 카림 칸의 죽음으로 단명한다.
이어서 탄생한 왕조가 카자르 왕조(1779~1925). 이 왕조는 2500년 페르시아 역사상 가장 수치스런 시대를 역사에 기록한다. 이 시기 영국과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은 페르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갖가지 이권을 챙긴다. 특히 이 시기에 러시아는 카자르 왕국의 영토인 조지아, 쉬르반(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동부 아르메니아 등을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카자르 왕조의 사치는 극에 달하여 이를 위해 국부는 나날이 동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들은 20세기 초 민주화를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헌법이 제정되고 의회가 만들어진다. 이름 하여 헌법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카자르 왕조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과 러시아에 의해 분할 점령되기도 한다.
제국주의 꼭두각시 팔레비, 마침내 민중혁명으로 무너지다
1921년 당시 군인이었던 레자 칸은 쿠데타를 일으켜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는다. 그는 나름대로 이란의 현대화를 이끈다. 여자들의 차도르를 없애고 종교적 권위를 부정하며 세속국가의 길을 걷는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중립국을 표방하면서도 어쩐지 나치 옹호 발언을 한다. 이것은 당시 영국과 러시아의 간섭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대전 중 남아공화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그리고 그의 자리는 그의 아들 모하메드 레자, 곧 팔레비에 의해 교체된다. 팔레비 왕은 적극적인 현대화 정책을 취하면서도 한편으론 무자비한 독재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사람들은 팔레비의 독재 배후에는 항상 미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8년 이슬람 혁명이 터지고 이어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하여 온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 금의환향한다. 이로써 팔레비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국가, 이슬람 공화국 이란이 탄생한다.
차도르 두른 여성, 페르시아의 관문을 지키다
자, 이런 정도 페르시아에 대한 역사를 공부하였으면 이제 페르시아 문명기행을 본격적으로 해보자. 우리 탐사단은 2월 4일 밤 인천공항에서 테헤란행 이란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어쩐 일인지 비행기는 예정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어서야 이륙을 하였다.
당시 이란 직항노선은 이란항공만이 운항하였는데, 비행기는 낡은 보잉 747이었다. 떠나기에 앞서 참가자들은 미국의 경제 봉쇄 정책으로 이란항공을 이용하는 것이 위험할지 모른다고 걱정하면서 서로의 안전을 빌었다. 항공기 부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항공기 상태가 불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나도 집을 떠날 때는 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여행자 보험이나 들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 하나는 만들어 놓고 가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공항에 도착하여 보니 경황이 없어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떠나고 말았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마냥 인명은 재천이라고만 되뇌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쪼록, 아무 일 없이, 앞으로 일주일, 좋은 것 많이 보고 와야 할 텐데….
비행기는 9시간을 날아 호메이니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트랩을 내려 입국수속을 밟으러 발길을 옮겼다. 첫인상은 조금 음울하다. 입국심사원은 차도르를 쓴 여성이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다소곳이 나의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땡큐"하는 나의 인사말을 들었는지, 듣고도 모른척하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여성의 인권이 극도로 제약된다는 이란에서 그 첫 관문에 여성을 배치하였다는 사실은 이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하여 또 다른 시각을 갖게 하였다. 억압된 사회 속에서도 활발히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 이것이 나의 음울한 첫인상 속에서도, 이란에 대한 하나의 희망이었다.
김수로왕의 쌍어문, 이란에서도 찾을 수 있을까
다음날 아침 우리 탐사단은 우선 이번 탐사를 위한 기초로서 이란 문명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현지 전문가를 통해 듣기로 하였다. 현지에서 진행된 페르시아 문명탐사 오리엔테이션이다. 우리의 문화재청에 가까운 정부기관의 부책임자가 나와서 이란 문명의 전반적인 특징을 설명하였다.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이란은 오랜 세월 많은 민족과 부단한 경쟁 속에서 발전해 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란은 국토의 대부분이 고원지대로 카스피해 남쪽에서 동서로 뻗는 엘브로즈 산맥과 이라크 쪽에서 남동 방향으로 뻗는 자그로스 산맥은 거대한 분지를 만들고 있다. 이 양대 산맥은 5천 미터에 가까운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산맥을 사이에 두고 상이한 문화가 자리 잡고, 그것들이 서로 각축을 벌여 왔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오리엔테이션에서 탐사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우리 고고학계의 원로이신 김병모 교수의 말씀이 이채로웠다. 김 교수는 지난 40년간 우리나라 가야의 김수로왕능에서 나온 쌍어문(두 마리 물고기 문양)을 연구하여 왔다고 하면서 이 쌍어문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네팔,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는 데 유독 이란에서는 발견된 바가 없다고 하였다.
김 교수는 이 쌍어문이 이란에서 발견된다면 아시아 전 지역에서의 고대문화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당신에게 있어 이번 탐사의 목적은 거기에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란 전문가는 속 시원한 답변을 하지 못했으나 그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쌍어문이 이란에서도 발견되어 고대 문명의 교류가 확인될 수 있을까, 이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탐사의 보람은 찾을 수 있으리라.